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장평공주(長平公主) 생사의 수수께끼

중은우시 2008. 12. 21. 23:48

글: 하억(何憶)

 

가련여화사옥녀(可憐如花似玉女)

생어말세제왕가(生於末世帝王家)

국파가망봉연기(國破家亡烽煙起)

표령윤락몽천애(飄零淪落夢天涯)

 

가련하구나,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말세에 황제의 딸로 태어났구나.

나라와 집안이 다 망하고 전쟁의 불꽃이 이는데

이러저리 흘러다니며 하늘 끝에 이른다.

 

이것은 김용의 소설 <<녹정기>>에 나오는 "백의협녀홍진불염, 신공개세낭적강호"의 비구니의 이미지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한쪽 팔만 가졌지만, 용모는 아름답고, 기질은 고귀한 독비신니(獨譬神尼)는 속세의 사람들과는 달랐다고 한다. 그녀는 바로 대명 숭정황제의 공주인 장평(長平)이었다. 다만, 금지옥엽의 공주전하와 강호를 떠도는 비구니와 어떻게 관계될 수 있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은 숭정17년 삼월 십칠일의 북경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날은 북경성이 짙은 구름에 휩싸여 있었다. 틈왕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성을 철통처럼 포위하였기 때문이다. 큰 난리가 나던해에 구오지존의 숭정황제는 어쩔 수 없이 용상에서 내려와야 하는 비탄에 잠겨 있었다. 비록 그는 이미 산해총병 오삼계로 하여금 북경으로 와서 보호하도록 명하였지만, 이때의 상황으로 봐서는 먼 곳에 있는 물로 가까운 목마름을 해소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이자성의 대군은 이미 공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북경성을 수비하는 병사들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 보였다.

 

저녁때쯤, 이자성은 군대를 이끌고 공성을 시작한다. 숭정제를 가슴아프게 한 것은 북경성을 지키던 환관들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창의문을 열고 투항했다는 것이다. 숭정제가 이 소식을 듣고는 마치 벼락을 맞은 것같았다. 외성이 무너지면, 북경성은 더 이상 지키기 어려웠다. 숭정제는 태감 왕승은을 데리고 황성의 높은 곳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봤다. 보이는 것은 솟아오르는 불기둥과 죽여라고 소리치는 것뿐이었다. 보기에 내성이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다시 궁중으로 되돌아온다. 주황후를 보고는 한숨을 쉬며 말한다: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눈물을 흘렸다.

 

숭정제와 주황후는 겨우겨우 지탱하며 세 아들을 불렀다. 영왕(永王)과 정왕(定王)의 두 황자는 평민으로 분장시켜, 자금성을 빠져나가게 하였다. 주황후는 그의 곁에는 묵묵히 눈물만 흘렸고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태자까지 보낸 후에 그녀는 비로소 숭정에게 절을 하면서 말했다: "제가 폐하를 모신지 십여년입니다. 한번도 내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으니, 지금도 할 말은 없습니다. 나는 오직 죽음으로 나라와 황상에 보답하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그녀는 일어서서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 궁녀들이 와서 황후는 이미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알려주었따. 숭정제는 그 말을 듣고,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좋다. 좋아. 잘 죽었다."라고 말하였다. 숭정제에게는 모두 딸이 여섯 있었다. 그중 넷은 요절하고 두 딸만 남아 있었다. 즉, 장평공주와 소인공주(昭仁公主)였다. 장평공주는 수녕궁에 거주하고 있었다. 숭정이 가장 아기는 딸이었으며, 나이 16살이었다. "장평"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평안하게 살아라는 뜻이었다. 이 두 글자에 부친의 딸에 대한 사랑과 희망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원래 주현(周顯)을 사위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제 물거품이 되었다. 장평공주는 그대로 미혼부(未婚夫)인 주현과 만나기를 기대했다. 숭정은 딸이 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자살하기 전에 수녕궁으로 뛰어 들어갔다. 장평공주는 옷을 끌며 울고 있었다. 숭정제는 "네가 왜 우리 집에 태어났단 말이냐?"라고 하고는 숭정제도 통곡을 했다. 그리고 칼을 휘둘러서, 장평공주의 왼팔이 잘려나갔다. 장평공주는 혼절한다. 이미 정신을 잃은 숭정제는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다시는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

 

이어, 숭정제는 소인궁으로 들어가서, 이곳에 있던 삼공주를 죽인다. 삼공주가 죽은 후에 청나라조정은 그의 거소를 따라 이름을 지어서 그녀를 소인공주로 죽은 후에 봉해준다. 그후, 숭정제는 다시 원귀비에게로 간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진하라고 명한다. 원귀비는 명을 받들어 자진하고자 하나, 생각도 못하게 밧줄이 끊어져 버린다. 숭정제는 그 모습을 보고 수중의 검을 휘둘러 원귀비의 왼쪽어깨를 자른다. 밤에 숭정제는 태감을 데리고 궁문을 나선다. 도망치려고 한 것이다. 그들은 동화문을 나서, 조양문으로 가고 다시 안정문으로 갔다...성내를 한바퀴 돌았다. 그러나 모두 이자성의 농민군에게 막혀 되돌아 왔다. 도망가는 것이 불가능하니 다시 궁중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25일 새벽, 숭정제는 종루에 오른다. 종을 쳐서 백관을 모으는데,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다. 모든 것을 포기한 숭정제는 할 수 없이 환관 왕승은과 함께 뒷쪽의 만세산(지금의 경산)에 올라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다. 죽기 전에 유언을 남긴다: "짐이 멍청하고 모자라는 군주가 아니라, 여러 신하들이 나라를 망쳐서 강산을 잃은 것이다. 짐은 조상을 지하에서 볼 면목이 없어, 감히 정침에서 죽지 못한다. 적이 오면, 짐의 시신을 훼손할 지언정 백성은 상하지 말라. 오늘의 망국은 하늘의 뜻이지, 짐의 죄가 아니다. 17년간 처참하게 경영해왔고, 항상 중흥을 생각했는데, 대명의 기가 다하여, 하는 일마다 어긋나서, 만회할 수 없었다. 17년의 중흥의 바램이 그저 남가일몽이 되었도다!"

 

그 며칠동안 자금성내는 엉망진창이 되어, 아무도 장평공주의 "시신"에 신경쓰지 않았다. 장평공주는 상처는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다시 살아났다. 그리하여 장평공주의 운명은 소설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장평공주는 죽지 않고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민간전설과 무협소설에서 아주 유행한 것이다. 대체적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한 무공이 뛰어난 독비신니가 있는데, 바로 명나라 숭정제의 적출인 장평공주라는 것이다, 나라와 집안이 망한 후, 부친에 한 팔을 잘리고, 민간에 흘러들어왔다는 것이다. 깊은 원한을 품은 공주는 일신에 무공을 연마하여, 부모의 한을 풀겠다고 맹서한다. 사람들은 독비신니구난(九難)이라고 말한다. 전설에 따르면, 독비신니구난은 8명의 천하무적의 제자를 받아들이는데, 그 중에 여사랑(呂四娘)이 있다는 것이다. 여사랑은 독비신니구난의 마지막 제자이다. 나중에 궁중에 숨어들어가서 옹정제를 암살하여, 사부를 위하여 집안과 나라의 원수를 갚는다는 내용이다. 이 여덟명의 뛰어난 제자는 "청초팔대협(淸初八大俠)"이라고 하여 천하에 이름을 날린다. 이것이 한가지 설이다.

 

이외에 월극(劇)의 경전적인 작품인 <<제녀화(帝女花)>>에서도 장평공주의 이야기를 한다. 여기에서 그녀는 명나라가 멸망한 후,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는데, 나중에 청나라조정에서 찾아내고, 그녀와 부마가 결혼하게 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편안히 묻히고, 동생들이 감옥에서 석방되게 하기 위하여, 그녀는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동방화촉의 밤에 장평공주와 부마 주세현은 비상을 먹고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한다. 이 이야기는 듣기에는 낭만적이지만 그저 전설일 뿐이다. 그렇다면, 진실한 역사는 어떠했을까?

 

역사적 사실은 이렇다. 장평공주는 나중에 사람들에게 발견된다. 그리하여 주황후의 부친인 주규(周奎)의 집으로 보내어진다. 5일후에야 그녀는 비로소 깨어난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북경성은 이미 대순(大順) 이자성의 천하였다. 주규는 감히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녀를 이자성에게 내놓는다. 이자성은 장평공주가 죽지 않고 되살아난 것을 보고는 아주 의외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녀를 유종민에게 넘겨서 처리하게 한다. 마침, "대순"은 북경성내에 2개월밖에 머물지 않았고, 대순의 역사적인 운명이 끝난다. 이자성이 장평공주를 데리고 갈 시간적 여유가 없이, 청나라군대에 패배하고 도망치게 된다.

 

도르곤이 청나라군대를 데리고 산해관을 들어온 후, 인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명을 내려, 오월 초육일부터 초팔일까지 숭정제를 위하여 3일간 장례를 치르고, 시호를 회종단황제(懷宗端皇帝)로 내린다. 나중에 다시 장열민황제(莊烈愍皇帝)로 한다. 그리고 그와 주황후를 관에서 꺼내어, 다시 황제의 예우로 매장해준다. 장지는 창평 명나라 황릉구역인 은천산 전귀비의 능침내였다. 능의 이름을 사릉(思陵)으로 고친다. 일후일비(一后一妃)가 저세상에서 숭정제와 함께 한 것이다.

 

방평공주는 나라와 집안은 망했지만, 그래도 약간의 안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 산 것은 숭정제의 원귀비였다. 원귀비도 중상은 입었지만, 마지막에는 장평공주처럼 되살아났다.

 

청나라 순치2년, 장평공주는 순치제와 섭정왕 도르곤에게 글을 올려,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어, 이 속세의 애상과 비통과 단절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명나라의 장공주이므로, 한족들의 마음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녀의 이러한 바램을 청나라조정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장평공주가 글을 올린지 얼마되지 않아, 순치제의 조서가 내려온다. 공주의 출가를 허용하지 않으며, 숭정제가 그녀를 위하여 골라놓은 부마 주현과 결혼을 하도록 명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집, 금은, 차마, 전답을 내린다. 그러나, 몇개월만에 장평공주는 병으로 죽는다. 이때가 순치3년이다. 장평공주의 나이 겨우 18살이었다. 그녀는 광녕궁의 바깥에 묻힌다.

 

장정옥의 <<명사. 공주전>>의 기록에 따르면, "장평공주의 나이 16살 때, 황제는 주현을 골라서 결혼시키려고 한다. 결혼을 시키고자 하는데 대란이 일어나 잠시 멈춘다. 북경성이 함락되고 황제는 수녕궁으로 들어간다. 공주는 황제의 옷을 잡아끌며 통곡한다. 황제는 "네가 어찌 나의 집에 태어났느냐?"고 하면서 검을 휘둘러 왼팔을 자른다. 그리고 소인공주를 소인전에서 칼로 죽인다. 오일이 지나, 장평공주는 되살아난다. 대청 순치2년 상소를 올려,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겠다고 하나. 조서를 내려 허가하지 않고, 주현과 결혼하도록 한다. 전답 저택과 금은 차마를 내린다. 공주는 눈물을 흘렸다. 해가 지나 병으로 죽는다. 광녕궁의 바깥에 묻어주도록 한다" 이 내용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외에 <<명사. 유적전>>의 기록에 따르면, "장평공주는 죽었다가 되살아난다. 이자성은 유종민에 명하여 치료해주게 한다" 기본적으로 위의 내용을 확인해주고 있다.

 

장평공주의 짧은 일생을 생각해보면, 풍운이 만변하는 경우를 겪었고, 세 개의 특수한 왕조, 명, 대순, 만청을 겪었다. 아마도 그녀는정말 출가하여 청등고불을 벗하면서 청의황권으로 평생을 마쳤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녀는 일생동안 북경성을 한 걸음도 나가보지 못하고 우울하게 죽었는지도 모른다. 운명의 장난인지, 그저 황제집안에 태어난 것을 탓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