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귤(紫橘)
명나라때 영락제(永樂帝) 주체(朱棣)는 영왕(寧王) 주권(朱權)에게 나중에 천하를 나누어갖자고 유혹하여 반란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주체는 반란에 성공한 후, 영왕계를 탄압한다. 그리하여 영왕계통은 모두 복수를 꿈꾸었다. 다만 진정 반란을 일으킨 것은 명무종(明武宗)때의 주신호(朱宸濠)인데, 그는 왕양명(王陽明)에 의해 손쉽게 진압당했다. 그런 일이 이때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원나라때도 실의한 왕족 아릭부케(阿里不哥)가 있었다. 당시 아릭부케는 쿠빌라이(忽必烈)와 황위를 다투었고, 실패한 후 그 가족은 탄압을 받고 서북으로 흘러들어간다. 나중에 원나라가 망하고 북으로 도망쳤을 때, 아릭부케의 자손은 마침내 기회를 잡았고, 포어아해(捕魚兒海)의 전투이후 아릭부캐의 자손인 이수데르(也速迭兒)가 마침내 황제를 죽이는데 성공한다. 다만 그의 시군(弑君)으로 북원에 남아 있던 한화요소는 쇠퇴하고, 몽골이 분열되며 다시는 중원으로 진입할 가능성을 잃게 된다.
- 포어아해의 전투
포어아해의 전투는 오랫동안 명나라의 휘황한 전적으로 인식되었다. 당나라말기 북방민족이 침입한 이래 한족이 처음으로 초원에서 정면으로 싸워서 북방민족을 궤멸시킨 전투이기 때문이다.
1370년, 원순제(元順帝) 토곤테무르(妥懽帖睦爾)의 태자인 아유르시리다르(愛猷識里答臘)는 막북(漠北)에서 황위에 오르고 연호를 '건광(建光)'이라 한다. 역사에서 북원혜종(北元惠宗)이라 불린다. 이때 북원은 아직 군사력이 남아 있었고, 원혜종은 왕보보(王保保, 즉 코케테무르 擴廓帖木兒)를 중용한다. 1372년, 왕보보는 명나라 서달(徐達), 이문충(李文忠)의 부대를 대패시키고 북원의 형세를 안정시킨다. 북으로 원, 남으로 명의 국면이 잠시 형성된다. 다만 1378년, 이유르시리다르가 병사하고, 그의 아들 토구스테무르(脫古思帖木兒)가 즉위한다. 역사에서는 북원익종(北元益宗)이라 불린다.
원익종시기에 왕보보는 이미 죽었고, 북원은 더욱 쇠약해진다. 1387년, 명나라의 남옥(藍玉)이 15만대군을 이끌고 북벌에 나선다. 북원의 왕정이 포어아해(지금의 바이칼호) 일대에 있다는 것을 알고, 군대를 몰아 포어아해에서 원익종의 왕정을 기습한다. 이 전투에서 원익종은 겨우 태자 천보노(天保奴), 승상 실레문(失烈門)등 십수기만 도망친다. 남옥은 북원의 둘째왕자 지보노(地保奴), 북원의 대왕(代王), 오왕(吳王) 그리고 북원비빈, 공주 100명을 포로로 잡고, 백성 7만명을 초무하고, 우마 15만두를 획득한다. 북원의 주력은 전멸한 것이다.
다만, 유목민족정권은 한족정권과 다르다. 유목민족은 혈통과 명분을 중시하고, 유목부락은 일정한 거처가 없다. 남옥이 궤멸시킨 것은 단지 북원의 중앙왕정이다. 원익종이 도망친 것은 명나라에 큰 골치거리를 남겼다. 왜냐하면 원익종은 언제든지 대의명분을 이용하여 초원을 결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남명과 북원의 대치상태가 계속되는 상황하에서 북원이 내부적으로 분열한다. 청나라때 편찬된 <화이역어(華夷譯語)>에 소개된 명나라에 투항한 북원 추밀원지원(知院) 네체라이(捏怯來)의 항서(降書, 사학계에서는 네체라이서라 함)에 따르면 원익종이 암살을 당해, 북원의 국호가 없어졌다고 했다. 이는 북원의 멸망을 의미하고, 원나라가 더 이상 중원으로 쳐들어올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이수데르의 신분
원명교체기에 테무진이 황금가족혈통을 확입한 이후 권신들은 권한이 아무리 커지더라도, 혹은 황제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권신은 황금가족의 혈통을 옹립하여 명목상 몽골의 군주로 삼았다. 이런 몽골내부의 규칙하에, 1388년 황제를 죽이고, 북원의 멸망을 초래한 이수데르의 출신은 사학계의 연구과제가 되었다.
와다 세이(和田淸)의 <올량합삼위연구(兀良哈三衛硏究)>를 대표로 하는 사람들은 네체라이서의 기록에 근거하여, 이수데르가 "아리패가(阿里孛可)의 자손"이라고 본다. 와다 세이는 아리패가를 '아릭부케(阿里不哥)'로 해석했고, 그의 가족은 반란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아릭부케도 징기스칸(成吉思汗)의 자손이고, 그는 쿠빌라이와 황위를 놓고 다투었다. 아릭부케는 카라코룸(和林)을 차지하고, 쿠빌라이는 북경을 차지하고 있었다. 쌍방은 4년에 걸친 결전을 벌였고, 아릭부케가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본인은 유폐된다. 와다 세이에 따르면, 아릭부케는 말년에 서북의 알타이로 돌아가 뿌리를 내렸다. 다만, 역사상 아릭부케는 북경의 유폐장소에서 석방된 후 1달만에 죽는다. 근본적으로 서북의 알타이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와다 세이의 주장은 영향력이 컸고, 사회과학원이 편찬한 <준가르사략(準噶爾史略)>에서도 이수데르는 아릭부케의 후예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는 일종의 상식이 되어버린다.
이수데르의 신분에 관한 분석은 결국 명나라에 투항해온 북원의 추밀원지원 네체라이의 항서에 근거한 것이고, 그것은 유일한 증거이다. 그리하여, 사학자들은 그의 신분에 대하여 기실 큰 의문을 가지고 있다.
3. 이수데르의 시군
비록 아릭부케가 권력투쟁에서 패배했지만, 원나라는 는유목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어, 징기스칸의 후손인 아릭부케의 자손들은 여전히 원나라에서 귀족으로 지내고, 권세를 전혀 잃지 않았다. 그 자손은 모두 왕(王)의 작위를 가졌고, 요직을 맡았으며, 서위랍특몽골(西衛拉特蒙古)에서 활약한다. 즉 명나라때의 와랄(瓦剌, 오이라트)지역이다.
이수데르는 1358년 서위랍특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아릭부케의 실패에 대해 가슴아파한다. 1368년, 명군이 북벌하자, 원나라는 북으로 도망친다. 10살된 이수데르는 여전히 숨어서 역량을 축적하고 있었으며, 서위랍특에 대한 지배를 강화했다. 포어아해의 전투에 이르러 북원은 패배했고, 북원조정내부의 여러 귀족들은 반기를 들 생각을 하게 된다. 1388년, 명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친 원익종이 부대를 끌어모아 카라코룸(외몽골 후항애성)으로 도망친다. 이수데르는 그 기회를 틈타 반드시 지나갈 길에 매복을 설치하고, 토랍하(土拉河)에서 원익종의 군대를 기습한다. 수행하던 추밀원지원 네체라이는 포위망을 뚫고 카라코룸으로 도망치는데 성공하고, 카라코룸의 영주에게 군대를 출동시켜달라고 하여 원익종을 구해낸다. 두 군대를 합친 후, 원익종은 카라코룸을 버리고 다시 서쪽으로 도망쳐서 금산(金山, 알타이산)의 영주에게 가려고 했다. 그러나, 큰 눈으로 길이 막혀 가지 못하고, 이수데르는 다시 원익종을 기습한다. 원익종은 포로로 잡혔고, 이수데르는 활로 그를 교살하도록 명한다. 함께 죽은 것은 태자 천보노가 있다. 이수데르는 황제의 금인을 빼앗아 스스로 황제에 등극한다. 마침내 아릭부케(1264년 투항)의 실패후 124년이 지난 후에 아릭부케의 자손이 몽골인의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른 것이다.
4. 북원멸망
황금가족 혈통과 원나라황제의 금인을 가지고, 이수데르는 한때 초원의 패주가 된다. 다만 이수데르의 등극은 몽골에 큰 악영향을 남기게 된다.
먼저, 쿠빌라이자손의 원나라황실은 통치핵심을 동몽골초원일대에 두었다; 그러나 아릭부케의 자손은 서쪽에 치우쳐 있었다. 원익종이 죽은 후, 이수데르가 즉위하면서 몽골의 통치핵심은 서쪽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리하여 점차 중원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아릭부케의 자손은 본민족주의자로 한문화를 적대시한다. 그리하여 이수데르가 등극한 후, 북원조정은 선진적인 한문화를 신속히 버리게 된다. 이는 몽골에 있어서 문화의 도퇴이다.
다음으로, 북원조정의 멸망을 가속화시켰다. 오이라트(瓦剌)와 타타르(韃靼)로 분열된다. 망명조정으로서, 원순제 토곤테무르이건, 원혜종 아유르시리다르이건 아니면 원익종 토구스테무르이건 모두 원(元)을 국호로 삼았다. 이는 자신의 중원통치의 정통성을 표시하는 것이고, 중원의 지배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의도는 다시 중원으로 쳐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명나라초기의 역사는 실질적으로 남송북료식의 국면이라 라할 수 있다. 다만, 이수데르의 시군은 북원왕정의 쇠약을 가져왔다. 이수데르는 4년간 재위하는데, 북원의 국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서몽골 오이라트출신이므로 당시 북원조정은 모조리 오이라트부족을 기용한다. 그리하여 북원의 분열에 화근을 심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수데르가 이미 북원이라는 국호를 포기했다고 말한다. 다만 내몽골대학 교수인 격일륵도(格日勒圖)의 고증에 따르면 이수데르와 그의 아들 엥크(恩克)시기에 북원국호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수데르는 재위4년후 죽었고, 그의 아들 엥크가 즉위하여 7년간 재위한다. 1399년 권신 굴리치(鬼力赤, 兀格赤 哈什哈)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아릭부계후손의 황위는 끝이 난다. 이수데르시기에 탈한화조치를 취하여, 1402년, 정권을 장악한 굴리치는 북원 국호를 폐지하고, 명나라에 책봉을 요청한다. 명나라는 많은 영주들에게 책봉을 내려, 서로 도발하게 하는 원칙을 취하고 있어, 초원의 강력한 영주들을 속속 왕에 봉한다. 이렇게 하여 몽골초원은 분열되어버린다.
결론
명나라때 영왕계열의 번왕은 백년간 조용히 지내다가 명무종시기에 이르러, 주신호가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가볍게 진압되었다. 원나라때의 아릭부케 게열도 백년간 조용히 지내다가 반란을 일으켜 성공을 거둔다. 어쨌든 두 사람의 실제상황은 달랐다. 명나라는 번왕에 대하여 엄격하게 '번금(藩禁)'정책을 실시하여 영왕은 병력이 없었고, 권한도 없었다. 그리고 명나라사람들은 천명정통을 신봉하여 영왕의 반란은 민심을 얻지도 못했다. 그러나, 원나라는 번왕에 관대했고, 각 번왕은 모두 돈과 병력을 가진 실권자들이었다. 그리고 유목부족은 강자를 따른다. 이런 상황하에서 이수데르가 시군하는 것도 순리에 맞는 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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