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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원)

동문병(董文炳): 쿠빌라이가 형님으로 부른 한족...

by 중은우시 2024. 6. 20.

글: 자귤(紫橘)

고등학교 교과서에 따르면 원나라는 4등인제도(四等人制度)를 실행했다. 그러나 실제상 이 4등인이 각족의 고위층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고, 이는 일반인에 대한 제한이었다. 그리고 이 사등인제가 정식의 제도였는지 아닌지에 대하여도 의문이 있다. 1등인인 몽골인의 하층은 모두 착취를 당했고, 그들도 원나라에 원한을 가졌다. 그래서 명나라초기의 삼천영(三千营), 대내()의 등양사위(腾骧四卫)는 모두 몽골인이었고, 매번 초원을 토벌할 때 그들이 가장 앞장섰다. 마찬가지로 3등인 한인의 고위층도 호화사치스럽게 살았고, 원나라황제의 신임과 존경을 받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쿠빌라이가 '동대가(董大哥, 대가는 큰형님이라는 의미임)'로 부른 동문병이다.

  1. 농민에서 관료로

동문병의 동씨집안은 금()나라때 하북 고성(藁城)의 농민이었고, 사회의 하층에서 생활했다. "힘을 감추고 농사를 지었다." "농민으로 숨어살며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족보상으로 확인을 해볼 수가 없어, 조상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그의 집안은 금선종(金宣宗)시기에 돌연 굴기한다. 당시 전국이 몽골의 침입에 시달렸는데, 몽골에 대항하기 위하여, 금나라는 각지에 단련(团练)을 조직하도록 명을 내린다. 1215년, 고성현령 유성(刘成)이 단련두목을 선발하는데, 오직 동씨집안의 가주인 동준(董俊)만이 무력시험에 합격했다. 그리하여 동준은 고성 제1지단련병의 두목이 된다. 다만 몽골의 공세가 맹렬했고, 같은 해 그는 고성현령 유성과 함께 몽골에 투항한다. 이때 몽골은 중원에 아무런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동준, 유성같이 초기에 투항해온 자들을 중용할 수밖에 없었다. 1219년, 동준은 중산지부(中山知府)로 발탁되고, 금부(金虎符)를 받아 일거에 신분상승을 이룬다.

당시 금나라의 장수 무선(武仙)이 진정(真定)을 점거하고 있어서, 하북의 위협이 되었다. 동준은 군대를 이끌고 진정을 야습하여, 무선을 쫓아내고, 하북의 안정을 되찾는다. 그는 이로 인하여 용호위상장군(龙虎卫上将军)에 봉해지고, 고성에 주둔한다. 용호위상장군은 금나라의 무신들 중 최고의 계급으로 정삼품(正三品)에 이른다. 일개 농민출신인 그가 몽골인들에게 이토록 높이 평가받은 것은 몽골인들이 그를 회유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연 동준은 몽골에 죽기살기로 충성했고,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전투에 참가한다.

동문병은 바로 동준의 아들이다. 그는 1217년 고성에서 태어났다. 이때 동준은 이미 몽골에 귀순한 이후였고,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몽골국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동문병이 출생했을 때, 동씨집안은 이미 농민출신을 벗어나, 관료집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동문병은 어려서부터 귀족교육을 받는다. 16살때(1233년), 동준은 원태종(元太宗) 오고타이를 따라 금나라를 정벌하는데 참가했다가 하남 귀덕(归德)에서 전사한다. 충신의 후예로서 동문병은 고성현령이 된다. 그러나, 지방호족에 대한 세금부과문제로 인하여 관직을 버리고 떠나게 된다.

2. 동씨집안의 굴기

동씨집안은 동문병이 태어나기 전에는 두드러진 점이 없었다. 특히 동문병의 부친이 죽고난 후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고, 몽골황제와 관계를 맺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다만, 동씨집안의 장점은 대대로 고성에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고성은 진정에서 16리 떨어져 있었고, 자고이래로 진정을 지키는데 중요한 지방이었다. 그리고 진정은 톨루이의 봉지(封地)이다. 또한 고위관료 사천택(史天泽)이 지키는 곳이기도 했다. 몽골은 케식제(怯薛制)를 실행했다. 즉 몽골통치자가 중신집안의 자제를 선발하여 통치자의 친위병으로 임명하여 호위부관으로 삼는 것이다. 케식으로 선발된다는 것은 귀인의 앞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건 하나의 행운이다. 몽골의 제3대칸인 구유크칸이 죽은 후, 칸의 자리는 톨루이의 아들인 몽케의 수중에 들어간다. 당시의 몽케는 하루빨리 자신의 심복을 키우기 위해 톨루이의 봉지에서 사는 사람들을 케식으로 대량 선발한다. 케식제 하에서, 동씨집안은 자연스럽게 몽골고위층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동씨집안의 진정한 굴기는 바로 케식으로 선발된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동문병은 상등인의 맛을 본 이후였기 때문에 다시 관직을 버리고 평민으로 돌아간 후 살아가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동문병은 다른 아이디어를 구상한다. 관직을 버린 후, 그는 가장 학식이 있던 동생 동문용(董文用)을 화림(和林)으로 보내 톨루이의 처이며, 몽케의 모친인 태후 소르칵타니를 알현하게 한다. 동문용은 말을 잘하여 소르칵타니의 환심을 산다. 그리하여 동문용은 쿠빌라이에게 보내어지게 된다. 1252년, 동문병은 다시 가장 어린 동생인 동문충(董文忠)을 쿠빌라이저택으로 보낸다. 동문충은 환관처럼 쿠빌라이를 아주 편안하게 모셨다. "한밤중에 필요한 일이 있을 때면, 촛불을 찾지 않아도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이렇게 세심하게 쿠빌라이를 모신 덕분이 동문충은 쿠빌라이 케식의 두목이 된다. 두 동생 덕분에 동문병은 몽골고위층의 소식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3. 쿠빌라이의 심복이 되다.

1252년, 몽케는 쿠빌라이에게 대리(大理)를 정벌하도록 명한다. 쿠빌라이는 즉시 남정을 위한 막부를 구성한다. 이는 쿠빌라이가 최초로 군대를 독자적으로 지휘하는 것이어서, 반드시 상세하게 계획하고 준비해야 했다. 쿠빌라이의 저택에 있던 케식들은 모두 동원된다. 동문용, 동문충 두 형제는 "양식과 장비를 준비하고, 군사업무를 기획"하는 것을 책임졌다. 그들은 번잡한 군수조달업무를 수행한다. 두 형제는 바로 형인 동문병에게 소식을 알리고 ,동문병에게 충성을 보일 준비를 하도록 한다.

1253년 8월, 쿠빌라이의 대군이 정벌에 나서, 감숙 임조(临洮)에 도착한다. 동문병은 즉시 집안의 사내 47명을 이끌고 하북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행군하여 쿠빌라이군에 가담한다. <원사>에 따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인도로 가서 불경을 가져온 당나라의 삼장법사처럼, 산넘고 물건너며 온갖 고생을 다해가면서 대리에 이르렀을 때 사람과 말이 많이 죽고 가솔중에서는 오직 2명만이 남았다. 배고프면 말을 잡아먹고, 목마르면 더러운 물을 그대로 마셨다. 이런 고생을 겪으면서 쿠빌라이군을 쫓아간다. 쿠빌라이는 이렇게 충성스러운 자가 있다는 것에 놀란다. 스스로 군량을 준비하여 자신에게 오다니. 쿠빌라이는 동문병을 즉시 군장(军将)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아래에서 일하게 한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처음부터 동문병을 신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에게 공사업무나 군수업무를 맡길 뿐이었다. 동문병은 소처럼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몇년간 그렇게 일을 하다보니 마침내 빛이 드러나게 된다.

1258년, 몽골이 송을 공격한다. 쿠빌라이는 중군(中军)을 이끌고 악주(鄂州)를 공격했다. 동씨삼형제도 종군한다. 9월, 몽골군과 송군이 장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송군은 수전에 능했고, 병력이 10만, 전선이 2천척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날씨가 좋지 않았으므로, 쿠빌라이의 수하 군장들은 대부분 장강을 건너지 말 것을 주장한다. 오직 동문병만이 스스로 나서서 건너겠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송군은 오직 장강을 믿고 있다. 그들은 반드시 장강을 엄히 사수할 것이다. 그래서 그 기세를 빼앗지 않으면 안된다. 반드시 장강을 무너뜨려야 송군의 군심과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러면서 "신이 먼저 나서서 한번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후 동씨삼형제는 결사대 수십명을 모집한 후, 쾌속선을 타고 선봉이 된다. 그들은 장강을 건너가 송군을 궤멸시키고 호황주(浒黄州)를 빼앗는다. 쿠빌라이는 그 틈을 타서 악주를 포위한다. 동씨삼형제는 이 전투로 명성을 떨친다. 특히 동문병은 항우, 여포같은 전신으로 떠받들어진다.

허황주전투이후 동문병의 지위는 급속히 상승한다. 1259년, 동문병은 친위주수(亲卫主帅, 친위대총사령관)가 되어, 쿠빌라이를 따라 아릭부케를 토벌하러 나선다. 쿠빌라이가 등극하여 원나라로 국명을 고친 후, 동문병은 명을 받아 어전시위친군을 조직한다. 이는 원나라황제 휘하에 최초로 만드어진 한족 어림군(御林军)이다.

1261년, 쿠빌라이의 신임을 받던 산동군벌 이단(李璮)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은 몽골귀족들에게 아주 큰 놀라움을 가져다 주었고, 그 이후 한족은 더 이상 신임받지 못하게 된다. 한족관료의 원나라조정에서의 지위는 급격히 하락한다. 그후 쿠빌라이는 삭번을 하며, 이단과 유사한 군벌들의 권력을 모조리 박탈한다. 이들 군벌을 역사에서는 세후(世侯)라 부른다. 유일하게 박탈당하지 않은 것이 동씨집안이다. 동문병은 여전히 진무사(镇抚使)로 임명되어 산동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리고 동문병은 쿠빌라이의 삭번정책을 집행한 주요인물이기도 했다. "그에게 위임하여 전권을 주고 처리하게 했다."

1266년, 동문병은 2만호가 되어 오래된 세후 사천택의 부대를 접수한다. 그리고 사씨집안의 권력을 대체한다. 이를 보면 동문병은 이미 쿠빌라이의 절대심복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쿠빌라이는 그에게 아주 친근하게 '동대가'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런 말까지 한다: "짐의 마음을 문병은 안다. 그리고 문병의 마음도 짐이 안다."

4. 한족신하중 으뜸.

1274년, 원나라는 송을 멸망시키는 전쟁을 개시한다. 동문병은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다. 그가 이끄는 부대는 파죽지세로 정양(正阳)에서 안경(安庆)으로 쳐들어간다. 그렇게 송나라장수 범문호(范文虎)를 항복하게 만든다. 그후 연이어 당도(当涂), 채석(采石)을 연파한다. 1275년 3월에는 남경을 점령하고, 진강(镇江)에 주둔한다. 진강에서 그는 또한 장세걸(张世杰), 손호신(孙虎臣)의 수군에 대승을 거둔다. 송나라에서 유일하게 잘하던 수군의 우세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제 송나라군대는 거의 전멸했다. 10월, 원군이 임안(临安)을 포위하고, 동문병은 좌로를 맡아 강음(江阴)에서 출발해 바다로 나간다. 송나라황제가 바다로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당시의 송공제(宋恭宗) 조현(赵㬎)은 갈 곳이 없어 결국 성문을 열고 투항하게 된다.

원군의 주력은 송나라황제를 붙잡아 북상한다. 그후 쿠빌라이는 동문병으로 하여금 임안에 주둔하며 지키도록 명한다. 동문병은 가만히 있지 않고, 남하하여 송군의 잔여세력을 소탕한다. 그는 절강에서 남하하여, 태주, 온주, 장주, 천주, 건녕, 소무를 연이어 함락시킨다.

1277년, 쿠빌라이는 여러 공신들을 조정으로 돌아오게 명한다. 조정에서는 좌석의 서열을 정리하는데, 동문병은 "총수(总帅, 총사령관) 왕양신(汪良臣), 우승(右丞) 여문환(吕文焕), 좌승(左丞) 하귀(夏贵) 및 여러 시위장군의 위"에 앉는다. 한족장수중 으뜸이 된 것이다.

결론

어떤 사람은 동문병이 매국노, 이신(贰臣, 두 나라를 섬긴 신하)라고 말한다. 다만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몽골인이었고, 그가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모두 자신의 국가를 위해 일한 것이다. 비록 원나라때 4등인제도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동문병같은 고위관료는 살아있을 때에도 그 지위가 황실친척들에 비견할 만했고, 쿠빌라이마저도 그를 '동대가'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가 죽은 후에도 동씨집안은 여전히 휘황했다. 쿠빌라이이후 원성종(元成宗) 테무르(铁穆耳)도 할아버지 쿠빌라이를 본받아, 동문병의 차남 동사선(董士选)을 '동이가(董二哥)'라고 불렀다. 이를 보면 동씨집안이 원나라조정에서 어떤 지위를 지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