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2월 21일 오전 11시 27분, 미국대통령 닉슨이 은백색의 대통령전용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나와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인 북경공항에 내리는 그 순간 중.미.소의 삼국을 기점으로 한 국제전략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다.
닉슨방중상황은 위성으로 세계각지에 방송되었다. 이번 행동은 1949년 10월 1일부터 시작된 중미간의 상호적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이었고, 세계적인 범위에서 대지진에 버금가는 충격을 주었다. 가장 충격이 큰 것은 극동의 이웃인 일본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180도 전환된 태도를 보면서 미국을 따라 중국에 적대적인 입장을 보여온 일본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엇다. 당시의 일본수상은 사이토였는데 입을 삐죽이며 티비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는 감정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대를 아는 자가 영웅인 법이다. 사이토 내각은 이를 잘 알았다. 내심으로 불만이 있었으나, 미국을 따라가기 위하여 일본정부는 닉슨방중후에 비밀리에 동경도지사인 미노베의 방중시에 주은래총리에게 사이토수상이 중국을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한다. 그러나, 주은래는 즉석에서 "사이토정부는 말만하고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그러면서 중일담판은 사이토를 상대방으로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사이토정부로서는 찬물을 끼얹은 것같았을 것이다. 주은래는 사이토의 방중을 거절하며 상대방을 탐색하고 있었다. 중국이 일본과 수교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신중국은 1949년 6월 20일에 이미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것을 준비한다는 사론을 발표한 바 있었다. 단지 일본정부가 미국을 따르고, 장기석정부를 인정하며, 그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므로써 장기간의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된 것이었다. 닉슨대통령의 방중후에 형세의 발전은 중일간의 역사의 남겨진 문제를 해결하는데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이로 인하여 모택동은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중이란에 수교하는 문제는 마땅히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담판이 잘되어도 좋고, 담판이 안되어도 좋다. 어쨋든 지금은 시기가 무르익었다. 붙잡아야 한다" 주은래가 사이토의 요청을 거절한 것은 욕금고종의 외교책략이었다. 한편으로는 장기간 중국인민을 적대시해온 사이토정부에 대한 징계의 측면도 있었다. 과연 6월 17일 사이토내각은 물러났다.
7월 7일 타나카 가쿠에이내각이 등장한다. 타나카는 취임즉시 중국과 수교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대하여 주은래는 7월 9일 신속히 반응을 보인다. 그는 예멘민주공화국정부대표단과의 연회에서 "타나카내각이 7일 성립되었고, 외교측면에서 중일국교정상화를 실현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곧이어 중일우호협회 부비서장인 손평화는 상해무극단을 이끌고 동경에서 연출할 때 타나카에게 말을 전한다. "타나카수상께서 북경에 가서 직접 협상한다면 일체의 문제는 잘 협의될 것입니다" 당시 일본정부는 중일국교정상화에 있어서 반드시 해결해야할 두 개의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중일수교삼원칙(삼원칙의 주요내용은 1.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이다. 2.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영토의 분리할 수 없는 일부분이다. 3. 일본대만평화조약은 불법적이고 무효이므로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바로 일본전쟁배상문제였따. 이 문제에 관하여 중국정부는 일본대만평화조약을 승인하지 않을 때 이미 말한 바 있다. "일본국국주의자들은 수천만 중국인을 살해하였고, 중국으로 하여금 수백억달러의 공공재산과 개인재산의 손실을 입게 하였다. 중국은 이런 손실에 대한 배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일본이 중국에 배상하여야할 금액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은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중국에서 선처해줄 것을 바랄 뿐이었다. 중국의 태도를 탐색하기 위하여, 먼저 핵심문제에 대한 상호간의 양해를 확보하기 위하여 중간에서 역할을 할 사람을 찾았다. 당시 일본 공명당위원장으로 마침 중국방문중이던 竹入義勝에게 이 역할을 맡겼다. 1975년 죽입의승은 그의 회고록에서 그가 1972년 7월 25일 중국측과 만난 구체적인 내용을 적고 있다. "나는 나의 의견을 전부 말했다. 모두 십여 개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만일 당신들이 이 의견에 찬성하면 일은 처리하기 좋을 것이다....주총리는 최후로 나에게 물었다. 만일 우리가 당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인다면, 일본정부는 행동을 취할 것인가?" 나는 북경에서 전화로 타나카선생에게 전화했고, 그의 결단을 요청했다. 타나카의 대답은 "좋다"는 것이었다 매우 시원했다. 마지막으로 주은래 총리를 방문했을 때, 주총리는 하나의 인쇄문건을 꺼내서 나에게 말했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우리의 일중연합성명에 관한 원시적인 방안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용은 나중의 일중연합성명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죽입의승의 활동은 중일수교에 기초를 닦았다.
일본전쟁배상문제에 관하여, 중국측의 초안 제7조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중일양국인민의 우의를 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정부는 일본국에 전쟁배상을 요구할 권리를 포기한다." 다만, 나중의 중일연합성명의 정본에서는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권리"라는 두 글자는 삭제하였다.
외교문건에서의 한 글자의 차이는, 때때로 협상테이블에서는 엄청난 변화와 설전을 나타낸다. 중국이 배상을 포기하는 문제에서도 중국과 일본은 또 한번 근접전을 벌였던 것이다.
1972년 9월 26일, 타나카 수상이 북경에 도착한 다음 날, 중일양국은 인민대회당에서 첫번째 외상회담을 거행하였다. 협상이 중국측의 협상 제7조에 이르렀을 때, 일본대표인 다카시마는 갑자기 큰 소리를 쳤다. 1952년 일본과 대만이 체결한 평화조약에서 일본의 전쟁배상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 그러므로 중국이 배상권리를 포기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중일간에 전쟁종결상태에 대한 문구등에 대하여 거절을 표시했고, 회담은 성과없이 끝났다.
다음 날, 주은래는 타나카를 만나서, 전날의 우호적인 태도를 바꾸어, 엄중한 말투로 일본의 행위를 비난했다. 그는 "오늘 오전 외상회담의 보고를 받았다. 다카시마 조약국장은 중일수교정상화를 파괴하러 온 것인가보다. 일중수교정상화는 정치문제이지, 법률문제가 아니다. 다카시마 국장은 소송하듯 따지러 온건가? 나는 다카시마국장의 의견이 타나카 수상과 오히라 외상의 본의가 아니라고 믿는다." 동시에 주총리는 중일배상문제에 대하여 다시 한번 대만과의 합의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천명했다. "당시 장개석은 이미 대만으로 도망쳐있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체결후에 일본대만조약을 체결했고, 소위 배상요구포기를 표시했다. 그 때 그는 이미 중국을 대표할 수 없었고, 자기가 할 수 없는 걸 처리한 것이다. 전쟁손실을 받은 것은 대륙이다. 우리는 양국인민의 우호적인 관계에서 출발하여 일본인민이 배상부담으로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어서 배상요구를 포기하는 것이다" "모주석은 일본인민이 배상문제로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일본의 친구들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너의들의 조약국장인 다카시마 선생은 오히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장개석이 배상을 안받겠다는 말을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말은 우리를 모욕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50년혁명을 거치면서, 장개석응 이미 중국인민에 의하여 타도된 사람이다. 다카시마선생의 말의 당신들 두 사람의 전신에 부합하지않는다." 주은래 총리가 이 말을 할 때, 타나카 일행은 기가죽어 있었고 밥도 제대로 못먹었다.
다음 날, 중일연헙성명 초안팀이 다시 회의를 개최했다. 다카시마는 시작하자마자 저번의 언행을 사과했다. 일본국민은 중국이 전쟁배상요구를 포기하는데 대하여 깊이 감동받았다고 말했다. 이로써 전쟁배상문제가 일으켰던 풍파는 가라앉았다. 그러나 중국측은 일본측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성명중 배상의 "권리"라는 글자를 "요구"라는 글자로 바꿔주는데 동의했다.
1972년 9월 29일 오전 10시 20분, 중일 양국대표는 인민대회당에서 중일수교정상화의 연합성명을 발표했다. 연합성명의 제7조는 다음과 같다.
"중화인민공화국정부는 선언한다. 중일양국인민의 우호관계를 위하여, 일본국에 대한 전쟁배상요구를 포기한다"
이로써 중일양국간에 27년간 해결되지 않았던 배상문제는 중국정부의 포기로 끝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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