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명희종(明熹宗): 명나라의 목수황제

중은우시 2008. 10. 31. 18:33

 

 

 

글: 주가웅(朱家雄)

 

만력제(萬歷帝)이후 황제의 자리를 승계한 명광종(明光宗) 주상락(朱常洛)은 원래 일대명군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궁중음모 "붉은환약사건(紅丸案)"으로 죽어버린다. 다시 황제위를 이는 사람이 바로 소위 목수황제(木匠皇帝) 명희종이었다. 명희종 천계제(天啓帝) 주유교(朱由校)를 목수황제로 부르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가 소양이 없고, 나라를 다스릴 줄 모르고, 그저 목수일을 좋아하면서 목수로서의 기술이 좋았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후의 청나라통치자들이 다른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그를 멸시하기 위하여 별명을 그렇게 붙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청나라통치자들이 이렇게 한 목적은 명나라황제를 폄하함으로써 청나라황제의 영명함을 드높이기 위한 것이었다.(청나라의 황제는 명나라뿐아니라 다른 왕조의 황제들까지도 그들의 약점과 특징을 골라서 폄하하는 방식으로 하나하나 별명을 덧붙였고, 모두 좋은 별명은 아니었다)

 

명희종이 목수일을 좋아한 것은 그가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의 문맹에 가까운 그가 매일 술에 절어살거나, 황음무도하지 않았으니, 그것만해도 불행중 다행이라고 할 것이다. 당당한 한나라의 군주로서, 명희종은 왜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하였는가? 그 원인을 따져보면, 만력황제의 편애를 꼽아야 할 것이다. 당초 만력제는 주상순(朱常洵)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은 "후계자는 적자중에서 나이많은 자로 하여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조정신하들이 반대함에 따라, 쌍방은 오랫동안 대치했다. 황제와 대신은 모두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었다. 나중에 만력제가 타협하여, 황장자 주상락을 태자로 세운다.

 

다만, 만력제는 주상락에 대하여 여러해동안 불문불문(不聞不問, 묻지도 듣지도 않다)의 태도를 취한다. 주상락의 아들인 주유교까지 만력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리하여 주유교의 교육문제를 소홀히 하게 된다. 16살까지, 그는 당연히 받았어야할 황실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자란다. 1620년, 만력제가 붕어할 때, 주유교는 비로소 황태손에 봉해지고, 비로소 정식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지 못한 것이 부친인 주상락이 황제가 된지 1개월만에 죽고 만다. 아직 태자로 정식 책봉받지도 못한 16살의 주유교는 이렇게 총망중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비록 이때의 주유교가 박학한 내각대신들로부터 강학을 들을 수는 있었지만, 어쨌든 일찌감치 초급교육을 받을 황금연령을 넘긴 상태이고, 다른 정사(政事)만으로도 충분히 골치가 아팠으며, 그는 그냥 놀고싶은 마음 뿐이었다.

 

비록 하늘앞에 누구나 평등하다고 하지만, 사람들의 천성이나 재능은 서로 다르고 차이가 크다. 주유교는 천성적으로 손재주가 뛰어났다. 그래서 그는 재능을 모두 목수일에서 발휘하게 된다. 명말의 가구는 아주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돈있는 사람들은 고급가구를 사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로써 추정해보면, 아마도 당시에 목수일을 잘하는 민간예술가(자기장인포함)들은 개략 지금의 IT엘리트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엘리트였다. 젊은이들은 모두 유행을 따라가기를 좋아하는 법이다. 이리하여, 주유교가 목수일에 심취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전혀 교육을 받지 않고 황제가 되다보니, 주유교 자신은 물론이고, 대명황조에 있어서도 이것은 하나의 비극이다. 다만 중국의 기나긴 봉건황제제도가 해체되기 전에(혹은 황제에게 실권이 없는 군주입헌제를 시행하기 전에), 이것은 절대 바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전제하에서, 명나라의 조화는 조정대신의 지혜와 황제 주변의 사람들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다면, 명나라는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이고, 운이 나쁘면, 명나라는 망하는 것이 뻔한 일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주유교가 중시한 것은 본명이 이진충(李進忠)인 위충현(魏忠賢)이었다. 위충현의 사람됨에 대하여는 역사상 일찌감치 결론이 났으므로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 상세히 논하지는 않겠다. 강조하고 싶은 점은 위충현은 명나라의 패망에 대하여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근원을 따져보면, 뿌리는 역시 문맹에 가깝고, 국사에 아무런 흥미가 없는 명희종에게 있다. 그러나 누가 그에게 이런 교육을 받지 못하게 하였는가? 이렇게 얘기하자면, 뿌리는 다시 만력제에게 거슬러 올라간다. 후세사가들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명나라의 멸망은 실제로 만력이 망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소위 목수황제 주유교라고 하여 모두 잘못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주유교는 자기의 황후인 장언(張)과 사이가 아주 좋았다. 그녀에 대하여는 아주 존중해주었고, 그녀의 말이라면 잘 들었다. 위충현이 여러번 장언을 모함하고자 하였으나, 주유교는 태도는 아주 확실했다. 그리고 그는 동생인 주유검(숭정제)의 교육문제에 대하여 전혀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데 대하여 유감으로 생각했는지, 그가 황제가 된 후 자기보다 5살어린 동생의 교육은 아주 신경을 써주었고, 나중에 황위를 그 동생에게 물려주게 된다. 아마도 주유교가 황후와 동생에 대하여 시종일관하게 취한 보호와 신임때문에, 대명황조는 그의 손에서 일찌감치 끝장나지 않았고, 이후 17년이나 지속된 후에 무너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