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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과 시진핑의 개혁개방의 다른 점과 같은 점...

중은우시 2024. 8. 26. 13:56

글: 왕우군(王友群)

8월 22일은 등소평의 탄신120주년이다. 이를 전후하여, 중공의 당매체는 연이어 기념글을 발표했다. 시진핑은 등소평탄신120주년을 기념하는 좌담회에서 강화를 발표했다. 일시에 "등소평"은 인터넷의 인기검색어가 되었고, 어떤 사람은 시진핑이 등소평의 개혁개방으로 회귀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과연 그러할까? 이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시진핑은 집권한지 12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계속하여 등소평을 억누르고 모택동을 치켜세웠다. 시진핑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계속하여 등소평을 치켜세우고, 시진핑에 반대했다. 여기에서, 필자는 등소평과 시진핑의 개혁개방에서 어떤 점이 같고 어떤 점이 다른지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등소평, 시진핑 개혁개방의 다른 점

첫째, 시진핑은 "당관일체(黨管一切, 당이 모든 것을 관장한다)"를 주장하고, 등소평은 "유한분권(有限分權, 한계를 가진 권한분산)"을 주장했다.

등소평은 왜 유한분권을 주장했을까? 원인은 두 가지이다. 하나, 1977년 등소평이 다시 나와서 업무를 수행할 때, 중공의 당정군최고권력은 모두 모택동이 생전에 지정한 최후의 후계자 화국봉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화국봉은 중공중앙주석, 국무원총리, 중앙군사위주석이었다. 등소평은 그의 개혁개방주장을 추진하고 싶었다. 그러면 반드시 화국봉이 가진 권력을 분산시켜야 했다. 둘, 모택동이 집권했을 당시, 모택동은 명목상으로 중공중앙주석, 중앙군사위주석만을 맡았다. 다만 실제로 당정군의 최고권력은 모두 모택동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모택동의 권력집중은 10년문혁이라는 재난을 가져온 중요원인이다.

등소평은 어떻게 "유한분권"하였는가?

먼저, 화국봉의 권력을 셋으로 나눈다; 후야오방이 중공중앙주석(나중에 중공중앙총서기로 개칭함)을 맡고, 등소평이 중앙군사위주석을 맡고, 자오쯔양이 국무원총리를 맡는다.

다음으로, 1982년 헌법수정으로 국가주석을 둔 이후 중공중앙총서기, 국가주석, 중앙군사위주석을 각각 다른 사람이 맡는다.

그 다음으로, 당권, 정권, 국유기업사업단위의 영도권등을 어느 정도 아래에 권력을 위임한다.

시진핑은 그러나 "당정군학민(黨政軍學民), 동서남북중(東西南北中), 당이 모든 것을 영도한다." 또한, 모택동시대의 "당의 일원화영도"로 돌아가야한다고 주장한다.

시진핑은 중공중앙총서기, 국가주석, 중앙군사위주석의 3개 당정군 최고직위를 겸직하고 있을 뿐아니라, 십여개 위원회 혹은 영도소조의 직위도 겸직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국가안전위원회 주석, 중앙전면심화개혁위원회 주임, 중앙재경위원회 주임, 중앙외사위원회 주임, 중앙전면의법치국위원회 주임, 중앙심계위원회 주임, 중앙대만공작영도소조 조장, 중앙군사위 심화국방및군대개혁영도소조 조장, 중앙군사위 연합작전지휘중심 총지휘등이 그것이다.

둘째, 시진핑은 당정합일(黨政合一)을 주장하고, 등소평은 당정분리(黨政分改)를 주장한다.

등소평은 모택동시대의 교훈을 받아들여, 특별히 언급했다: "각급 영도기관은 모두 너무나 많은 관리하지 않아야하고, 잘 관리할 수 없는 일, 관리가 안되는 일들까지 관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등소평은 1980년에 "당정분리를 착수하여 해결하고, 당이 정부를 대신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중앙의 일부 주요지도자들은 정부의 직위를 겸직할 수 없고, 당을 관리하고, 노선, 방침, 정책을 관리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야, 중앙의 통일영도를 강화하고 개선하는데 유리하고, 각급정부가 위에서 아래로 강력한 업무시스템을 건립하는데 유리하며, 정부직권범위내에서의 업무를 잘 관리할 수 있다."

시진핑의 방식은 등소평의 방식과 전혀 상반된다. 여러 방면에서, 모택동이 제창한 당정합일, 이당대정(以黨代政)으로 돌아갔다.

중공20대이후, 시진핑은 국무원을 중공중앙의 집행기구로 바꿔버린다. 현임 국무원총리 리창(李强)은 중공건정 75년동안 권한이 가장 적은 총리이다. 시진핑은 국무원홍콩마타오판공실을 중공중앙홍콩마카오판공실로 바꾸었고, 과기부를 중공중앙과기위원회의 업무수행기구로 바꾸었으며, 그외에 중공중앙사회부를 성립하여, 국무원의 일부 직능을 사회부로 이전시켰다.

셋째, 시진핑은 간부직무종신제로 회귀했고, 등소평은 간부직무종신제를 폐지할 것을 주장했다.

1980년부터, 등소평은 여러번 간부직무종신제의 폐단을 언급하고, 간부직무종신제를 폐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1982년 12월 헌법수정때 "국가주석, 부주석, 국무원총리, 부총리, 전인대상무위원회위원장, 부위원장등은 연속하여 2기를 넘어 연임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이 규정은 "당과 국가지도자"직무종신제의 폐지를 의미했다.

1989년 11월, 중공 제13기 5중전회에서 등소평은 중공중앙군사위주석의 직무를 사임하고, 다음 해 국가군사위원회 주석의 지무도 사임하고 정식으로 은퇴한다. 다른 중공원로, 진운(陳雲), 양상곤(楊尙昆), 박일파(薄一波)등도 그후 지도직무에서 물러났다.

시진핑은 2017년 중공19대에 중공중앙총서기를 연임한 후, 즉시 헌법의 국가주석, 부주석임기제규정의 수정에 착수한다.

2018년 3월, 제13기 전인대 1차회의에서 '헌법수정안'이 통과되는데, 국가주석, 부주석의 '연속하여 2기이상 연임할 수 없다'는 규정이 취소된다. 이는 국가주석, 부주석은 종신재직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78년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실행한 이래, 시진핑이전까지 그 어느 중앙총서기도 3연임을 한 경우가 없었다. 다만, 2022년, 시진핑은 중공20대에서 '삼연임'에 성공한다. 지금까지도 시진핑은 후계자를 선정하지 않았다. 적지 않은 사람은 시진핑이 중공중앙총서기에서 아마 종신제를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넷째, 시진핑은 언론을 통상범위를 넘어 통제하고 있다. 등소평은 일찌기 유한한 언론자유를 주장한 바 있다.

1978년 12월, 중공11기 3중전회때, 등소평은 이런 말을 한다: "가장 무서운 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다." "군중들이 반대의견을 내는 것을 듣고, 특히 그것이 날카로운 의견일 때, 소위 '정치배경', 소위 '정치유언비어'를 조사추적하여 입건하고 탄압하는 이런 악랄한 기풍은 반드시 금지되어야 한다." "다시 '삼불주의'를 진행해야 한다. 약점을 잡지 말고(不抓辮子), 레테르를 뒤집어씌우지 말고(扣帽子), 함부로 처벌하지 말라(打棍子)"

비록 등소평은 그가 말한대로 실행하지 않았지만, 1989년 6.4사태이전에 중국은 언론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시기였다.

시진핑이 집권한 12년, 언론에 대한 통제가 갈수록 심해졌다. 시진핑은 '당관일체'를 주앙하고, 중공의 당매체는 성이 당이고, 다른 모든 매체도 성이 당이기 때문이다.

"매채성당(媒體姓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중국의 모든 매체는 반드시 "당중앙과 고도로 일치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중공은 한 목소리만을 요구한다. 그것은 당의 목소리이다.

무릇 중공이 당과 일치하는 입장을 유지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언론은 모두 봉쇄된다.

중공의 '기율처분조례'는 특별히 '망의중앙(妄議中央)'에 대한 처분규정을 두었다. 무릇 인터넷, 방송, TV, 신문잡지, 전단, 서적등에서 혹은 강좌, 논단, 보고회, 좌당회등의 방식으로 '망의중앙'하면, 상황의 경중에 따라 각각 경고 내지 당적박탈의 처분을 내리게 된다.

무엇이 '망의'인가? 어떻게 규정하는가. 모두 당이 결정한다. 중공기업가 런즈창(任志强)은 2020년 팬데믹이 발발한 후 시진핑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는데, 시진핑당국은 부정부패를 이유로 18년이라는 중형을 선고했다.

다섯째, 시진핑은 국진민퇴(國進民退)를 주장하고, 등소평은 민영기업도 일정한 발전을 해야 한다는 점을 지지했다.

등소평의 개혁개방은 주로 경제분야에 국한된다. 두드러진 표현은 민영기업에 대한 느슨한 통제였다.

민영기업에 대하여 느슨하게 통제한 결과로 민영경제가 중국세수의 50%이상을 공헌하고, 국내생산총액의 60%이상을 차지하고, 기술혁신성과의 70%이상을 차지하고, 도시노동취업의 80%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다만, 시진핑이 취임한 12년간, 구두로는 민명기업의 발전을 지지한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국진민퇴를 실행하고, 국영경제의 발전을 극력 지지하며, 민영경제를 엄격하게 통제한다.

2020년, 민영경제에 대한 관리감독붐이 전국을 석권한다. 학생들의 과외수업을 하는 교육업종, e비지니스, 인터넷은행, 온라인게임, 인터넷콜택시플랫폼등 과거 수십년간 급속히 성장한 민영기업들이 모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일부 민영기업가는 감옥에 들어간다.

2020년 11월 11일, 허베이 다뉴(大牛)농목집단 동사장 쑨다우(孫大午)와 그의 처, 두 아들, 두 며느리등 가족과 일부 회사고위직등 28명이 중공공안에 의해 심흔자사(尋衅滋事), 생산경영파괴죄등의 명목으로 체포된다. 2021년 7월 28일, 쑨다우는 법원에서 취중충격국가기관죄, 공무방해죄, 심흔자사죄, 생산경영파괴죄, 거래강제죄, 불법채광죄, 불법농지점용죄, 불법공중예금흡수죄로 유기징역 18년, 벌금 311만위안에 처해진다.

여섯째, 시진핑의 개혁개방은 수익자가 적지만, 등소평의 개혁개방은 수익자가 많았다.

등소평의 개혁개방은 비록 가장 큰 수익을 얻은 것은 소수의 중공권력귀족가족이었지만, 노동자, 농민, 군인, 학생, 상인등 각업종에서도 어느 정도 이익을 얻었다. 대학입시를 예로 들어보면, 많은 농민의 자녀들이 대학입시를 통하여 운명을 바꾸었다. 이건 치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등소평의 개혁개방을 그리워하는 원인이다.

시진핑의 '개혁개방'12년간 어떤 사람들이 수익을 얻었는가? 시진핑은 선택적으로 부패단속을 진행하였는데 시진핑에게 조사처벌되지 않은 '호랑이', '큰호랑이', '늙은 호랑이', '호랑이왕'이 아마도 가장 큰 수혜자일 것이다. 예를 들어, 장쩌민가족, 쩡칭홍가족, 자칭린가족, 리창춘가족, 우관정가족, 허궈창가족, 장가오리가족, 류윈산가족등이다.

이상의 권력귀족가족외에 중국의 많은 중하층민중은 대부분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 못한다. 이는 당금 중국사회의 민원이 비등한 중요원인이다.

일곱째, 시진핑은 대외적으로 강경한 입장을 취하여 적믈 만들었고, 등소평은 '도광양회(韜光養晦)'를 주장했다.

십년문혁이 끝난 후, 등소평은 중국의 상황과 선진자본주의국가를 비교하여, 중국과 이들 국가들간의 차이가 매우 크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도광양회'의 대외방침을 제기한다.

무엇이 '도광양회'인가? 그것은 중국이 강국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저 '인구가 많고, 기반이 얇다' 자본주의강국인 미국과 맞설 수 없고, 겸손하게 일처리를 하고, 가급적 적게 말하고, 가급적 적게 행동한다. 미국등 서방선진국이 중국에 시장을 개방하도록 만들고, 중국에 자금, 기술, 인재, 서비스등 각 방면의 지원을 해주도록 하기 위해, 가급적 국제적으로 적을 적게 만들고, 중국의 실력을 강대하게 만드는데 유리한 국제환경을 조성한다.

시진핑이 취임한 후, 중구기 이미 세계2위의 경제체가 되었다고 여기고, 이미 대단해졌다고 여기고, 등소평의 '도광양회'정책을 버리고, '대국외교', '전랑외교'를 추진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미국과 쟁패를 다투는 길로 들어선다.

2020년 팬데믹때, 시진핑은 미국에 대한 냉전을 시작한다. 대표적인 사건은 다섯가지이다: (1) 1-2월, 중국의 군함이 태평양중부의 미드웨이로 들어가 군사훈련을 한다. (2) 3월, 남해전략핵잠수함의 '보루해구'를 건설했다고 선언한다. (3) 6월, 미국에 대한 우주전배치를 완성했음을 선언한다. (4) 7월부터, 발해에서 황해, 동해, 남해까지 그리고 내지까지, 40여년동안 가장 빈번한 군사훈련을 진행한다. (50 8월 25일 <인민일보>는 미국을 비판하는 장문의 글을 발표한다. 중심사상은 '미국이 가장 나쁘고, 중국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이러하다: 미중관계는 악화되어 수교40여년만에 최악의 상태에 이른다. 중국은 일본, 한국, 필리핀, 인도, 호주, 캐나다, 리투아니아등 여러 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된다.

지금 전세계를 둘어보면 중국은 진정한 우방국이 하나도 없다. 러시아, 북한, 이란등 극소수 중국과 관계가 밀접한 국가들도 중국과 동상이몽이고, 그저 서로 이용하는 관계일 뿐이다.

시진핑, 등소평 개혁개방의 같은 점

시진핑, 등소평의 개혁개방의 공통점은 둘 다 당의 영도를 견지하고, 일당독재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등소평은 모택동이 일으킨 10년문혁으로 중공이 멸망하려는 상황하에서, 개혁개방을 진행하였다.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진행한 초심은 구당(救黨)이었다.

시진핑은 모택동시대, 등소평시대, 장쩌민시대떄 축적한 각종 심층적인 문제가 집중적으로 폭발하여, 중공이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정당이 된 상황하에서, 개혁개방을 진행했다. 시진핑이 개혁개방을 진행한 초심은 역시 보당(保黨)이었다.

등소평의 구당도 좋고, 시진핑의 보당도 좋다. 모두 중공의 '당천하'를 유지하고, 중공의 일당독재를 지속하려는 것이다.

결론

시진핑, 등소평의 개혁개방은 결국 중공의 일당독제를 유지하는데 귀착하다.

그럼 어떻게 일당독재를 유지하는가? 그것은 '총부리'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누구든 말을 듣지 않으면 진압한다는 것이다. 1989년, 등소평이 6.4 천안문사태를 일으켰다. 그후 등소평은 직접 중공정치체제개혁의 길을 막아버린다. 그때부터 등소평이 사망할 때까지 등소평이 다시는 정치체제개혁을 꺼내지 않았다.

1989년이후 지금까지, 장쩌민에서 후진타오 그리고 시진핑까지, 중공의 정치체제개혁은 아무런 실질적 진전도 이루지 못한다.

등소평은 1986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경제체제개혁만 하고, 정치체제개혁은 하지 않으면, 경제체제개혁도 제대로 해낼 수 없다."

시진핑이 취임한 후, 정치적으로 계속하여 권력을 집중하고, 지금은 이미 권력집중에서 권력독재로 향하고 있다. 독재하에서, 어떻게 정치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중국의 정치체제개혁은 이미 죽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중국의 개혁개방이 이미 죽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