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위득승(魏得勝)
한가지 문제는 계속 나를 괴롭혔다. 그것은 바로: 역사적으로 문화수준이 낮은 새북(塞北)의 오랑캐족이 왜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송제국을 3백여년간이나 능욕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이것은 조광윤 일족이 강력하게 반쿠데타정책을 집행한데 따른 반작용이라는 점이외에, 더욱 중요한 점은 새북의 각 정권이 충분히 한족과 한문화를 흡수한 소치이다.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새북정권과 송제국의 여러번에 걸친 전쟁과정에서 한인의 성진이 함락되면, 금전, 미녀, 문무관리를 약탈하는 행동이 있었고, 문화재산(예를 들어, 서적, 도책, 역서, 석경, 악보등등)에 대한 약탈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새북인들은 한인을 좋아했고, 한문화를 경모하여 거의 광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북송에 왕계충(王繼忠)이라는 사람이 있다. 조항(趙恒)이 왕야(王爺)로 있을 때, 그는 조항을 곁에서 모신다. 나중에 송요(宋遼) 전쟁과정에 왕계충은 불행히도 요나라의 포로가 된다. 왕계충을 포로로 잡은 후, 소태후는 그를 보배처럼 여기고, 그에게 아주 잘 대해준다. 그리고 종실의 여인을 주어 왕계충의 처로 삼는다. 송제국의 황제 조항도 왕계충을 계속 잊지 않고 그리워했다. 매번 송나라사신이 요나라로 갈때면 왕계충에게 조항이 친필로 써서 봉한 찻잎과 귀중한 명약을 보내곤 했다. 소태후와 야율융서 황제의 앞에서, 왕계충은 매번 무릎을 꿇고 조항의 하사품을 받아, 옛주인을 아직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나타냈다. 소태후와 야율융서는 이를 싫어하지도 않고, 이를 꺼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왕계충의 행위를 충의(忠義)로 받아들였다. 같은 사람과 일에 대하여 송황실로 바꾸어 보면, 아마도 왕계충이 똑같은 일을 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요나라에서 더욱 중용받은 한인이 있다. 그는 한덕양(韓德讓)이다. 소태후가 처음 국정을 장악했을 때, 일찌기 울면서 대신들에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지금 과부이고, 황제는 아직 나이가 어리다. 야율가족의 다른 방계는 강성하여 제어하기 어렵다. 이것들때문에 나는 머리가 아프다. 그런데 요송의 변방에서는 전투가 끊이지 않으니 나는 어떡하면 좋겠는가" 근신인 한덕양과 야율사진은 급히 무릎을 꿇고 말했다: "태후께서 신등을 신임하신다면 걱정하실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한덕양에 대하여 계속하여 신임을 하고 있던 소태후는 그 자리에서 위수부대의 사령관이라는 대권을 한덕양에게 넘겨준다. 그리고 소태후는 금방 한덕양과 동거를 시작한다. 그후, 소태후는 한덕양에게 남추밀원집정관을 맡긴다. 999년, 북추밀원집정관을 맡고 있던 야율사진이 병사한 후, 소태후는 아예 북추밀원의 빈자리도 한덕양에게 겸직하게 한다. 이때부터 한덕양은 요제국의 제2인자가 된다. 소태후가 제1인자, 야율융서 황제가 제3인자가 된다.
금나라는 한인을 중시하는 면에서사람들에게 더욱 은 인상을 남긴다. 금나라정부의 관리중에서 비율을 보면, 한족이 6700여명이고, 여진족이 4700여명이었다. 확실히 한족이 여진족보다 많았다. 한인장군이 금나라군대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보통이 아니었다. <금사.충의전>에 보면, "정대2년 애종이 죽은 열사들을 기렸는데, 마습례길사, 왕청, 전영, 이귀, 왕빈, 풍한노, 장덕위, 고행중, 정제, 희범, 장산등 13명이고, 포충묘를 세웠고, 그들의 자식에게 관직을 주었다. 두 사람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여기에서 금제국의 황제가 상을 내리고 묘를 세워준 자중에서 마습례길사가 서역인인 것을 제외하면 모조리 한인이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한인장수는 금나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이들 한인이 이국에서 세운 공헌은 이미 그들의 무가지보이다. 바로 한 사람이 일생동안 하나밖에 가지지 못한 목숨이다.
한인이 왜 금나라사람들을 위하여 부탕도화(赴湯蹈火)했을까? 그것은 바로 금나라군대가 점령한 지역의 한인은 남송과 자신의 정부로부터 너무나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간이 길어지니, 북방한인은 세대가 내려가면서 국가를 잃은 원한을 잊어버리고, 민심이 돌아서서 자연히 금나라를 정통으로 인정하게 된다. 이것은 중화민국초기의 상황과 비슷하다. 일부 한인은 체두변발을 한 머리를 자르지 않으려 했고, 이는 조상이 물려준 것이므로 고칠 수 없다고 했다. 일부 한인지식분자들이 변발머리를 흔들며 "우리의 조상 쿠빌라이"라고 크게 떠들기도 했다. 이것은 모두 이족의 통치하에서 너무 오래 있어서 근본을 잊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송정부는 자신의 북방백성을 포기하고, 강남에 편안히 웅크리고 앉아서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백성이 무슨 이유로 이렇게 나쁜 정부를 포기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리고 무슨 이유가 있어 점령당국에 협력하지 않는단 말인가. 어쨌든 살아야 하지 않는가. 오랜 시간이 흐르다보니, 점령자와 피점령자는 하나로 되고, 중요한 순간에 풍우동주(風雨同舟)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를 비난할 수 없다. 하물며 한족인재는 여진족당국의 중용을 받았음에야.
마지막으로 우리는 서하인들이 어떻게 한인을 중용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이원호가 즉위한 후, 그의 정부는 한인, 당항인이 통치했다. 번학과 한학을 나누어 설치하고 인재를 배양했다. 동시에, 그는 한인으로 구성된 두뇌집단을 만든다. 그들은 장척, 장항, 양곽, 서민종, 장문현, 장원, 오호등이다. 특히 장원과 오호는 오랫동안 과거시험을 보았지만 급제하지 못했던 사람이다. 그들은 서하로 도망쳤고, 이원호는 이들을 꺼리지도 막지도 않고 두 사람을 군사로 초빙한다. 장,오 두 사람은 서생이지만 중국역사와 군사전략을 잘 알았다. 그들은 이원호에게 관우(關右)의 땅으로 진격하여 관중(關中)을 점령하고 중원의 요지로 진격할 것을 건의한다. 1041년, 이원호는 장, 오 두 사람의 전략을 받아들여, 송,서하 쌍방은 결전을 벌인다. 이번 전쟁에서 송나라군대는 임복등 여러 대장을 잃고, 병사들은 7만여명이나 사상한다. 서하군이 대승을 거둔다.
여기에서 언급한 몇몇 한인은 송나라의 대명이 자자한 문관, 무신들과 비교하자면 차이가 많다. 그러나 이들은 이국황실의 중용을 받았고, 큰 공을 세운다. 송나라의 문신 무장들은 이런 기회가 없었다. 그들은 시기당하고, 배척당하고 부패되었다. 그리고 낙엽처럼 몰락하는 송황실과 더불어 땅바닥에 떨어진다.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송나라 전체 3백여년간 계속 북방4국에 패배한 것은 바로 이것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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