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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의학

근대 북경의 "무상의료"

by 중은우시 2024. 6. 24.

글: 북경시당안관(北京市档案馆)

무상의료는 의료개혁 내지 전체사회에 대하여 논의되는 핫이슈이다. 현재, 전국민무상의료이건 심지어 특정저소득계층에 대한 무상의료이건 모두 실현이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근대북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무상의료는 일찌기 특정한 형식으로 한동안 존속했었다.

  1. 무상의료의 창설

청나라말기이전에, 북경사람들이 병에 걸리면 의사의 집을 찾아가거나 혹은 개설된 병원을 찾았다. 돈있는 집안에서는 의사를 집으로 부르기도 했다. 청나라조정에서 설치한 태의원(太医院)은 규모가 상당히 컸다. 그러나 주로 황실과 고관을 위한 것이었고, 보통민중들은 혜택을 보기 어려웠다. 일반 평민들에 대하여 정부는 전문적인 관립의료기구를 설치해주지 않았다. 일부 사회의 자선조직이 자선의료를 행했지만, 대부분 환과고독(鳏寡孤独, 홀아비, 과부, 고아등)에 대한 것이고, 대부분은 임시적인 성격이었다.

청나라말기, 정부는 내우외환에 시달렸고, '신정(新政)'개혁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당시, 신정의 추진자들은 "나라를 세우려면 백성이 강해지는 것이 근본이고, 백성이 강해지려면 의료를 중시하는 것이 우선이다(立国以强民为本,而强民以重医为先)"라는 생각을 가졌다. 중국전통의 중의(中医)는 널리 보급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었다. 그래서 서방에서 배우기로 하여, 병원을 설립해서 중의,서의를 모두 겸비하게 하여, "각각의 장점을 취하고, 실질적인 혜택을 보게 한다(各具专长,同收实益)". 1906년 8월, 청나라조정은 내성관의원(内城官医院)을 설립한다. 위치는 동성전랑후퉁(东城钱粮胡同)에 있었따. 내성관의원을 설치한 후 효과가 좋았으므로, 1908년 6월, 민정부(民政部)는 다시 주청을 올려, 외성 선무문(宣武门) 바깥의 양가원(梁家园)에 외성관의원(外城官医院)을 설치하자고 한다. 이는 공인된 북경 최초의 근대관립병원이다. 내,외성관의원이 설립된 초창기에는 민정부에서 관할했다. 1910년에는 북경지방경찰기구 내, 외성순경총청이 각각 나누어 관할했고, 1913년 1월 합병후에는 경사경찰청(京师警察厅)이 인수했다.

내,외성관의원은 중국의 관립병원 무상의료의 선구자가 된다. 최대의 특징은 더 이상 황실귀족을 상대하지 않고, 일반민중을 상대한다는 것이며, 더더욱 많은 빈민에 치중했다는 것이다. 1910년 내,외순경총청이 각각 관할하고난 후, 두 청은 공동으로 <내외성관의원장정(内外城官医院章程)>을 제정하는데, 제1조에 "본원은 민정부가 주청을 올려 설립한 것으로 순수한 관립성격이며, 병원에 와서 치료받는 모든 사람에게 비용을 받지 않는다. 오직 입원치료하는 자들은 식비를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 즉, 내,외성관의원은 관청에서 운영하는 것이고, 민중들이 병원에 오면 모두 무상으로 치료를 받았다는 것이다.

모든 일반민중, 여성과 아동을 포함하여, 모두 내,외성관의원에서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었다. 진단외에, 관의원은 입원환자도 받았다. 규정에 따라 식비는 환자 본인이 부담했고, 특수한 경우에는 경찰기구에서 일부 환자의 숙비를 부담해주기도 했다. 입원중 사망하는 환자에 대하여는 경찰청과 주치의가 확인한 후, 가족에게 넘겨주어 매장하도록 했다. 만일 가족이 없으면, 병원에서 경찰청에 보고한 후, 관을

내주어 외성의 묘지에 매장했고, 표지를 세워 식별할 수 있게 했다. 이 점은 전통적인 자선기구가 매장할 돈이 없는 빈민민중들에게 관을 지원해주던 것과 유사했다.

경비는 내,외성관의원운영의 가장 중요한 기초이다. 관청에서 운용하는 것이고 자선적인 성격이 있으므로, 필요한 경비, 약품은 모조리 정부가 부담했다. 국내외에서 각종 중,서의료제품을 구매할 때는 각성의 세무기관에서 모두 면세로 처리해주었다. 규정에 따르면, 내,외성관의원의 경비는 매월 경사경찰청에 신청하고, 내무부에서 지급받으며, 월말에는 예산결산내역을 보고한다. 그리고 상세하게 경사경찰청을 거쳐 내무부에 보고한다. 민국초기 몇년간, 내,외성관의원의 매월 경비예산은 각각 2,000위안으로 각원의 매년 예산은 24,000위안이었다. 실제로, 진료받는 환자수의 증가와 물가의 인상으로 원래의 경비로는 비용충당이 힘들어졌다. 1917년에, 내성관의원의 일년 실제경비는 30,974위안, 외성관의원의 실제경비는 29,960위안으로 증가했다. 1922년에 이르러, 내,외성관의원의 경비는 다시 늘어나서 1월에 재정부가 내,외성관의원에 지급한 현금과 태환권은 각각 2,935위안이었다.

2. 무상의료시행의 효과

내,외성관의원은 설립때부터 아주 좋은 효과를 거둔다. 통계에 따르면, 1906년 내성관의원이 최초로 개설된 5달동안, 환자가 3,4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서세창(徐世昌)은 이런 말을 했다: "여론을 들어보면 모두 말하기를 약방이 신중하고, 약을 잘 쓰며,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어,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완치되는 사람이 많다. 진료받은 사람들의 말이 증명한다. 치료효과가 빠르다고. 그리고 신문에 감사인사를 올린 사람도 있다. 이 병원은 개설한 이래로 효과가 실질적으로 나타나는 상황이다." 진료환자수는 계속 증가했다. 1907년에는 가을 3달 동안 내성관의원으로 와서 진료받은 사람이 이미 30,700명에 달했다. 내성관의원의 치료효과가 두드러졌기 때문에, "매분기 진료받으러 오는 사람이 수만을 넘었다." "무릇 내성의 상인, 민중들은 모두 널리 치료를 받을 수 있어, 기뻐했다." 그러나 광활한 외성은 내성과 거리가 비교적 멀어, 질병에 걸린 환자가 내성관의원까지 와서 치료받기 불편했다. 그래서 매년 봄여름환전기가 되면 외성의 환자가 더욱 많아졌고, 그리하여, 1908년 민정부가 다시 외성관의원을 설치하자고 주청을 올리게 된 것이다.

외성관의원이 개설된 후, 두곳의 관의원이 하나는 내성, 하나는 외성에 있어, 공동으로 민중을 치료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1908년 6월, 내,외성관의원의 매분기 진료환자수는 모두 수만명에 이른다. 1909년의 한해 진료받은 환자수는 더더욱 288,467명에 이른다. 그해 북경 내,외성의 총인구는 80만에 못미쳤다. 이를 보면, 진료받는 사람의 비율이 아주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당시의 민중들은 외성관의원이 설립되자, "위생에 큰 편익을 주었고, 사람들마다 편리하다고 말했다."

민국이후, 여러 공,사립병원이 건립되면서, 환자들이 분산되기 시작한다. 내,외성관의원의 매달 진료환자수는 청나라말기보다 약간 하락한다. 그러나 민중의 수요에 부합하기 위하여, 내,외성관의원에는 여러 의료종류를 개설한다. 1918냔 5월의 진료통계를 보면, 내과 4,217명, 외과 2,794명, 부인과 2,182명, 소아과 2,141명, 안과 569명, 이과(耳科) 275명, 후과(喉科) 115명, 화류과(花柳科) 97명, 모두 12,390명이었다. 이를 통해 추측해보면, 1년에 여전히 10만명가량의 민중이 치료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 숫자는 북경의 빈곤인구비율과 비슷하다. 무상의료를 실시했기 때문에, 빈곤민중들이 가장 많은 혜택을 입었다. 그래서 당시의 신문에서는 "수년이 지나면서 빈민들이 아주 좋다고 여긴다"고 평가했다.

북양정부후기, 재정이 곤란해지면서, 정부의 여러기구 운영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도 당국은 무상의료를 아주 중시했고, 내,외성관의원은 1927년 8월 합병될때까지 시국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았다. 진료받으러 오는 환자수도 안정적인 숫자를 유지했다. 예를 들어, 1927년 3월 3일, 내,외성관의원의 중의,서의 합계 595명의 환자를 진료했고, 3월 30일에는 합계 586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3. 무상의료의 발전

1914년 경도시정공소(京都市政公所)가 성립된다. "시내의 빈민민중이 질병에 걸려도 진료받고 약을 구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 공립의원을 확충할 것이다." 그리하여 1916년 향창(香厂)에 인민의원(仁民医院)을 설립한다. 그러나 1917년 5월 사고로 운영이 중단된다. 진료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진료여건도 개선했다. 경사경찰청은 인민의원의 부지를 잠시 빌려 외성관의원과 서의진찰소(西医诊察所)를 확장한다. 모든 의약은 '돈을 받지 않았고, 병든 빈민들을 구휼했다.' 이로 인하여, 외성관의원은 점차 선무문밖의 양가원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내,외성관의원에서 무상의료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빈민이 병으로 치료를 받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이 의원으로 와서 진료와 치료를 받았다.' 1927년 8월 경사경철창은 경비를 절감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내성관의원을 외성으로 합치게 된다. 다만 성내외의 빈민들이 아주 많다는 점을 고려하여, "일단 이 병을 진료하는 장소가 사라지면 아주 불판하다고 여길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시정공소의 도움하에 다시 내성관의원을 옛부지에서 다시 연다.

1928년 6월, 북평특별시정부가 성립된다. 그 아래에 8개의 직능분국이 설치되는데, 경사경찰청은 공안국(公安局)으로 개칭된다. 원래의 위생행정직능의 대부분은 위생국(卫生局)으로 이전된다. 위생국은 여러 변화를 거쳐 1933년 위생처(卫生处)를 성립한 후, 내,외성관의원을 시립병원으로 개조한다. 그리고 원래 향창의 외성관의원부지에서 업무를 보는 외에 동교(东郊), 서교(西郊), 남교(南郊), 북교(北郊), 북성(北城), 내성(内城)의 6개 진료소와 기녀검치소(妓女检治所)를 설치한다. 시립의원이 개설된후의 8개월간, 환자수는 일일 2,3백명에 달한다. 만일 각진료소까지 계산한다면 500명이상일 것이다. 1935년 7월부터 1936년 6월까지, 시립의원과 각 진료소는 모두 환자, 158,211명을 진료한다. 입원환자는 234명이었다.

시립의원으로 개조된 후, 내,외성관의원시절의 '비용을 일체 받지 않는다'는 정책은 지속되지 않았다. 1934년 5월부터, 모든 민중은 시립병원이건 각 진료소이건 진료, 입원에 각각 '비용은 압부해야' 했다. 다만, '가난한 자는 일부 혹은 전부를 면제해주었다.' 1940년 1월 1일, 다시 각종 비용징수정책을 수정하여, 병원에 보조금을 주어, 초진인 경우에는 1인당 등록비 1각()을 받고 재진인 경우에는 5푼()을 받았다. 특별등록에는 1위안, 월진료에는 1위안을 받았다. 수술비는 매회 1위안 내지 10위안을 받았고, X선은 회당 2위안을 받았으며, 치료는 1인당 5위안 내지 10위안이었다. 그후 모든 등록, 진료, 의약비는 계속 인상된다. 1949년 1월전에 초진, 재진, 특별진료등록비는 0.6위안, 0.4위안, 8위안으로 올랐다. 그리고 위생국은 각각 5위안, 4위안, 15위안으로 인상시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난한 환자에 대한 의료수술비는 여전히 반액 내지 전액감면해주었다. 시립의원으로 개조된 후, 보편적인 무상의료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고, 각종 진료, 의약비용이 계속 인상되었다. 그러나 빈민들에 대한 무상의료정책은 민국정부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주목할 점이라면, 빈민이 시립병원에서 무상의료혜택을 받으려면 반드시 관청에서 빈민이라는 증명을 발급받아야만 했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해당의원은 여러차례 이름을 바꾸는데(공농병의원, 만명의원등), 지금은 북경시 선무중의의원(宣武中医医院)이라 불린다.

근대의 무상의료는 당시 정부가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입국강민의 목표하에 시행한 '혜민선정(惠民善政)'이다. 비교적 강력한 자선구조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 개설은 서방의료정책을 본받았을 뿐아니라, 근대의료업계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더더욱 당국정부가 정치와 사회안정을 유지하겠다는 기초 위에서 출발한 '곡시구제(曲施救济), 혜지궁려(惠及穷黎)"의 정책이었다. 그 목적은 여전히 사상교화와 사회통제에 있었다. 다만 근대 북경의 빈민민중에 대해 시행한 무상의료는 민국이 끝날 때까지 시족되었고, 북경의 빈민들을 구제하는데 적극적인 작용을 발휘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