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령신(陳令申)
문헌자료기록에 따르면, 충칭(重慶)시 서부에 있는 다주(大足)의 북산(北山) 불만(佛灣)에 있는 많은 불상들 중에 석비(石碑)가 하나 서 있다. 높이는 3.7미터, 너비는 1.37미터이고, 비의 한가운데에는 전서(篆書)로 두 줄이 새겨져 있다: "조의간공신도비(趙懿簡公神道碑)" 고증에 의하면, 이 비문(碑文)은 송나라때의 재상 채경(蔡京)이 쓴 것이다. 그래서, "채경비"라고 부른다.
이 석비위에 쓰여져 있는 것은 조의간공의 묘지명이다. 이건 이상한 일이다. 다주북산에는 그의 묘지가 없을 뿐아니라, 조의간공은 다주 사람도 아니다. 심지어 다주 북산에는 와본 적도 없다. 그렇다면, 이 묘지명은 어떻게 하여 북산의 석각군에 포함되게 되었을까? 이야기하자면 길다. 아래의 내용은 그에 관한 이야기이다.
옛날 북송(北宋)때 두 명의 유명한 인물이 있었다. 한 명은 소식(蘇軾)이고, 다른 한명은 채경(蔡京)이다. 두 사람은 당시에 이름을 날리던 대서예가이다. 글을 아주 잘 썼다. 명산고찰에 그들 두 사람이 쓴 글이 모두 걸려 있었다. 이렇게 "미,채,소,황(米,蔡,蘇,黃)"의 4대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후세인들은 4대가에서 채경의 이름을 빼내고 그와 동향인 채양(蔡襄)으로 바꿔버린다.
이 채경과 소식은 서예계에 같이 속해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정적이었다. 소식은 원우당(元佑黨) 사람이다. 채경은 신당(新黨)쪽이다. 두 사람은 정치적 견핵의 차이로, 자주 물과 기름처럼 싸웠고, 항상 상대방을 사지에 몰아넣고자 했다.
이 채경은 비록 재능과 학문은 출중하지만, 마음은 악독했다. 신당이 득세하자, 채경은 재상의 지위에 오른다. 그리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에 보복한다. 소식을 경사에서 쫓아냈을 뿐아니라, 소식의 서예작품까지 한푼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폄하해버린다. 소식의 서예작품을 냄새나는 개똥에 불과하다고까지 말한다. 이 뿐아니라, 그는 전국에 명을 내려보내어, 소식이 각지에 쓴 비석을 다 때려부수고 조각도 남기지 못하게 한다. 채경의 부하들 중에는 믿을만한 심복이 있었는데 이름이 조이(趙二)였다. 그는 일찌기 한 무리를 인마를 이끌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채경의 명령을 집행했다. 소식이 쓴 비석과 비문은 모조리 파괴했던 것이다. 나중에 조이는 일을 잘 처리한 공로로 채경의 권세에 빌붙어 고속승진하여 고관이 된다.
이 조이가 바로 채경과 같은 당에 속하는 조의간의 친조카이다. 그래서 조의간이 섬서의 고향에서 병사한 후, 그는 당대의 저명문인인 범조우(范祖禹)가 써준 제문(祭文)을 가지고 은사 채경에게 가서 글로 써서 후세에 남겨달라고 간청한다. 채경은 관직을 좋아할 뿐아니라, 명성을 날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서예를 드러낼 기회만 있으면 절대로 사양하지 않았다. 이번에 심복 조이가 부탁하자 그는 기꺼이 응락한다. 채경은 용비봉무하며 일필휘지하였으며, 서예의 수준이 뛰어났다. 조이는 이 묵보를 얻자 기뻐하며 연신 감사인사를 했다. 이 뛰어난 작품을 시골의 석장에게 맡겨서 함부로 돌에 새기는 것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개인적으로 소장을 한다. 그리고 고향의 수재를 불러서, 다시 쓰게 하고, 이를 새겨서 비로 만든다. 그래봐야 이미 죽은 조의간이 알아챌 리가 없지 않은가?
누가 생각했으랴. 몇년후 세상이바뀐다. 구당이 득세하고 채경이 쫓겨난다. 그의 심복 조이도 연루되어, 황급히 밤을 틈타 도망친다. 그의 몸에 지닌 보물들 중에는 바로 그가 아껴서 보관하고 있던 채경이 쓴 "조의간공묘지명"이 있었다.
하루는 조이가 산간지역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불을 에워싸고는 욕을 해대고 있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원래 욕을 하는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의 은사인 채경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를 간적(奸賊)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그를 냄새나는 개똥이라고 말했다. 원래 채경이 실각한 후, 구당이 등용되자, 소식등은 채경을 뼛속까지 미워했다. 그래서 그가 했던대로 그에게 되갚아 준다. 사방에 사람을 보내어 채경이 쓴 비문을 찾아내어 모두 없애버린다. 심지어 그를 서예가의 명단에서도 축출시킨다. "미, 채, 소, 황"을 "소, 황, 미, 채"로 고쳤을 뿐아니라, 이 "채"도 채경이 아닌 채양으로 넣었다. 채경의 서예계에서의 지위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 불 속에 타고 있는 것은 바로 채경이 쓴 금편액이었다. 사람들은 욕을 하면서 웃고 있었다. 조이는 일대 대가의 묵보가 잿더미로 변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애통해 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생각한다: 촌사람들은 고루과문(孤陋寡聞)하다. 너희들이 어찌 이 글자의 진귀한 가치를 알겠는가?
그날 저녁, 조이는 산간의 한 절에 투숙한다. 등불아래에서, 채경이 쓴 "조의간공묘지명"을 꺼내놓고 한편으로 감상하며, 한편으로 눈물을 흘린다. 옛날의 영화를 생각하고, 지금의 곤경을 생각하고, 숙부는 세상을 떠나고, 은사는 실의에 빠져있으며, 세태의 염량, 인정의 냉난을 느끼면서, 날은 저물었는데 길은 막혀 있다(日暮途窮). 명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이름과 성을 숨기고 불문에 들어가서 남은 여생을 마칙로 결정한다.
몇년 후, 조이와 화상은 대주북산의 용강사(龍崗寺)로 간다. 이곳의 석각이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산수가 영험한 것을 보고 이상적인 수행장소라고 여긴다. 그래서 장로를 뵙고는 이 곳에 남아서 스님으로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장로는 그가 성의가 있고, 행색이 속되지 않음을 보고는 승락한다. 조이는 북산으로 와서 매일 공부를 끝내면, 항상 불만에서 석각예술을 감상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찬탄해마지 않았다. 하루는 돌연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내가 돈을 좀 써서 기술이 뛰어난 석각예술가에게 은사 채경이 남긴 진귀한 묵적을 석벽에 새겨 후세에 남기도록 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숙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것도 되고, 은사에 대한 존경의 뜻도 나타낼 수 있다. 세상사람들은 채경이 죽일 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글자는 너무나 뛰어나니 사람이 잘못했다고 그의 글까지 없앨 필요는 없고, 사람이 잘못했다고 그가 남길 글자까지 없앨 필요는 없다. 진귀한 보물을 이렇게 버려두는 것은 실로 너무 아쉬운 일이다.
그리하여, 조이는 암암리에 기회를 찾아서 불만의 장인들과 잘 어울린다. 그러다가 하루는, 채경의 글을 내놓고 통곡을 한다. 장인들이 물었을 때 그는 대답한다: 종이 위에 쓴 것은 이미 고인이 된 숙부의 제문인데, 그날 시간이 급하여 석비에 새길 수가 없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숙부에게 항상 미안했다. 이것이 마음 속에 여한으로 남았다. 장인들은 그의 말을 듣고는 웃으며 말한다: "그게 뭐 어려울 것이 있겠는가? 돌을 새기고 조각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맡겨달라. 시간이 남을 때 우리가 새겨주겠다. 너와 같이 효심이 있는 사람의 바램을 이루게 해주겠다."
조이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눈물을 닦고 연신 감사인사를 한다. 장인들은 그가 도대체 왜 그러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며칠 후, 장인은 과연 조이의 뜻대로 "조의간공신도비"를 청석에 새긴다. 장인들은 몰랐다. 그리고 그들은 당쟁의 시비를 물을 생각도 없었다. 조의간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이 두드러지지 않는 비석은 북산의 석각들 속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해가 가고 왕조가 바뀌어도 무슨 풍파나 시비가 일어나지 않았다. 수백년을 지나도록 여전히 북산의 석벽에 잘 보존되어 있으니 이 또한 다행인 일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것이 바로 "채경비"의 유래이다. 지금 다주북산의 석각을 관광하는 사람들은 이 전설이야기를 듣고 어떤 느낌이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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