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이정기(李廷機) : 사직서를 123번 올린 명나라 재상

중은우시 2008. 9. 3. 12:28

글: 수은하(水銀河)

 

재상이 물러나는 것은 대체로 두 가지 경우이다: 사직과 면직. 다만, 명나라 중기에 한 재상은 황제에 의하여 삭탈관직되지도 않고, 사직서를 내서 접수되지도 않았으며, 아주 특수한 방식으로 물러났다. 그는 바로 역사상 사직서를 가장 많이 올린 것으로 이름난 재상 "이정기"이다.

 

명나라에서 가장 대하기 쉬웠던 황제가 명목종 융경제(隆慶帝)라고 한다면, 가장 대하기 어려웠던 황제는 그의 아들인 명신종 만력제(萬歷帝)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살인을 밥먹듯이 하든 주원장(명태조)이나 주체(영락제)보다 더욱 무서운 무기가 있었다 - 게으름(懶), 만력14년(1586년) 구월 십육일부터 이 황제는 보이코트를 시작했다. 30여년을 하루같이 손바닥만한 자금성 안에서 동면했다. 그 동안 대신들이 어떻게 요청하고, 욕을 하고, 원망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더라도, 만력제는 찍어도 찌그러지지 않고, 쪄도 흐트러지지 않고, 삶아도 끄덕없는 구리로 만든 콩처럼 조회에 나가지도 않고, 대신을 만나지도 않고, 일처리를 하지도 않았다. 관리들은 어쨌든 신하이다. 아무리 간이 크다고 하더ㅏ도, 후궁으로 뛰어들어가서 황제어르신을 끌고나와서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명나라때에는 만력제가 신하들에게는 가장 골치아픈 황제였다. 황제의 임무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인데, 그가 일을 하지 않으니, 국가는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다. 만력제가 통치한 명나라는 하루 하루가 다르게 상황이 나빠졌다. 가장 분명한 상황은 "사람이 적체되고, 자리는 비어있게" 된 것이다. 즉, 관리의 임면이 마비된 것이다. 승진해야 할 사람이 승진하지 못하고, 은퇴해야 할 사람이 은퇴하지 못했고, 보충해야 할 자리를 보충하지 못했다. 만력47년이 되어서, 중앙의 9부중에서 호부(戶部)와 통정사(通政司)에만 책임자가 있었다. 형부와 공부는 다른 부서에서 대리하여 처리했다. 이부, 예부와 병부는 도장만 있고 사람은 없었다. 독찰원과 대리사는 가장 심했다. 사람이 없을 뿐아니라, 도장도 잃어버렸다.

 

이 글의 주인공인 이정기는 바로 이런 상황하에서 나타난다. 이정기의 자는 이장(爾張)이고, 호는 구아(九我)였다. 진강(晋江) 신문외부교(지금의 이성구) 사람이었다. 가정21년(1542년)에 태어난다. 그는 어려서부터 근면하고 공부를 좋아했다. 만력11년에는 과거에서 방안(2등)으로 합격한다. 사실 그의 재주라면 장원도 느끈했으나, 운이 좋지 않았다. 당시의 명나라 재상은 가장 엉터리였던 신시행(申時行)이었는데, 그는 태의원의 주국조에게 잘보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리하여 장원의 자리를 그에게 양보했다. 그러다보니 이정기는 불만에 가득찰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정기는 인품도 나쁘지 않고, 사람됨도 청렴하여, 장원의 자리를 빼앗긴 것을 가지고 복수하지는 않았다. 그가 남경에서 관직에 있을 때, 각종 부패를 처결했고, 동시에 상업을 장려했다. 원래 해서(海瑞)가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던 상업을 다시 진흥시켰다. 절강회시를 책임지는 기간동안에 그는 과거분위기를 다잡았고, 엄격하게 폐단을 시정했으며, 국가를 위하여 제대로된 인재들을 뽑아올렸다. 중앙부처의 예부에 들어가자, 그는 각종 조치를 강구해서 관리의 복지를 개선했고, 부서에서 매년 남긴 돈으로 주택을 구입했다. 우수한 복지혜택으로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이다.

 

가장 대단한 일은 그가 당시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자선사업가라는 점이다. 구걸하는 사람만 보면 돈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나쁜 습관에 물든 거지들이 매일 그의 재상집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그가 문을 나서기만 하면 떼로 몰려가서 손을 뻗어 돈을 달라고 했다. 이외에 그는 북경의 공공시설에 특히 마음을 썼다. 시험장이 낡아서 재정에서 돈을 대었고, 관청이 허물어져도 재정에서 돈을 대어주었고, 절이 무너져도 재정에서 돈을 대주었다. 이정기의 씀씀이가 아마도 지나쳤나 보다. 그가 은퇴할 때가 되니 그에게는 재산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맨몸뚱이 뿐이었던 해서와도 맞먹을 정도였다.

 

아마도 그의 이러한 청렴결백에 게으름뱅이인 만력제가 감동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만력34년, 그는 재상으로 발탁된다. 내각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는 몰랐지만, 내각에 들어가보곤 깜짝 놀라서 자빠질 뻔했다. 중앙의 9부에 관직이 모두 31개가 있는데, 그 중에 24 자리가 비어있었다. 이건 그 아래의 자잘한 자리는 계산에 넣지도 않은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1사람몫의 월급을 가져가지만 일은 몇 사람 몫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욱 골치아픈 일은 전국각지에서 매일 수백수천의 상소문이 올라와서 만력제의 결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게으른 만력제는 아예 모려고 하지도 않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상소문을 베고 황궁안에서 잠을 잤다. 당시에는 유행하던 말 중에 "유중(留中)"이라는 것이 있다.

 

일이 어려운 것은 견딜만 하다. 그러나, 당시에 동림당(東林黨)이 이미 세력을 이루었는데, 그들은 힘을 모아서 이삼재(李三才), 곽정역(郭正域)의 두 사람을 재상에 앉히려고 하였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들 무리는 매일 상소문을 쓰고, 침을 튀겨서, 이정기는 거의 침으로 목욕할 정도가 되었다. 이정기는 만력제처럼 얼굴이 두텁지 못했다. 몇달간 욕을 먹으니 더 이상 재상짓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바로 사직서를 써서 올리고 떠날 준비를 했다. 그는 원래 황제가 아무리 게으르더라도 서너번 올리면 허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일찌감치 절차를 마무리짓기 위하여, 황제에게 자신의 결심이 얼마나 굳은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집은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버리고, 식구들은 모조리 짐을 싸들고 고향으로 내려보냈다. 그리고 혼자서 절에 살면서 사직서를 올렸다.

 

5장의 사직서가 올라갔는데도 만력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정기는 전혀 기죽지 않고, 다시 5부를 썼다. 만력제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이정기도 화가 났다. 계속 썼다. 그가 50장을 써도 사직을 받아주지 않을 거냐고 생각했다. 이렇게, 가련한 이정기는 낡은 절에서 꼬박 5년간 살면서 모두 123장의 사직서를 써서 올렸다. 그래도 결국 황제로부터 승인은 받지 못했다. 그저 '묘축각로(廟祝閣老)'라는 별명만 얻었을 뿐이다. 결국, 이정기는 스스로 붕괴되었다. 아예 스스로가 스스로를 파면해버린 것이다. 항명의 죄를 받을 각오를 하고, 머리가 잘릴 위험도 무릅쓰면서, 복건의 고향집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운이 좋았던 것은, 만력제는 그의 책임추궁하는 것도 귀찮아했다는 것이다. 갈테면 가라고 내버려 두었다. 4년후, 가난에 찌들어 이정기가 병사했다. 만력제도 이때는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그에게 '소보(少保)'의 직책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절(文節)"이라고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