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국 수도의 최초 후보지는 북경이 아니라, 흑룡강성의 하얼빈이었다고 한다.
모택동은 중국을 하나의 웅혼한 새와 같이 보았고, 흑룡강성은 마치 날개를 펼친 백조와 같았다. 하얼빈은 바로 이 백조의 목아래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얼빈을 "백조의 목아래에 있는 진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얼빈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약탈을 경험했고, 30여개국가의 교민들이 모여있고, 16개국가가 영사관을 설립했으며, 제정러시아를 위주로 한 국제적인 도시로 성장하였다. 수천개의 공상기업들이 세워지고, 형형색색의 유럽풍의 건축물도 들어섰다. 동경, 런던, 파리, 베를린, 뉴욕등 세계 1류도시들과 무역도 빈번해졌고, 중국동북지방의 최대대의 시장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일본제국주의의 14년에 걸친 식민통치는 끝났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국민당의 군대가 대거 몰려와서 동북의 공산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얼빈은 가장 먼저 공산군에 의하여 점령된 도시가 되었고, 중공중앙 동북국, 동북행정위원회의 소재지였으며, 동북해방구의 정치,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하얼빈이 당시 가장 안전한 도시라는 점을 고려하였는데, 그 이유는 소련에 가장 가깝고 소련의 지원과 도움을 받기 가장 편리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모택동과 중공중앙은 하얼빈을 특별시로 하고, 거기에서 신중국을 건립할 것을 준비하였다.
모택동과 중공중앙은 당시에 동북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지만, 하얼빈은 상당히 먼 곳에 있었으므로 한꺼번에 옮겨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중간의 기착지가 필요했고, 중간기착지로 선정한 곳은 화북의 피서산장이 있는 승덕(承德)이었다. 승덕은 당중앙의 임시소재지로 하였다. 요심전투의 전날, 동북야전군의 임표와 나영환은 당중앙에 동북으로 옮기는 일에 대한 답신을 요청하였다. 모택동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당중앙은 반드시 관내에 머물러 있어야 하므로, 나는 잠시 떠나지 않겠다"
비록 모택동과 당중앙이 동북 하얼빈으로 옮기는 일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당중앙을 하얼빈으로 옮기는 예비업무는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를 위하여 중공중앙 부주석인 주은래는 중앙경비단(당중앙경호부대)을 둘로 나누어 일부분은 남겨서 당중앙을 보위하는 책임을 지고 여전히 중앙경비단으로 부르며, 일부분은 '중앙선행경비단'으로 개칭하여 오열에게 단장을 맡기고 섬북공학의 부교장 이일민을 정치위원으로 하여 모두 400명으로 구성했다. 1945년 10월 2일, 오열, 이일민은 중앙선행경비단을 이끌고 동북에서 책임을 맡고 있던 이부춘에게 간다. 연안에서 출발하여 1개월여의 행군을 거쳐 기찰열요해방구 소재지인 승덕으로 가서, 하얼빈으로 갈 준비를 한다.
그런데, 바로 이때 동북의 전황이 급격하게 변한다. 국민당이 미국의 지지하에 동북에 병력을 증원하여, 교통요지를 점거한다. 모택동은 과감하게 결정을 내려버린다. 당중앙은 승덕으로 옮기지 않겠다고. 중앙군사위원회는 명령을 내려 중앙선행경비단을 현지에서 개편하여 기찰열요군구에 예속시킨다.
1948년 4월 20일, 모택동은 전국에 신 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고, 연합정부의 설립을 호소하며, 전국각계인사의 열렬한 호응을 받는다. 당시 국민당이 여전히 중국의 절반을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저명한 민주인사들을 대련을 거쳐 하얼빈으로 보내는 일은 건국의 큰 일이었고, 절대 가볍게 처리할 일이 아니었다. 모택동과 주은래는 친히 여러가지 수송방안을 마련하고 몇차례의 곡절을 거쳐 주은래의 세심한 계획하에 심균유, 곽말약, 이제심등 민주인사들을 세차례로 나누어 홍콩을 거쳐 안전하게 하얼빈까지 모셔온다. 황염배등 제4차 민주인사들은 1949년 3월 14일에 홍콩을 출발하는데, 이 때 북경과 천진이 이미 공산당의 수중에 들어오므로, 중공중앙은 신 정치협상회의의 개최지를 북경으로 변경한다. 황염배등은 3월 25일 북경에 도착한다. 모택동과 주은래의 이러한 조치는 매우 현명했다. 역사는 1949년에 중국공산당이 소집한 신 정치협상회의는 300여명의 민주인사가 참여하여 본질적으로 1949년 국민당에 의하여 소집되었던 구 정치협상회의와는 천양지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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