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중국은 송나라때 대항해시대가 있었다

중은우시 2013. 2. 4. 19:18

글: 이동군(李冬君) 

 

유럽인이 중국으로 항해해오기 전에, 중국은 이미 대항해의 시대가 있었다.

청나라사람 서계여(徐繼)의 <영환지략(瀛寰誌略)>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서역과 교류할 때부터 한인(漢人)으로 불리웠고, 남양으로 항해하기 시작한 것이 당나라때부터이므로 당인(唐人)으로 불리웠다. 그러나, 당나라이전의 해외무역은 기본적으로 기이한 물건을 얻어 상국의 위엄을 자랑하기 위함이고 조공관계였다. 당나라이후, 시장경제로 전환하여 무역관세에 중점을 두었다.

송나라때, 요, 금이 북방을 압박하고, 서하가 서역과의 교통로를 차단하였기 때문에, 무역은 바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바다로 나간 것이다. 해역을 크게 열면서 새옹지마의 대항해시대가 개막된다.

그러므로, 일본학자중 내등호남(內藤湖南)은 아주 민첩했다. 그는 말한다. 당나라는 중세기의 끝이다. 송나라는 근대화의 시작이다. 서방학자들도 말한다. 송나라는 중국의 '르네상스'(문예부흥)시대이다. 새로운 사회가 탄생했고, 기본특징은 이미 근대화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남도(南渡)후, 송고종은 해로를 통하여 온주(溫州)로 도망치고, 강심서(江心嶼)에서 바다물을 보았다. 몇 달을 보고는 돌연 깨닫는 바가 있었다. "시박(市舶)의 이익이 가장 두텁다. 소득이 걸핏하면 백만을 헤아렸다" 하물며 천자의 창고를 백성들에게서 받아오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아예 외국상인에게 받아내는 것이 나았다.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었다. 임안(臨安)에 도착하자, 그는 대외개방을 선언하고, 해외의 상인을 불러들인다. 외국상인유치를 국책으로 삼았을 뿐아니라, 해역개척을 발전전략으로 삼는다.

그때부터, 중국인은 아랍인과 함께, 인도양의 해양을 장악한다. 송고종은 해상을 장려하고 해선을 건조하도록 장려하고, 화물을 구매하여 해외무역을 했다. 그리고 해안선에 매 30리마다, 등대를 건립하여 항해시 길잡이를 하도록 하여, 항행중인 선박을 이끌어주었다. 그리고 상인들의 협조를 구하여 선단을 만들었다. 이 선단은 아랍인들이 장기간 인도양에서 누리던 제해권을 대체하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남송의 항해는 대부분 상선이고, 그 목적은 장사였다. 그래서, "거상을 강수(綱首), 부강수로 했다" 이는 나중의 정화(鄭和)의 하서양(下西洋)이 관선이고 상선이 아니며, 관리이고 상인이 아니던 것과 다른 점이다. 그외에 당시 남양의 섬나라들은 세금이 없었으나, 뇌물은 많았다. 명목은 "헌송(獻送)"으로 화물의 다과를 불문하고 일률적으로 '헌송'을 받았다. 그래서 작은 배로 가는 것은 불리했다.

선박이 크면 풍랑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바닥이 땅에 닿아서 걸리는 것을 겁냈다. 그래서 자주 "귀노(鬼奴)"를 쓰는데, 흑인을 의미한다. 그들은 수영을 잘하고, 물에 들어가도 눈을 뜰 수 있어, 일단 선박에 물이 새면, "귀노"에게 명하여 손에 칼과 밧줄을 들고 물에 들어가서 막도록 시켰다. 그리고 "주사(舟師)"가 있어 항해를 인도했는데, 그들은 바닷속의 진흙을 냄새만 많아도 선박을 어디에 정박시켜야 할지 알았다. 밤이 되면 별을 보고, 낮에는 해를 보고, 흐린 날에는 나침반을 보는 것이 통상적인 방법이 되어 버렸다. 특히 나침반으로 항로를 개척하게 되고난 후로는 항해하는 사람들이 하늘과 별을 보는 것이 신앙으로 남는다. 그래서 해외승려를 중시하고, 어려움이 닥치면 기도를 한다.

니는 북송 선화연간에 주욱(朱彧)의 <평주가담(萍州可談)>에서 소개한 상황이다.

그는 또한 이런 말도 했다. 배에 싣은 화물은 자기가 대부분이다. 당나라중기부터 시작하였는데, 1998년에는 인도네시아의 벨리통해역에서 당나라때 침몰선을 인양하였는데, 선박에 적재된 화물 67000여건중에서 98%가 자기였다. 침몰선 부근에 흑색의 큰 암초가 있어, "흑석(黑石)"을 표기로 명명하여 "Batu Hitam"이라 한다.

당나라때 해외에 판매한 자기는 월요(越窯)의 청자(靑瓷)가 위주이다. 외국상인의 취향은 육우(陸羽)와 비슷했던 것같같다. 청자가 좀 더 낫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월주는 도자기로의 시발점이다. 출구는 이웃한 명주(明州, 지금의 닝보)이다. 명주에서 바다로 나가, 동양을 항해하고, 남양으로 내려가고, 다시 서양으로 간다. 중간에 광주항을 거쳐간다. 광주는 도자기로의 외국상인들이 들어오는 항구이므로, 외국상인들은 모두 여기에 모여있었다. 그들은 여기서 자기를 '차이나' china라고 칭하기 시작한다. 옛날 그리스, 로마가 비단을 "사이리스"라고 칭한 것처럼.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지나"와 "사이리스"가 같은 어근을 가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인도유럽어계에서 중국을 "차이나"라고 부른 것은 유래가 깊다. 그 어근을 따져보면 3천년전의 고대산스크리트어에서도 나타난다. 삼대에는 "은인(殷人)"으로 칭하고, 한,당이후 동서무역과 불교전파고 오래된 어근은 다시 개화하여 결실을 맺는다.도자기로를 유대로 하여, 동양과 서양이 연결되며, 인도는 연결점에 있다. 이 연결은 '차이나'를 인도유럽어계에서 다시 힘을 얻게 만든다.

유사하(流沙河)의 <자기와 무관하다>는 글에서 당나라때 의정법사(義淨法師)가 <남해기귀내법전>에서 말한 내용을 소개했다: "서국(西國)에서 대당(大唐)을 차이나(支那)라고 부르는 것은 그 이름이고 다른 뜻은 없다." 이 의정법사는 바다를 항해하여 인도로 불법을 구하러 간 적이 있다. 그가 말한 것은 당연히 가장 믿을만하다. 그러나, "지나"는 적막한 어근에서 유행단어로 변신한다. 그것은 아무래도 도자기때문이다. 자기 특히 청자의 유행은 고대 산스크리트어의 "차이나"를 새로 의식하게 만들었다. 먼저 "월청(越靑)"이 "차이나"를 대표한다. 왜냐하면 당나라때 대외판매하는 자기는 월주요의 청자가 위주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용천요(龍泉窯)가 흥기하면서 용천요의 청자가 대체한다. "차이나"라는 단어는 세계각지에 퍼져가고 유행한 시간이 길었다. 송, 원부터 명, 청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차이나"를 경덕진자기로 생각하는데 이로 인하여 그곳의 구석에 있는 '창남(昌南)'을 '차이나'의 어원으로 여기기도 했었다.

경덕진자기는 비록 송,원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송나라대 가장 유행한 것은 경덕진자기가 아니라, 용천요자기이다. 송나라때의 오대명요가운데 가요(哥窯)는 바로 용천자기의 대표이다. 나머지 사요는 모두 궁정취향이어서 서양인들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대외판매하는 도자기가 아니었다. 오로지 용천요의 자기만이, 대내적으로 정교함을 추구하는 궁정의 취향에 맞았을 뿐아니라, 대외적으로 세계에 팔릴 수 있었다. 그 당시 경덕진자기가 처음 흥성할 때 청백자기는 용천청자의 뒤를 이어 세계로 향한다. 송나라때가 되어, 도자기길의 시발점은 구강(甌江) 상류의 용천요가 되고, 출구는 온주가 된다. 여기서 동양을 지나거나, 혹은 명주를 통하여 직접 나가 광주, 천주를 경유한다.

 

용천요소재지의 일부분은 동진시기에 영가군(永嘉郡)에 속했다. 인문지리적으로 보면, 전체 구강유역은 하나의 총체이다. 나중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서는 곤란하다. 역사의 눈으로 보자면 용천자는 구자(甌瓷)가 송나라때 발전한 것이다. 구자산업은 남계강에서 구강유역으로 들어갈 뿐아니라, 용천요를 따라있는 구강을 따라 산위로 간다. 구강상류로 가면, 더더욱 도자기의 품질과 격조가 있다. 표자(縹瓷)와 같이 아름답고 미묘한 것도 있다. 여오(汝窯)의 남천으로 두 아름다운 그림자는 다시 한번 합쳐진다.

일본학자, 삼상차남(三上次男)은<도자기의 길>에서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시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청자의 생산중심은 절강성의 용천으로 옮겨간다. 이런 자기의 청색은 가을의 높고 맑은 하늘과 같고, 조용한 심해와 같다. 이것이 바로 세계에 이름을 떨친 용천요 청자이다." 남조의 "표자"에서 당나라의 "월청" 다시 여요의 "천청(天靑)"에 이르기까지, 삼상 선생은 심오한 안목으로 한눈에 중국청자의 발전이 일맥상통하는 주격조를 알아차렸다. 용천자기의 "천청해록(天靑海綠)"은 바로 '표자'의 담청범록에서 발전한 것이다. 구강은 산과 바다의 사이에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이런 격조가 형성되었다.

남송시기, 조정은 전력을 다하여 해양을 경영한다. 그리하여 '도자기로'의 분포범위는 '비단길'보다 몇배나 많았다. 무역흑자는 계속 확대된다. <건염이래조야잡기>에서는 "도강의 초기에, 동남이 세입은 천만이 되지 못했다" 그때 절(浙), 민(閩), 광(廣)의 세 시박사의 수입은 이미 이백만관에 이르러, 5분의 1을 점한다. 남도초기, 고종은 돈이 부족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경제는 회복된다. 국토는 비록 절반을 잃었지만, 재정수입은 북송최전성기에 접근했다. 송효종때에 이르러서는 이미 북송을 넘어선다.

확실히, 이는 해외무역이 가져다준 성취이다. 국토에서의 손실을 무역흑자로 보완한 것이다.

<청명상하도>를 보자. 그러면 변주(개봉)의 번화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조운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 운하의 시작점은 항주가 아닌가. "그냥 항주를 변주로 삼다". 운하의 가장 중요한 기능의 하나는 변주에 끊임없는 재원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항주의 번화는 조운이 가져온 것이외에 해운이 가져왔다. 그때, 절강동부연해는 왕조의 생명선이다. 이 해안선이 항구는 왕권의 명문이 된다. 가장 중요한 급소는 두 개이다. 하나는 명주로 지금의 닝보이고, 다른 하나는 온주이다.

명주는 금나라병사들에게 온 도시가 불에 탄 후, 페허가 된다. 온주는 하늘의 보살핌을 받았는지, 금나라병사가 태주에 이르자 이미 세력이 쇠퇴하고 피로함을 보여 돌아간다. 온주에는 전투가 없었고, 번화함이 유지된다. 

북송시기, 온조는 1년에 600여척의 큰 배를 만들어 냈다. 당시에도 1,2위를 다투었다. 더욱 이른 시기인 삼국시대의 동오는 관청이 운영하는 대형조선공장을 만든 바 있다. 그때부터, 중국남방 3대해선건조기지중 하나가 된다. 강심서는 항상 항표도(航標島)였다. 동,서 두 탑은 화려한 등이 높이 비추고, 해선의 길잡이가 된다. 그외에 그것은 피풍항(避風港)이었다. 풍랑을 피해 배가 이 곳에 정박한다. 그리고 바람에 제사지내는 의식을 거행하고, 바람이 가라앉기를 기도한다. 그 후에 '큰 배 수백척이 바람을 타고 돛을 올리고, 대양으로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