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북부)

돈황 막고굴 : 100년전에 한 영국인이 다녀가다

중은우시 2007. 3. 23. 23:55

1907년 6월, 고고탐험가인 스타인(Stein)은 돈황의 장경동에서 29개의 큰 상자에 문화재를 담아서 가져갔다. 스타인이 돈황을 떠날때의 광경은 장경동 문화재가 흩어질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스타인은 이미 그가 유럽으로 돌아가면 그가 꿈에도 그리던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장경동의 발견자인 왕도사는 그러나 스타인이 그에게 준 돈으로 절을 수리하는 것 이외에 여러가지 내심의 갈등을 참고 있었다. 이 점은 스타인도 알아차렸다. 스타인이 기록한 것은 그가 돈황성밖에서 돈황지방관리의 융숭한 환송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스타인이 가져가는게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프랑스, 러시아, 일본등의 나라에서 보낸 중국신강고찰대는 장경동을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돈황사화>>에서 기록한 바에 따르면, 돈황문화재는 중국에 2만건이 남아 있는데, 세계각국에 흩어져있는 총수는 개략 5만건이다. 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 그리고 독일, 미국, 덴마크, 한국등에 흩어져 있다.

 

장경동 문서두루마리와 예술품은 보여주는 것은 돈황의 한때 휘황함이다. 한무제때부터 한나라의 판도는 하서까지 확대되었다. 이어서 장액, 무위, 주천, 돈황에 하서사군(河西四郡)을 설치하였다. 장성은 돈황의 서쪽까지 건설되었고,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을 만들었다. 돈황은 서역에서 중원으로 들어오는 대문이 되었다. 북송때 해상비단길이 번영한 이후에는 이 지역은 상대적으로 썰렁해지기 시작했다.

 

명나라때는 숙주의 서쪽에 가욕관을 축성했다. 돈황은 가욕관 바깥에 놓여진다. 하서주랑에서 서역으로 통하는 길은 가욕관에서 하미(哈密)까지이다. 돈황은 더 이상 동서교통의 통과장소가 아니게 되었다. 가정18년(1539년)에 다시 가욕관을 봉쇄한다. 돈황은 철저히 황량해지고, 심지어 점점 잊혀지게 되었다. 청나라 옹정3년(1725년)에 다시 돈황현이 설치되고, 돈황은 비로소 약간 부활하였다.

 

세계에서 영향력이 큰 문명체계는 네 가지이다, 중국, 인도, 이슬람 그리고 그리스이다. 계선림 선생은 일찌기 4대문명중 유일한 하나의 교차점이 돈황과 신강지구라는 것이다. 돈황 및 서역의 문서문물의 발굴은 중국과 세계의 많은 잊혀진 일들을 부활시켰다.

 

장경동내에 천년간 비장되어 있던 문서, 경권, 전적, 방지, 신찰, 계약, 호적, 장부, 곡자등은 모두 인쇄술이 사용되기 전에 손으로 쓴 진품들이다. 이런 문서를 쓴 시기는 개략 5세기 내지 11세기이다. 한문, 장문(藏文) 외에 대량의 이미 사용하지 않는 고대문자도 있다. 장경동을 봉쇄한 이유에 대하여는 아직 정설이 없지만, 이런 문서들이 잊혀진 일단의 역사를 부활시킬 것이라는 것을 스타인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당시 중국의 문인, 관료들은 이런 인식이 없었을 뿐이다.

 

장경동 문화재의 유산(流散)은 큰 정치적인 배경하에 시작되었다. 19세기말,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서북지역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지역이었다. 인근의 인도와 아프간은 이미 인도의 식민지와 보호국이 되었다. 제정러시아의 실력은 이미 카스피해까지 다가왔다. 이 두 대국은 모두 신강이라는 아직 아무도 나눠갖지 않은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각자 준비를 했다. 중앙아시아의 탐험열기는 이런 배경하에 전개되었다. 스타인은 <<고고와 탐험>>이라는 글에서 이런 상황을 묘사했다: "영국과 러시아는 서로 감시했고, 날로 상대방이 신강으로 확장할 것이라고 의심했다. 모두 눈길을 노쇠한 중화제국을 겨냥했다"

 

제정러시아가 노리는 것은 신강서부의 오아시스지역이었고, 영국인은 기세당당하게 신강서남부를 영국의 세력범위로 하였다. 문화재수집으로 유명한 스타인은 신강에서 고고탐사를 하면서 부수적인 임무는 지도를 그리는 것이었다. 고고학적 발굴시, 그는 자주 유적을 타믁한 후, 조수와 고용인들에게 발굴하라고 하고, 그 자신은 지도제작자를 데리고 현장을 며칠 심지어 한달씩 떠나곤 했다. 주변지역의 지형, 지세, 수리문화지리, 교통상태등에 대하여 탐사하고 지도를 그렸다.

 

1902년, "중앙아시아 및 원동 고찰국제협회"가 성립되었다. 나눠먹기의 물결이 밀려왔다. 이 고찰대는 이 황량하고 적막한 곳에서 계속 놀랄만한 소식들을 전했다. 이곳에 매장된 문명유적과 문화재는 오래전의 옛날에 관련되었다. 한간(漢簡), 로마금화, 페르시아은화와 문서에 나타나는 여러 문자는 모두 잃어버린 많은 기억을 암시하고 있었다.

 

당시 이 토지에 오가는 사람은 각종 탐험대, 고찰대, 측량대였다. 1876년 제정러시아군관 푸르바르스키가 나포박(羅布泊)으로 고찰을 왔고, 50년간 중국서북지역에 각종 명목으로 들어온 고찰대는 42팀이다. 그 중 스타인이 끌고온 고찰대만 4번이다.

 

장경동 문화재가 흩어지는 과정에서, 스타인은 첫번째 사람은 아니다. 왕도사도 질책받는 주요한 인물이다. 1900년 6월 22일 왕도사는 장경동을 발견한다. 1907년 스타인이 장경동에 왔는데, 7년동안 이미 어떤 두루마리는 왕도자를 거쳐 지방관리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왕도사에 관하여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기록은 기본적으로 왕도사의 묘지명과 스타인의 책에서의 기록뿐이다. 왕도사가 장경동의 문서를 스타인에게 넘기는 과정은 간단하게 우매하다거나 탐욕스럽다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지는 않다. 1907년부터 1928년까지 외국고찰대는 거의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고, 장경동에서 문물을 가져갔다. 한팀 또 한팀의 외국학자들은 불원천리 보물을 찾으러 왔는데, 중국의 관리나 문인들의 이 문서에 대한 인식도 왕도사보다 별로 나은 것이 없었다.

 

스타인에 의하여 반대인이라고 불리워진 반진(潘震)은 스타인이 제1차로 신강에 왔을 때, 이 온후한 반진은 스타인의 여권이 여행여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스타인에게 제공한 도움은 여행의 필요를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다. 스타인이 한상자 한상자의 문물을 운반해나갈 때에도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의혹을 품었을 뿐이다. "왜 이런 고대의 자료를 서방으로 운송해 가는가?" 그는 전혀 몰랐었다. 장경동이 발견된 후, 왕도사가 현지 관리들에게 장경동의 일을 보고했고, 그들에게 보물을 보냈을 때도, 스타인처럼 중시되지 못하였다. 비록 한림원 편수이고 일대의 유명한 문인인 섭창치(葉昌熾)도 당시 감숙학정을 맡고 있었다. 1903년 그의 손에 장경동의 불상과 두루마리가 놓여졌다. 그러나 그는 한번 찾아가볼 흥미는 느끼지 못했다. 그의 눈에 불상과 두루마리는 그저 수장품일 뿐이었다.

 

스타인은 장경동의 문화재를 대영박물관에 전시했고, 세계에 이 밀실보물을 선포했다. 바로 이어서, 프랑스의 동방학자 보시허는 다시 한 무더기를 운반해갔다. 그가 북경에 도착했을 때, 소식은 이미 퍼져나갔다. 보시허는 할수없이 가져온 일부 두루마리를 육국반점에서 전시했다. 나진옥(羅振玉)은 매일 그의 집을 찾아가 초록했고, 동시에 학부에 상소를 올렸으며, 정부로 하여금 장경동에 남아 있는 문물을 조사확인하여, 북경으로 운송해와야 한다고 하였다. 1910년, 청나라정부는 남은 돈황두루마리를 전부 북경으로 옮겨와서 보존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운송하는 도중에 한번의 엄청난 유실이 있었다. 오는 길에 어느 한 곳에 도착할 때마다 일부가 도난당했다. 도난당한 문물은 관직을 얻는데 뇌물로 쓰이거나 돈으로 바꾸거나, 개인호주머니로 들어갔다. 문화대혁명때 가산몰수하면서도 두루마리가 나왔었다.

 

마지막으로 경사도서관에 넘겨진 때는 18상자였고, 정리번호 8697호였다. 그러나, 돈황유서가 도대체 얼마인지는 정확한 숫자를 내기 힘들다. 900여년을 감추어져 있었던 문서, 두루마리와 방직품, 회화품은 1900년 발견될 때 도대체 총수가 얼마인지, 우리는 서로 다른 연구저술에서마다 서로 다른 숫자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밖에 모른다. 원인중의 하나는 스타인과 같은 방식의 수집정리방식은 보관문물의 원래 질서를 흐트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두루마리와 두루마리를 싸고있던 질피(帙被)를 무식하게 분리시킴에 따라, 원래대로 복원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둘째는 흩어진 경로가 어지럽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특히 줄어든 숫자를 감추기 위하여, 문물을 여러개로 조각내서 숫자를 맞추곤 하여, 더더구나 원래대로 복원하기 어렵게 하였다.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장경동 문물이 흩어진 것은 중국학계에 놀라움을 주었고, 역사학의 개념이 이때로부터 현대화하였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왕국유는 "은허갑골문", "한간", "청나라 내각대고당안" 및 "돈황장경동의 당나라문서"를 중국현대역사학의 4대발견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런 역사문헌이 발견될 때, 중국의 학자들은 대부분 반응이 늦었고, 그 역사학적인 가치를 몰라봤다. 가장 먼저 갑골문을 수장했던 사람은 섭창치가 돈황문물에 대하여 그러했듯이 그저 비장(秘藏)하려고만 하였지, 이를 세상에 널리 알려 연구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청나라 내각당안이 막 알려졌을 때, 하마터면 불에 타버릴 뻔했다. 나진옥은 이것을 들은 후 학부로 옮겨서 보관했고, 신해혁명후에 역사박물관으로 옮겼다. 경비가 모자라서, 그중 3/4의 당안은 폐지로 팔렸다. 그리고 나진옥이 길거리에서 팔리는 당안을 본 후에, 이를 추적해서 3배의 가격을 주고서야 다시 회수할 수 있었다. 왕국유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신물을 "세상사람들이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알아도 중요한 줄 몰랐다. 그것이 중요한 줄 알았던 사람은 그저 한두개 수집하여 감춰놓고 스스로 즐길 뿐이었다."

 

세계제1차대전때에는 중국서북의 탐험고찰대가 전쟁으로 인하여 중단되었다. 1924년 1월 미국의 하버드대학의 푸거예술박물관의 워너(Warner)는 하버드대학 고고조사단을 조직하여 돈황막고굴을 찾았다. 장경동에는 이미 그가 만족할만한 물건이 없었다. 그는 바로 석굴에서 26개의 벽화를 떼어갔고, 1개의 보살상을 가져갔다. 그러나, 이때의 중국은 이미 5.4운동을 경험했고, 중국의 현대의식이 계몽되었다. 워너가 다음 해 다시 돈황에 왔을 때는 두대의 마차분의 벽화를 떼는데 사용할 접착포를 가져갔으나, 이미 떼어가기가 어렵게 되었다. 워너가 어쩔 수 없이 돈황을 떠나는 광경은 스타인이 제1차로 와서 돈황을 떠날 때의 광경과 큰 차이가 있게 되었다.

 

1928년 학계는 고물보관위원회를 만들라고 촉구했다. 1930년, 스타인이 다시 중국고찰을 위한 여권을 받은 후, 고물보관위원회는 남경정부에 공문을 보내어 스타인이 신강, 감숙을 여행하는 것을 반대했고, 싱강정부로 하여금 스타인을 국외로 추방하라고 요구했다. 각계의 압력으로, <<고물보존법>>은 이 시기에 공포되고, <<고물보존법>>에 따라 스타인는 비록 여권은 얻었지만, 고물보관위원회의 문서가 없으므로, 문물발굴은 위법이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그가 다시 한번 중국문화재를 수확할 기회는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물주권의식에 대하여 인식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그의 역사가치에 대하여 인식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초, 화가인 장대천(張大千)은 돈황으로 와서 벽화를 모방해서 그리기 시작했다. 동굴의 벽화는 여러층의 벽화였으므로, 서로 다른 연대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장대천은 북위, 수당의 풍격을 숭배하였으므로, 임모(臨摹, 베껴 그림)를 위하여, 그는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고, 서하, 송원의 외층 벽화를 긁어내 버렸다. 그는 기본적으로 현대적인 지식개념이나 상응하는 능력이 없었으므로, 그가 벗겨낸 바깥층 벽화는 완전히 파괴되고 만 것이다. 그의 우매는 왕도사의 것과는 달랐다. 그러나 그 성격은 다르지 않다.

 

당시 북경대학 교수인 향달이 마침 이곳에 고찰을 왔다가, 분노가 극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중앙연구원에 편지를 썼는데, "장대천씨는 일개 강호화가로서, 이 곳에 기거하면서, 임모작업을 하였고, 임모하기 편하도록 마음대로 원화를 긁어내어 그림을 손괴하면서도 아까운 줄을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동굴을 집안사람들 침실로 썼다....더욱 분노하게 하는 것은 벽화를 자기마음대로 떼어냈다는 점이다" 1942년 10월, 향달의 <<돈황천불동의 관리연구 및 기타 연대적인 몇개 문제>>를 중경 <<대공보>>에 연재하면서, 천불동을 국유로 회수하도록 호소했고, 학술기구로 하여금 관리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 이 호소는 점차 여론화되었고, 1943년 5월, 장대천이 돈황을 떠난 것은 거의 쫓겨나다시피 한 것이었다.

 

1944년 원단, 상서홍을 소장으로 하는 국립돈황예술연구소가 성립되었다. 장경동문서는 이후 돈황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으로 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