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우연강(寒雨連江)
중국의 성씨는 오천년문명과 연결되어 있다. 혈연문화의 형식으로 중화민족의 형성을 기록하고있다. 이는 혈연을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유대이며, 독특한 문화현상이고, 인류문명의 보물이다. 현대인류학, 사회학, 역사학연구의 중요한 도구중 하나이다.
성과 씨는 원래 두 개의 서로 다른 개념이었다. 성은 원시부락부호로, 일반적으로 부락소재지의 이름, 부근산천, 하류등으로 명명했다. 성의 최초기원은 모계사횡서 부계사회로 바뀌어가는 과도기였다. 그러므로, 최초의 성은 '여(女)'자를 옆에 붙이거나 아래에 붙였다. 황제의 성은 희(姬)이고, 염제의 성은 강(姜)이다. 씨는 부락이 확장하여 일정한 규모가 되면서 내부에서 씨족이 출현한 후, 씨족이 보유한 부호이다. 일반적으로 지명, 직업, 관직등에서 땄다.
상주(商周)시기가 되며, 부락과 씨족은 점점 소렴되고, 성은 왕공귀족가족의 전체적이 부호가 되고, 씨는 가족내부 분지(分支)의 부호가 된다. 성과 씨는 합쳐서쓰이면서 어떤 사람이 어느 가족, 어느 가족의 어느 분지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다. 즉, 성은 대종(大宗)이고, 씨는 소종(小宗)이다. 나중에 이름이 등장한다. 성 혹은 씨를 이름과 연이어 쓰면서 그 사람을 명확히 구별하게 된다.
성과 씨를 하나로 합쳐서 쓰게 된 것은 한나라때부터이다. 지금 중국인(한국인, 북한인과 월남인 포함)의 성은 대부분 수천년간 대대로 전해내려온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가성'이외에 약 4천여개의 자주 볼 수 없는 성씨, 그리고 2만개의 벽성씨(僻姓氏)가 있다. 이들 성씨는 각각 고성씨, 출생지명, 거주지명, 고국명, 제후귀족의 봉지명, 관직명, 직업명, 조상의 이름, 신화전설, 어떤 사유로 성을 고친 경우, 소수민족 성씨 및 천자의 사성(賜姓)등이다,
이들 성씨중에서 왕씨는 제2대성씨이다. 한족인구의 약 7.4%를 차지한다. 왕씨중 어떤 사람은 상주때 비간의 후손이고, 어떤 사람은 희성에서 전화되었고, 주천자으 비적계후손이다. 다만 대부분은 역대제왕의 후예 및 노비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왕자(王子)', "왕손(王孫)'과 '왕가(王家)의 사람'이라고 불리웠다. 그러다가 점점 '왕'을 성씨로 삼게 된다. 일부는 귀화한 소수민족이다. 예를 들어 금나라의 완안씨는 성을 왕으로 바꾸었다. 어떤 몽골족 공안국장의 이름은 오연 파아이(烏延 巴雅爾)인데, 한성은 '왕'으로 '왕립군'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한때 신문을 도배했었다. 말이 나온 김에 말하자면, 이 '오연'은 바로 금나라의 '완안'일 것이다. 왜냐하면 몽골이 금을 멸한 후, 일부 여진인은 몽골족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성씨를 연구하는 것은 아주 재미있다.
현재의 성씨연구에 따르면, 왕씨는 아래의 몇 갈래 큰 분지(分支)가 있다:
1. 북해왕씨(北海王氏)
이 갈래의 왕씨는 요(姚) 성엣 나왔다. 즉 순임금의 후손이다. 최초에 북해, 진류 일대에 거주했다. 이 지역의 규(嬀), 진(陳), 전(田)성과 일가였다. 기원전 368년, 전성이 강성을 대체하여 제(齊)나라의 군주가 된다. 역사에서는 이를 "전씨대제(田氏代齊)라고 한다. 8대를 내려간 후, 진나라에 의하여 멸망한다. 자손은 서인으로 된다. 그중 한 갈래는 자신들이 제나라의 왕족이었다는 이유로 '왕'을 성으로 사는다. 이 왕성은 양진(서진,동진), 남북조시대에 여러 인재를 배출한다. 그중 밀현에 거주한 왕려(王閭) 가족은 여러대에 걸쳐 모여살면서 공동으로 부를 창조했고, 가족구성원이 백명이 넘어간다. 가족은 고귀해지고 화목하여 동네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그리하여 정부의 포상을 받아, "천하저명의문(天下著名義門)"이라 불린다.
2. 원성왕씨(元城王氏)
이 왕성은 "규(嬀)"성에서 나왔다. 역시 순임금의 후손이다. 진나라가 제나라를 멸망시킨 후, 제왕실의 전씨후손은 뿔뿔이 흩어진다. 서한초기, 전안(田安)의 한 갈래가 평릉(平陵, 지금의 산동성 동평)으로 간다. 나중에 전안의 4대손 왕하(王賀)가 화를 피해 위나라의 수도인 원성 위속리(委粟里)(하북성 대명현 동쪽)으로 간다. 이 갈래가 원성왕씨이다. 왕하의 손녀인 왕정군(王政君)은 18세때 궁에 들어간다. 우연한 기회에 태자의 곁으로 가고, 얼마후 아들을 낳는다. 아들의 이름은 유오(劉鰲)이다. 3년후 한선제가 죽고, 유오가 태자가 되며, 왕정군은 황후가 된다. 부친 왕금은 양평후로 봉해진다. 왕금이 죽은 후, 왕정군의 오빠인 왕봉이 작위를 승계하고, 원성왕씨는 이때부터 이름을 떨친다. 왕정군의 조카는 그 이름도 유명한 왕망이다. 그는 서한정권을 찬탈하여 "신"왕조를 건립했다. 15년후, 농민의 난으로 와해되고, 유수가 동한을 건립한다. 원성왕씨는 과거의 지위와 영광을 잃게 된다.
서한 원제, 성제부터 동한건국전까지, 원성왕씨는 천하제일망족(天下第一望族)이었다. 권세와 지위는 서한황실보다 더 했다.
3. 경조왕씨(京兆王氏)
이 갈래의 왕씨는 원래 희(姬) 성이다. 주나라 천자의 후손이다. 시조는 전국시대 위공자 무기이다.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킨 후, 그의 자손은 태산으로 도망친다. 그때부터 '왕'을 성으로 삼았다. 그리고 패릉(섬서성 서안의 동북쪽)으로 옮겨가는데, 이 곳은 경조윤에 속했다. 나중에 경조왕씨라 칭해진다. 이 갈래의 왕씨도 인재를 배출했다. 당나라때만도 18명이 진사가 되었고, 30여명이 지방장관이상의 관직을 지냈다. 당나라가 망하면서 이 왕씨는 점차 소리없이 사라진다.
4. 태원왕씨(太原王氏)
이 갈래의 왕씨는 주령왕의 태자 진공(晋公)의 후손이다. 민국시대 왕사괴당각본 <여요상당왕씨종보>의 기록에 따르면, "태원왕씨는 시조가 태자 진이다. 즉 주령왕의 태자이다. 이름은 진(晋)이고, 자는 자교(子喬)이다. 기원전 565년경에 태어났고, 기원전 59년에 사망했으며 원래 성이 '희'이다.
태자진은 15세때 태자의 신분으로 보정한다. 태자진의 아들 종경은 관직이 사도에 이르고 주나라왕실이 쇠약해지고 천하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목격한다. 그는 사직하고 태원에 칩거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왕가(王家)'라고 불렀고, 나중에는 왕을 성으로 삼는다.
태원왕시의 후예는 중원각지로 흩어진다. 역시 인재도 많이 배출한다. 왕종경의 후손인 왕전은 일찌기 연나라를 정벌하고,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백월을 정복하는 등 전공이 혁혁했다. 왕전의 아들 왕분도 진나라의 장군이고 일찌기 초군을 무찌르고 위나라를 평정하고 요동을 정벌하는 등 전공을 많이 세운다.
왕분의 아들 왕리이다. 진이세는 몽염의 병권을 빼앗은 후 왕리를 대장군에 임명한다. 왕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왕원, 차남은 왕위이다. 진나라말기, 왕원은 전란을 피해 산동 낭야로 옮겨간다. 그는 낭야왕씨의 시조가 된다. 왕위는 여전히 진양에 거주하고 서한때 양주자사가 된다. 나중에 그의 자손은 각지에 흩어져 거주한다.
5. 진양왕씨(晋陽王氏)
이 갈래의 왕씨는 태원왕씨의 한 갈래이다. 왕위의 구대손 왕패는 동한때 태어나서 여러번 관직을 받았으나 취임하지 않고, 은거하여 글을 읽는다. 왕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왕은이고 동한때 중산태수를 지낸다. 그리고 기현을 식읍으로 받아서 그의 후손을 기현왕씨라 부른다. 차남 왕함은 부친을 따라 진양에 은거하여 그의 후손은 진양왕씨라 부른다.
왕은의 4대손 왕술은 세 아들을 낳는데, 각각 욍괴, 왕무와 왕윤이다. 한헌제때, 동탁이 권력을 찬탈하고 정치가 혼란스러워졌을 때 왕윤과 여포가 동탁을 주살한다. 왕무는 동한의 시중이고, 유주자사이다. 그의 6세손 왕광은 북위의 병주자사이다. 앙광의 아들 왕경은 북위의 호오환교위이다. 그의 후손은 오환왕씨라 불린다.
후한의 왕유, 왕택 형제는 왕패의 차남 왕함의 후손이다. 삼국시대의에 사공 왕창이 있고, 서진에는 사도 왕혼이 있으며, 동진에는 상서 왕탄지, 대장군 왕공등 저명한 정치가가 있다. 그리고 양진의 3명의 황후의 모족이다. 왕유,왕택부터 시작하여, 8대손은 동진의 대장군 왕공자, 왕간, 왕담형등이 있다.
진양왕씨는 동진말기에 연속 3차례 난을 맞이한다. 첫째는 재상 사마도자때문에 부상 왕국보 및 종조제 낭야내사 왕서가 피살된다. 둘째는 전장군 왕공이 거병하여 청군측을 하려다 실패하여, 그와 다섯 아들 및 동생 왕상, 왕상형의 아들 왕화와 동시에 피살된다; 셋째, 송무제가 반대파를 제거하면서, 강주자사 왕유 및 그의 자손 10여명이 전부 피살된다. 연이은 재난은 왕씨의 원기를 크게 상하게 만든다. 이때부터 명성을 잃게 된다. 남북조때부터 수당까지 자칭 진양왕씨라는 사람들이 세상에 나타났다. 그러나 자세히 연구해보면 이 일맥과는 관계가 없다.
6. 삼괴왕씨(三槐王氏)
이 갈래의 왕씨도 태원왕씨의 한 갈래이다. 태원왕씨의 후예 왕언은 처음에 산동 대명부 신현에 거주했다. 당나라말기 여양현령을 맡았다. 왕언의 아들 왕철은 오대우 당나라 동광원년(923년) 진시1등으로 합격하여 장원이 된다. 관직이 좌습유에 이른다. 이때부터, 대명신현왕씨는 날로 흥성한다.
왕철의 아들 왕호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했고, 젊어서 위현,남락 두 현의 현령을 지낸다. 송나라에 들어, 말년에 병부시랑에 이른다.
주나라때 궁정이 밖에는 괴목(홰나무) 3그루, 형극(가시나무) 9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백관이 천자를 만날 때, 삼공은 괴수를 향하여 서고, 구경은 형극을 마주하고 섰다. 후세에 삼괴는 상공과 같은 등급이 관직을 가리키고, 구극은 구경백관을 가리키게 된다. 왕호는 친히 정원에 세 그루의 괴수를 심는다. 그는 자손들이 삼괴의 뜻에 따라 상공류의 관직에 오르기를 희망한 것이다. 나중에 차남 왕단이 과연 재상에 오른다. 송인종때, 손자 왕소가 다시 공부상서에 오른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갈래의 왕씨를 '삼괴왕씨'로 부르게 된다. 사당은 삼괴당으로 명명한다.
7. 동해왕씨(東海王氏)
이 갈래 왕씨는 한나라때 회계태수 왕랑에게서 유래한다. 대대로 동해현 담현(산동 담성현 성북)에 거주했다. 왕랑은 한헌제의 인정을 받아, 회계태수에 임명된다. 당시 천하는 대란에 빠져, 왕랑은 먼저 손책에 의탁했다가 나중에 조조에 투항한다. 관직은 사도에 이른다. 조위때 사마의가 정권을 잡은 후, 아들 왕숙이 사마씨의 편에 선다. 그리하여 조상과 반대편이 된다. 그리고 딸을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의 처로 보낸다. 사마소의 장남 사마염이 위나라를 대체하여 진왕조를 건립하니 그가 진무제이다. 왕원희(王元姬)는 황ㅎ가 된다.
동진,유송,소제때, 이 왕씨는 대대로 관직에 있고, 남북조이후에는 점차 쇠락한다.
8. 낭야왕씨(瑯琊王氏)
이 갈래의 왕씨의 시조는 한나라때의 왕원이다. 전란을 피해, 낭야 호우성(산동성 즉묵)으로 이주했다. 4대손 왕길은 관직이 동한의 간의대부에 이른다. 낭야왕씨의 흥성의 물꼬를 튼다. 동진에 이르러 자손 왕도, 왕돈은 건국의 공으로 황제에 의하여 요직에 임명된다. 왕씨의 지위는 더욱 혁혁해진다. 즉 이 일대에 왕씨는 남쪽으로 이주하여 금릉으로 간다. 이 왕씨는 이때부터 강남의 망족이 된다. 사안(謝安)의 가족과 더불어 "오의항세가(烏衣巷世家)"라 나란히 칭해진다. 싯구 "구시왕사당전연(舊時王謝堂前燕), 비입심상백성가(飛入尋常百姓家)"에 나오는 왕씨성이 바로 이 낭야왕씨이다. 진성제때, 사마가는 왕씨의 위신이 높아 공고개주(功高蓋主)할 것을 우려하여, 왕씨의 권력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남북조때, 왕도의 6세손이 북위에 투항한다. 북위가 동위,서위로 분열된 후, 이 갈래 왕씨는 정치와 사회적 지위가 점차 쇠락한다.
9. 개민왕씨(開閩王氏)
이 갈래 왕씨는 낭야왕씨의 갈래이다. 진나라장수 왕전의 34대손이다. 역대이래로 문무인재가 많았다.
당나라가 망한 후, 후량태조 주온은 왕심지(王審知)를 민왕에 봉하고, 중서령의 관직을 내린다. 후당이 후량을 멸망시킨 후, 왕심지는 민의 땅을 잘 다스려 부유하게 하여 민중왕정권은 30년동안 유지된다. 나중에 왕심지의 셋째아들 왕연균이 정식으로 황제를 칭한다. 그리고 나라를 세우니 '민(閩)'이라 한다. 얼마후, 왕연균의 아들인 왕계붕이 부친을 죽이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945년, 민국은 남당에 멸망당한다. 조광윤이 칭제한 후, 북송을 세우자, 왕심지의 덕정을 존경하던 그는 어필로 친히 "팔민인조(八閩人祖)"라는 네 글자를 써준다.
왕씨의 유래는 여러갈래이다. 아주 복잡한 성씨이다. 각 망족들간에도 관계가 서로 얽혀 있다. 그리하여 아주 복잡한 상호관계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태원왕씨는 여러 저명한 왕씨파벌의 근원이니, 명문대족이라 할 만하다.
왕씨가 제2대성으로 성장한 것은 먼저 최초의 인구수가 컸고, 다음으로, 역대명문망족이 많았고, 대대로 번성했으며 눈덩이가 구르는 것같은 기세였기 때문이다. 성씨의 진화법칙으로 보면 대성의 사람수는 갈수록 많아지도 소성의 사람수는 갈수록 작아져서 나중에 결국 멸망한다.
왕씨가 중화제2대성이 된 것은 고금에 걸쳐 인재를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진나라에는 군사가 왕전이 있고, 서한에는 정치가 왕망이 있으며, 동한에는 사상가 왕충이 있고, 진나라에는 서예가 왕희지가 있다. 당나라에는 시인 왕발, 왕유가 있고, 송나라에는 개혁가 왕안석이 있으며, 원나라에는 예술가 왕실보가 있다. 명나라에는 철학가 왕수인이 있고, 청나라에도 철학가 왕부지가 있다. 근대에도 학자 왕국유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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