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귤(紫橘)
TV드라마 <홍설(紅雪)>에 나오는 유로(劉路)가 매국노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일본국적을 취득한 일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대화민족(大和民族)이 아니다보니, 일본인들은 그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원(元)나라때의 한족 세후(世侯)집단도 독특한 존재였다. 그들은 혈통적으로 한족이지만, 그들은 내심이나 정신적으로 몽골인이었다. 정치적인 대우에서, 몽골인들은 그들에게 한 지방의 군정대권을 쥘 수 있도록 해주고, 대대로 세습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들 세후(世侯)중 우두머리는 유흑마이다. 그의 가족은 가장 먼저 몽골에 귀순한 한족이고, 계속하여 몽골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이단(李璮)의 난은 양자간의 친밀한 관계를 가볍게 박살내버린다.
- 유흑마가 원에 귀순하다.
유흑마의 가족은 제남(濟南)출신이다. 유씨집안의 후손들은 조상이 성공한 길을 거슬러 추억할 때, 금나라때의 제남사람 유백림(劉柏林)을 떠올린다. <원사>의 기록에 따르면, 유백림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고, 금나라의 위녕성(威寧城)을 방어하는 천호(千戶)였다. 1212년 징기스칸이 위녕을 공격할 때, 유백림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고 즉시 투항한다. 그후 1221년에 사망할 때까지, 몽골을 위해 일한다. 군대를 이끌고, 산서, 하복을 전전하며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운다. 그는 충성스럽기 그지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죽은 후, 몽골칸은 그에게 충순(忠順)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통상적인 견해대로라면 유흑마는 유백림의 아들이다. 그러나, 유흑마의 가족묘지를 발굴하면서, 유흑마의 묘지명을 연구한 결과, 유백림의 아들은 유시(劉時)이고, 유시는 바로 유흑마의 부친이다. "부친의 이름은 시(時)이고, 은거하여 벼슬을 하지 않았다." 유시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몽골이 쳐들어올 때는 이미 죽었다. 유시의 아들 유흑마는 1199년에 출생한다. 원래 이름은 유의(劉嶷)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가 태어났을 때, 집안의 백마가 흑마를 낳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명을 흑마로 지었다는 것이다. 12살때 유흑마는 조부를 따라 몽골에 투항하고, 그후 몽골군에서 일한다.
2. 한인수령(漢人首領)
북방의 한족은 몽골이 남하하여 금, 서하, 대리, 남송등 여러 나라를 공격할 때, 큰 역할을 한다. 이들 북방의 한족들의 공로에 보답하기 위하여, 1299년 오고타이는 3개의 한인만호(漢人萬戶) 직위를 설치한다. 만호라는 관직은 몽골의 군대내에서 최고위직이라 할 수 있다. 명효종, 명무종때, 달연칸(達延汗)이 몽골을 통일한 후, 몽골을 6개의 만호로 나눈다. 그리고 그 자신이 3개의 만호를 이끌고, 나머지 3개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가장 지위가 높은 달연칸이 3개의 만호를 받을 정도이면, 만호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299년에 분봉하면서, 유흑마에게 "수금호부(授金虎符), 충관파평양선덕등로관군만호(充管把平陽宣德等路管軍萬戶), 잉첨태부부사(仍僉太傅府事), 총관한군(總管漢軍)"에 봉한다. 이 관직에서 오고타이는 평양, 선덕 양로의 군정재정대권을 모조리 유흑마에게 주었다.이 두 곳에서 유흑마는 서주시기의 제후와 같은 지위를 누린다. 게다가 그는 한군을 총관한다. 즉 한군의 총사령관이다. 원칙적으로 모든 한족은 그의 부하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유흑마는 몽골휘하의 최고위직 한족이라고.
<원사>의 기록에 따르면, 오고타이는 유흑마에게 "순무천하(巡撫天下)" "찰민이폐(察民利弊)"의 대권을 수여했다. 그리고 1299년의 분봉은 원나라때 세후집단의 형성을 의미하는 중요한 표지이다. 그후 몽골은 한인만호를 7명까지 증가시킨다. 그러나 여전히 유흑마가 우두머리였다. 1241년, 유흑마는 "통서경하동섬서제군만호(統西京河東陝西諸軍萬戶)"로 승격된다. 1257년 몽케를 따라 사천지방을 공격하고, 그는 같은 해 성도를 함락시킨다. 그리하여, 송군은 사천동부와 중경으로 압축된다. 몽케는 크게 기뻐하며 유흑마에게 몽골명 "야가독립(也可禿立)"을 내리고, 그를 성도로군민경략사(成都路軍民經略使)에 봉하고, 사천을 점령한 후에 전체 사천을 유흑마에게 내주고 대대로 세습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몽케가 조어성에서 죽어버리고, 사천도 차지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유흑마가 사천을 통치하는 일은 흐지부지되고 만다. 1261년 유흑마가 사망하고, 원나라조정은 그를 태부(太傅), 진국공(秦國公)에 추봉한다.
3. 유흑마는 왜 신임을 받았을까?
왜 유흑마는 몽골의 신임을 받았을까? 관건은 두 가지이다:
첫째, 충성심과 능력이다. 만일 1299년 오고타이가 분봉할때의 상황을 분석해보면, 유흑마보다 조건이 좋은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하북, 산동, 산서등지의 지주호강은 수도 없이 많았는데, 유흑마가 최고의 위치를 점한다. 그 이유는 그가 능력도 뛰어나며, 충성심도 강했기 때문이다.
충성심방면에서, 금나라는 유백림, 유흑마가 몽골에 투항한 후, 밀사를 보내여 그들을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를 거절하고, 밀사를 체포한 후 징기스칸에게 보낸다. 이를 통해 원나라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 표명한다. 그리고 몽골에 충성스러운 것처럼 보였던 사천택(史天澤)도 기실 이단의 난때 이단과 결탁하여 유흑마일가처럼 원나라에 충성하지는 않았다.
능력방면에서, 유백림과 유흑마는 몽골에 국궁진췌(鞠躬盡瘁)했다고 할 수 있다. <원사>에 따르면, 1212년 징기스칸이 금나라의 서경인 대동(大同)을 공격할 때, 여러번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징기스칸은 화살을 맞아 할 수 없이 몽골군은 철수해야 했다. 그후 유백림이 병력을 이끌고 대동을 공격하였고, 여러 차례의 전투를 거쳐, 결국 대동을 점령해낸다. 이는 몽골인들로 하여금 창피하게 만들었고, 이때부터 유백림은 굴기하기 시작한다.
유흑마의 묘지명을 보면, 유흑마는 전사가 많기로 유명한 몽골군내에서도 용맹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항상 선봉에 섰으며, 조부를 따라 백여번이나 전투에 참가했고,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다. <원사>의 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그가 외지를 순찰할 때, 13명의 몽골군이 수백명의 금나라병사들에게 포위된 것을 보게 된다. 유흑마는 즉시 단기필마로 금군을 뚫고 들어가 몽골군을 구해낸다. 강자를 숭배하는 몽골에서, 유흑마의 행동은 당연히 몽골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 몽골칸은 갈수록 유흑마를 중시하게 된다. 그후 유흑마는 칸을 따라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전과정에 참여한다. 1234년 유흑마에게 옥대(玉帶), 수의(繡衣)를 하사하여 그의 공을 표창한다.
전공방면에서, 유흑마는 한족신분을 이용하여, 남송인들의 투항을 이끌어냈다.가장 유명한 것은 그가 유정(劉整)의 투항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유정은 원래 금나라의 하남명장이다. "침의유지모(沉毅有智謀), 선기사(善騎射)"(침중하고 강인하며 지모가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 나중에 송에 투항하여, 사천,섬서방면의 군사를 책임지고, 여러번 공을 세운다. "동천십오군주안무사(潼川十五軍州安撫使), 지로주군주사(知瀘州軍州事)"가 된다. 그러나 그는 남방의 장수들에게 질시를 받아 모함을 당해 진퇴양난의 입장이었다. 그때 유흑마가 그에게 투항을 권유하고, 결국 유정은 노주15현을 바치면서 몽골에 투항한다. 유정의 투항으로 남송의 사천에서의 방어선은 완전히 무너진다. 그리하여 사천의 함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유정은 몽골해군을 만든 사람이 되고, 몽골에 대한 공헌이 아주 컸다.
4. 자기 사람이 되다.
만일 이상의 공적은 단지 몽골이 사업을 이루는데 벽돌이나 기왓장을 더한 정도라면, 진정 몽골인이 유흑마를 자기 사람이라고 여기게 된 것은 역시 유흑마가족의 몽골화이다. 유흑마는 비록 한족혈통이지만, 전체 가족은 습관상이나 정신적으로 몽골화되었다. 먼저, 그들은 혈통을 '개선'하여, 몽골인과 통혼한다. 남송의 <몽달비록(蒙韃備錄)>에 따르면, 철목진(鐵木眞)의 서장자(庶長子) 오로적(烏魯赤)이 전사하자, 철목진은 오로적의 정실부인을 유백림가족에 시집보냈다고 되어 있다. 유흑마의 장남 유원진(劉元振)은 몽골맹장 학화상발도(郝和尙拔都)의 여동생과 결혼한다. 다음으로, 몽골성명으로 고친다. 유흑마 본인은 "야가독립"이라는 몽골이름을 하사받았고, 그는 이를 자랑으로 여긴다. 그의 가족은 후대로 갈수록 몽골화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의 세 아들은 이름이 각각 완자(完者), 탈탈(脫脫), 노노(奴奴)이고, 손자는 합적(哈赤), 만만(蠻蠻), 첩멸적(怗滅赤), 나속독(那速禿), 수동(壽童)이다.
유흑마는 대원의 건립에 국궁진췌한다. <원사>에 따르면, 1261년, 그는 노주를 포위공격할 때 중병에 걸린다. 그가 죽은 후에는 아들 유원진이 성도경락사를 맡는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사천의 군정대권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당나라때의 절도사와 같은 지위였다. 이를 보면 그의 집안권세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결론
유흑마는 몽골칸국에서 가장 권세가 컸단 한족이다. 당연히 유흑마는 사천에서 많은 일을 한다.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사천에 들어간 후 백성들을 위해 않은 선행을 베풀었다고 한다. 명나라떄 편찬된 <사천총지>에 따르면, 유흑마가 성도를 지키는 동안에 "군령이 엄명했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사당을 사마교(駟馬橋)의 왼쪽에 짓고 제사지냈다" 그러나, 이단의 난이 발생하자, 원나라조정은 삭번을 시작한다. 이들 한인세후들은 정도는 다르지만 모두 타격을 입는다. 유흑마의 가족도 쇠퇴하기 시작하고, 원나라때 유씨집안에 관한 사적은 점점 듣기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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