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사회/중국의 민족

융(戎): 잊혀진 부족의 2천년 역사 (I)

중은우시 2008. 11. 27. 22:46

글: 당영요(唐榮堯)

 

1

 

기원전841년. 이 해는 중국 신사(信史)가 시작되는 해이다. 이 해부터 중국은 신사(信史)가 있고, 역사가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 중단되지 않았다. 동시에, 이 해부터, 주나라는 14년의 공화(共和)정치를 거쳐 이후 제왕정치의 원상을 회복했다.

 

주나라는 중국역사상 첫번째 신사시대의 왕조이다. 백양(柏楊) 선생의 <<중국역사연표>>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세기, 주왕조의 호경(鎬京, 지금의 섬서성 서안)이 만족(蠻族)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불태워지고 약탈당해서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낙양으로 천도한다. 권위가 다시 떨치지는 못한다." 당시 중국경내에서 가장 강대하고 권력이 가장 집중된 왕조를 천도하게 한 오랑캐 만족은 도대체 어느 민족인가?

 

백양선생은 흐릿하게 처리했다. 그리고 저명한 역사학자인 황인우(黃仁宇) 선생의 <<중국대역사>>에서도 유사한 곤혹을 드러내고 있다: "현존하는 자료는 우리로 하여금 주(周)민족의 연원을 확정할 수 없도록 한다. 그들이 남긴 짧은 전설은 다른 원시민족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신화와 환상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전설은 계속 농업을 언급하고 있다." 만일 주나라의 원시부족이 서북 황토고원상의 융(戎) 부족에서 나왔다면, 이 주장은 조금은 모호하고 다른 사람의 공박에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주를 멸망시킨 "만족"은 영하, 섬서, 감숙일대를 이천여년을 종횡무진 활약한 융(사람들이 쉽게 주목하지 않는 종족)이라고 하는 것에는 충분한 역사적인 증빙이 있다.

 

"그 당시 너는 아직 어렸다. 사람들마다 예쁘다고 했다. 현재 나는 특별히 너에게 얘기해주겠다. 나에게 있어서 너는 젊었을 때보다 더 예쁘다. 그때 너는 젊은 여인이었다. 너의 당시의 용모와 비교하면, 나는 너의 현재의 고난을 겪은 얼굴을 더욱 좋아한다" 마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의 첫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현재 4천여년전에 영하남부 육반산지역을 핵심으로 활약하던 고대의 부족인 융을 묘사하는데 아주 적합한 말이다.

 

2.

 

기원전21세기를 전후하여, 중국역사상 첫번째 노예제국가인 하(夏)왕조가 출현한다. 이때 서북대지에서 생활하던 고대민족의 씨족조직의 내부에서는 변화가 발생한다. 혈연관계를 유대로 하던 씨족부락은 점점 소실되고, 지연관계를 유대로 하는 소방국이 역사의 수면위로 등장한다. 영하남부지구의 경수유역에서 생활하던 희(姬)성을 가진 부락은 점차 강대해진다. 그리고 강(姜)성부락과 연맹을 결성한다. 이 연맹은 마침 두 부락이 유목생활에서 농업생활로 바뀌는 과도기에 발생한다.

 

연맹부락의 제13세때 대권을 장악한 고공단보(古公亶父)는 북방에서 생활하는 융적(戎狄)의 계속된 침탈과 교란을 견디지 못하여, 할 수 없이 동쪽으로 이주한다. 섬서 기산 남쪽의 주원(周原)에 거주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그 곳에 성곽을 만들고, 그들이 보기에 거칠었던 융적의 기풍을 버리고, 주(周)라고 명명된 방국(方國)을 건립한다. 고공단보는 부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주함으로써 두 가지 큰 일을 완성한다. 하나는 중국역사상 노예제국가의 마지막 왕조를 건립하게 되고, 둘째는 희,강연맹의 원래 근거지는 철저히 융적에게 양보한다(이 양보는 나중에 서주가 멸망하는데 씨를 뿌리는 것이 된다)

 

적융족들은 고공단보를 쫓아낸 전쟁중에 형성된 연맹에 금방 틈이 발생한다. 그리고 여기서 각축을 벌인다. 점차 은주시대의 북방에 농업,유목혼합부족군(후세의 흉노와 같은 기마유목부족무리가 아니다)이 형성된다. 마지막으로, 융족은 절대적인 우세로 적인(狄人)을 격퇴한다. 일부 적인은 북으로 물러나서, 영하북부지역과 하투(河套) 일대를 장악한다. 또 다른 일부 적인은 투항하여 융족과 혼거하며 융합된다.

 

융이 중국에서 2000여년간 행세하다가 나중에 서로 다른 부족으로 갈라진다. 그중 중국역사상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의거융(義渠戎)이다. 이 자그마한 방국은 다른 융족과 마찬가지로, 하, 상, 주의 삼대에 걸쳐 정통의 시야로 보기에는 야만적이고 동물같은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갑골문시대때부터,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귀방(鬼方)"이라고 기록했다. 바로 <<사기>>에서는 그들이 "견융(犬戎)"이라고 칭해지는데, 개와 같이 비천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비록 융족이 주나라의 흥기와 은나라의 수중에서 정권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보조적인 역할은 하지만, 그들의 용맹함과 침탈은 서주왕조의 마음의 병이었다. 목왕부터 선왕까지, 여러번 병사를 파견하여 의거융을 정벌하게 하였다. 쌍방은 때로 싸우고, 때로 화해하면서 그 상태를 주왕조 전시기에 지속시킨다. 주선왕39년에서 40년까지, 주나라와 의거융의 전쟁은 주나라의 실패로 끝난다. 주나라는 오융(五戎)을 지금의 감숙 경양, 영하 고원일대에 안치시키고, 오융중 의거융은 주로 지금의 영하 육반산 일대에 남아서 거주한다.

 

3.

 

서주때, 저명한 모사, 중신인 강자아(姜子牙, 강태공)는 융부락이 전쟁을 잘하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주문왕에게 잘 이용하도록 건의한다. 그리고 대장 남궁적으로 하여금 무수한 미녀와 아름다운 청동기 그리고 주나라의 술과 특산물을 가지고 융부락에 사신으로 가게 한다. 사실상, 남궁적의 이번 행은 단순히 융부락의 수령에게 잘보이기위한 것은 아니었고, 융족이 만든 전차와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

 

육반산 일대의 무성한 삼림은 융족들로 하여금 목조주택, 마차를 잘 만들도록 하였다. 중국역사상, 청동기와 전차의 출현은 거대한 비약이었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허탁운은 <<만고강하-중국역사문화의 전환과 전개>>의 <<중국문화의 여명>>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청동과 차(車)의 사용은 중국문화권내에서 아주 중대하고 깊은 변화를 가져온다. 양자간에는 청동의 출현이 비교적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이 어느때부터 차를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는 고고학상 확실한 시간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이 두 가지 중요한 발명의 소식이 중국지역에 들어온 것은 아마 동시에 발생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중앙아시아초원상의 교통노선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전파된 것일 것이다."

 

강자아가 융족에 전차를 달라고 한 역사사실로 보면, 융족이 전차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주나라사람보다 빨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궁적은 현재의 문자기록중 중원지역에서 융부락으로 간 첫번째 사신이다. 그는 전차를 주나라로 가져온 후, 서주정권의 건립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전차는 중국군사역사의 시작을 알린다.

 

쌍방의 우호관계는 의거융족에게 상대적으로 안정된 발전을 가져오게 한다. 그리고 서주의 건립을 가속화시킨다. 그러나, 전체 주나라시기에, 의거융족은 시종 군사적인 확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이천년동안 녹슬지 않은 칼을 들고, 당시 중국서북의 천막을 그었던 것같다. 가장 빛나는 일획은 역사상 "봉화희제후"로 포사의 웃음을 사려고 했던 주유왕이 그 칼아래 목숨을 잃게 된 일일 것이다. 이를 표지로 하여 서주의 통치는 끝장난다.

 

4.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주나라의 후궁에 들어온 후, 미인 포사는 웃은 적이 없다. 주유왕은 각종 방법을 써보았지만 헛일이었다. 미인의 웃음을 한번 얻어내기 위하여, 주유왕은 명을 내려 현상금을 걸었다. 누구든 왕후를 한번 웃게 한다면 금1천을 상으로 내린다는 것이다. 유왕의 곁에 있던 대신이 "봉화희제후"라는 생각을 해낸다.

 

당시, 서주는 국내에 많은 봉화대를 만들어 경고신호를 전달하였다. 인근한 두 개는 서로 마주보이고, 만일 적의 상황에 변동이 발생하면, 위에 말린 늑대똥을 불태운다. 늑대똥의 연기(狼煙)으로 정보를 보내는 것이다. 하루는, 유왕이 포사를 데리고 성루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먼 곳을 바라보다가, 명령을 내린다. 봉화대에 불을 붙이라고 한 것이다. 멀고 가까운 곳의 제후는 낭연이 사방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황급히 병마를 몰아서 달려왔다. 그러나 멀리서 달려온 제후들은 호경에 도착했지만 적들이 쳐들어온 징후는 없었다. 그리하여 모두 얼굴에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포사는 제후들이 이처럼 당황하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웃음을 지었다. 포사의 이 웃음은 천금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주나라는 멸망의 길을 걷는다.

 

기원전771년, 유왕은 신태후를 쫓아낸다. 신후(申侯, 신태후의 부친)은 대로한다. 그리하여 반역을 하려는 마음이 일게 된다. 그리고 서이 견융의 병사(즉, 의거융)와 연합하고 산동 조장일대의 증(繒)인들과 반기를 든다. 나중에 융족의 병사들이 서주의 수도인 호경을 공격한다. 주유왕은 황급히 봉화불을 붙이나, "늑대가 왔다"는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 재연된다. 제후들은 이것이 주유왕이 포사의 웃음을 얻어내기 위한 장난이라고 생각해서 아무도 병사를 일으켜 달려오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융족은 유왕을 여산의 산자락까지 쫓아가서 죽여버린다. 일대미녀 포사는 포로로 붙잡혀 주나라의 재물과 함께 융족의 땅으로 끌려간다.

 

이번 쿠데타로 주나라는 도성을 낙양일대로 옮기고, 중국역사상의 동주시대를 연다.

 

의거융의 우두머리는 서주를 멸망시킨 후, 주왕조의 통치를 벗어났음을 선언하고, 정식으로 자신의 국가를 세운다. 이때부터, 중국역사상 정식으로 "의거국(義渠國)"이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의거국이 세워진 후 얼마되지 않아, 병사를 일으켜 사방으로 확장한다. 그 강역은 계속 확대된다. 국가의 경계선은 서쪽으로는 서해고초원에 달하고, 동으로는 농동에 달하며, 북으로는 영하, 하투를 지배하고, 남으로는 경수에 이른다. 면적은 약 10만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