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흑야여명1(黑夜黎明1)
1994년의 일기
1994년의 왕후닝은 푸단대학(復旦大學)의 젊은 교수였다. 젊다는 것은 그가 아직 39살로 불혹이 나이에 접어들지 않았단 말이다. 다만 그의 당시 성취는 이미 대단했다. 푸단 심지어 상하이에서 유명했다. 비록 그러했지만, 왕후닝은 독서인같았고, 아직 유명인사같지는 않았다. 매일 강의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가끔 영화를 보고, TV드라마를 보고 심지어 전자게임까지 했다. 그가 자전그를 타고 90년대의 푸단대학 캠퍼스를 지나갈 때, 그는 조용히 학술문제를 생각했고, 그가 흥미를 느끼는 모든 것을 생각했다. 유독 1년후에 자신이 어디에 가 있을 것인지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왕후닝은 1994년에 일어난 일을 일기로 적고 <정치의 인생>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일기의 대다수는 심야에 쓴 것이다. 그는 자서(自序)에서 이렇게 썼다:
밤이 되면 모든 것이 조용해진다. 창밖에 반짝이는 가로등을 보면서 고요하게 나와 세계를 생각한다. 나의 행정업무와 학술연구중 미처 시간이 없어서 생각지 못했던 일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의미있는 것을 찾아내고, 약간의 자그마한 사상의 즐거움을 누린다.
<정치의 인생>을 읽어보면, 한 예지있는 친구가 매일의 업무, 생활, 생각을 얘기하면서 조그만치도 무료하거나 고민하는 것은 느낄 수 없다. 책은 다음 해에 출판되었다. 그것은 진실한 왕후닝을 보여준다. 박학다식한 학자, 마음이 평화로운 지자(智者), 이 해의 일기에서 왕후닝의 심후한 이론적 기반을 느껴볼 수 있다. 놀라운 독서량, 세상일을 통찰하는 사고와 조용하며 담백한 성격.
1994년의 왕후닝은 많은 일을 했다.
많은 책을 읽다.
일기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는 단어는 '새벽'이다. 왕후닝은 자주 새벽에 각종 서적을 읽었다. 개략 세어보아도 70여권이 나온다. 가장 많은 것은 전문저작이다. 또한 90년대초에 유행하던 소설도 있다. 왕후닝은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사고를 했다. 예를 들어,
그는 새벽에 <하나의 가장 신비한 전쟁>을 읽었다. "별로 잘 쓰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문필은 약간 웅장하지만, 평범한 가운데 신기한 점이 보이지 않고, 일부러 거창하게 쓴 것같다." 다만 그가 인정한 부분도 있었다: "역사사실은 가치가 있다."
그는 <사조영웅전>을 읽고서 싱가포르에서 김용 본인을 만났던 것을 기억했다. 무협소설은 "사람들에게 교묘한 구상과 대담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상상력은 과학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에 있어서 가치가 있다. 어떻게 기발한 아이디어를 낼 것인지, 원래 평범한 것에서 이군돌기(異軍突起)를 보는 것이야말로 창조성이다."
그는 <중국대역사>를 읽었다. 그리고 작가는 "중국수천년의 역사를 20만자도 되지 않는 글자로 썼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양귀비도 써놓은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대역사'가 아니라 '거시역사'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는 이 책이 중국역사에 대한 연구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고, 기본관점은 기록해두었다.
그도 당시 비교적 인기있던 새책을 읽기도 했다. 1993년 가평요(賈平凹)의 <폐도(廢都)>가 베스트셀러가 되자 유사한 소설이 시장에 넘쳐났다. 이들 소설에 대한 왕후닝의 평가는 높지 않았다. 특히 개략 뒤적여보고는 어느 정도 "모두 경제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장경제문제에 대하여 사고하기 시작한다.
왕후닝은 외국의 정기간행물과 신문을 자주 읽었다. 그리고 신속히 자신의 견해를 기록했다. 미국의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의 한 글을 읽고, 미국이 왜 결국 중국에 최혜국대우를 부여했는지의 과정을 분석했고. 그는 정치의 기술주의와 예술주의의 차이에 대하여 되돌아본다. 말은 간략했지만, 몇마디로 일을 명백하게 말했다.
수업, 저작과 회의참석
교수로서, 3가지 일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수업, 저작과 회의참석. 현재의 교수들은 세번째 일이 좀더 많을 것같다. 어떤 때는 왕후닝이 낮에 수업한 상황을 되돌아보았고, 학생들에게 무슨 책을 추천했고, 어느 학생의 어떤 견해가 비교적 신선했고, 어떤 학생의 어떤 논문이 비교적 뛰어났는지를 적었다. 그의 코멘트는 길지 않았으나, 소박한 힘이 있었다. 어떤 깨는 그가 저녁에 낮에 수업할 때의 생각을 다시 한번 되새기기도 했다.
왕후닝은 교수로서의 직업을 아주 사랑했다. 1994년의 왕후닝은 상하이시 10대엘리트로 표창받았다. 3월 10일의 일기에서 그는 당시 대회에서의 발언을 기록해 두었다:
나는 교수로서의 일을 사랑한다. 나도 학생을 사랑한다. 이런 사랑이 없다면, 좋은 교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학생을 교육하는 것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고 믿는다. 나의 인생의 최고경지는 여러 권의 좋은 책을 쓰고 여러 명의 좋은 학생을 교육하는 것이다.
수업외에 왕후닝은 대부분의 시간을 문제를 생각하고 글을 쓰는데 보냈다. 1994년, 그는 십여편의 글을 연이어 썼다. 예를 들어, <문화확장과 문화주권: 주권개념에 대한 도전>, <민주의 곤혹>, <혁명후사회의 정부>, <혁명후의 정부의 중국현대화에 대한 제2항 탐색>, <정치의 논리: 마르크스주의정치학원리>, <중국사회와 정치>, <시장발육과 권위기초: 정치자원의 보호와 개발>. 왕후닝은 복단대학 변론팀을 이끌고 전국에서 유명한 변론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게 했다. 그리하여 시간을 약간 들여 <사성설전계시록(獅城舌戰啓示錄)>을 창작하고 수정한다. 이번 변론과 이 작품은 그로 하여금 상당한 명성을 얻게 해준다.
그의 주요연구방향은 정치학이다. 많은 글은 정치체제개혁에 대한 것이었다. 왕후닝은 중국정치체제개혁의 가능한 방안도 고민했다. 다만 그는 서방의 정치개혁과정을 통찰했고, 아주 경계심을 가지고 이렇게 썼다:
하나의 사회가 장치구안(長治久安)하려면, 반드시 양호한 정치체제를 갖추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완비된 정치체제는 반드시 일정한 국정에 부합해야 한다. 반드시 일정한 사회에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 전소련, 동구의 일부국가가 해체된 후, 서방제도를 모방하였지만, 효과적인 정치체제를 형성하지 못하여 재난적인 결과를 가져왔고, 이는 사회의 진보와 안정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 해에 그는 여러번 출장도 가고, 타이완, 일본에서 온 학술방문단을 접대한다. 출장과 접대때 그는 학술상의 교류에 주목했을 뿐아니라, 국제사회의 중국에 대한 인식과 인상에도 주목했다.
30여세에 이미 정교수가 되고, 40세도 되지 않아 학과주임과 원장이 된 왕후닝은 자신의 학술연구와 영예에 대하여 보통사람을 뛰어넘는 이성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11월 20일의 일기에서 이렇게 쓴다: "진리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의 모든 창작과 발견이 어떤 영예를 가져다 주더라도, 동시에 새로운 창작과 발견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너에게 무엇을 잃게 만들더라도."
영화를 보고 오락을 한다.
왕후닝은 일기에서 영화를 본 것을 기록했고, 두 세마디 느낌을 적었다. 영화는 외국의 것이 많았다. 특히 프랑스영화가 많았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본과때 프랑스어를 공부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저녁에 그는 <ALIEN>이라는 영화를 보았고 중문으로 <이형(異形)>이라고 번역했다. 그는 흥취를 가지고 영화의 대체적인 내용을 적었다. 10월 19일 새벽 왕후닝은 <쉰들러리스트>를 보았다. 그를 깜짝 놀라게 한 부분은 '영화의 예술성과 기교성이 아니라 그것이 보여주는 인간성의 세계"였다.
그는 당시 유행하는 영화도 보았다. 1994년에 그는 개략 10여편의 영화를 보았다. 대단한 것은 <과파은(過把癮)>이라는 국산드라마가 일기에 두번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왕후닝은 이 드라마를 즐겨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드라마의 "남자와 여자의 갈등, 남편과 처의 갈등"에 대하여 그는 스스로 이렇게 이해했다: "어떤 때는 자애(自愛)의 갈등이 비록 자한(自恨)의 갈등처럼 심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가련한 것은 자애의 갈등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갈등 속에서 인생을 소모하게 된다. 사람들은 왕왕 애정이 원한을 가져온다는 것을 모른다. 이는 많은 비극이 발생하는 근본원인이다."
나중에 결말을 보고, 남녀주인공이 다시 결합하자, 왕후닝은 이렇게 탄식한다: "새벽에 <과파은>의 마지막 두 편을 보았다. 약간의 광명과 휘황이 오는 것을 보았다. 인생은 항상 뭐가뭔지모르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사회도 불완전하여 일부 완세불공(玩世不恭)하는 사람이 있다. 모든 것은 그런 것이 자연스럽고, 감동적이다. 비록 비범한 것은 없지만, 보통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활이다. 이것이 바로 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생명의 광명과 휘황이다."
2월 8일은 섣달그믐날이다. 왕후닝은 가족들과 함께 폭죽을 쏘았고, 연말연초의 감개가 있었다. 그후 그는 '대부옹(大富翁)'이라는 전자게임을 즐겼다. "한동안 놀면서, 땅도 사고, 주식투자도 했으며, 상가를 짓기도 했다. 결국은 파산했다. 망해서 '대노천(大老千)'이라는 사람이 되어 개에게 쫓겨서 도망치다가 구덩이에 빠졌다."
사고의 흥취
사고의 흥취는 왕후닝의 일기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는 어떤 때는 생활의 작은 일에서 흥취를 발견한다. 예를 들어 하루는 누군가 그에게 흑백의 점이 가득 찍힌 종이를 주었다. 그러면서 이것이 삼차원그림이라고 말했다. 그가 똑바로 들여다보았을 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모호하게 쳐다보았을 때 정말 삼차원그림이 나타났다. 그래서 그는 감탄한다: "사람은 왕왕 미혹된다. 정력을 집중할수록 미혹된다. 어떤 때는 약간 산만해지는 것이 오히려 명확해진다." 약간은 중국철학의 맛이 있다.
왕후닝은 자주 서점과 서시(書市)를 돌아다녔다. 그는 서적시장에서 학술저작의 판매량이 아주 적은 것을 발견했고, 그리하여 정신층면의 소비수요와 계층수입의 관계를 생각해보았다; 국제여자농구선수권전을 보고, 마지막에 중국여자농구팀이 호주팀에 1점차로 승리하는 것을 보고서 한 나라의 국민심리의 역량이 거대하다는 것을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식사를 내면서 털게를 먹었는데 한마리이 200위안이었다. 그런데 뭐 먹을 것도 없었다. 그는 다 먹고나서도 왜 이 털게가 200위안의 가치를 지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유행가 <동탁적니(同卓的你)>를 듣고는 "단지 그 역사를 막 지나온 사람만이 이렇게 깊이있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소년시대의 감정은 대개는 귀한 것이다. 왜냐하면 비교적 순결하기 때문이다."
왕후닝은 가끔 시도 쓰고, 정원을 산책했다. 혹은 높은 산을 올라가기도 했다. 어느날 산보할 때, 왕후닝은 정원의 과일나무에서 생기가 나고, 꽃이 활짝 핀 것을 본다. "이곳에서 산책하다면 사상에 깊이 빠질 수 있고, 멀리 생각할 수 있다." 그는 그리하여 시를 하나 쓰는데 그중 몇구는 이러하다:
남목옥중고인음(楠木屋中古人吟)
도화원외촌부행(桃花園外村夫行)
만수추창송신색(慢手推窓送晨色)
방지성신향남행(方知星辰向南行)
여름에 북대하로 가서 회의에 참석했을 때, 산해관에 오른다. 천하제일관에서 남아있는 역사를 느끼고 그는 시흥이 일어 시를 짓는다:
일관국문용두수(一關國門龍頭竪)
만리흉금갈암류(萬里胸襟碣巖留)
흉랑고래권패기(洶浪古來捲敗旗)
장성하일단해류(長城何日斷海流)
생활의 흥취는 여러 가지이다. 다만 주로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물질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것이다. 사고의 흥취는 정신적인 흥취이다. 그 의미는 사고하면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이런 흥취를 가지려면 문탁이 아주 높다고 할 수 있다.
화평양무한천기(和平養無限天機)
왕후닝은 학술연구에 주력하면서, 현실생활 자체도 주목했다. 그도 생활에서 각양각색의 사람이 있다는 것이 감탄하며, 각양각색의 성격과 생명의 상태를 보면서 또 생각하게 된다:
생활은 이 세계이사람에게; 어떤 사람은 약자이고, 어떤 사람은 강자이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목표를 설정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목표를 설정해준다. 어떤 사람은 감정으로 생활을 지지할 필요가 있고, 어떤 사람은 의지로 생활을 지지할 필요가 있다. 나는 대체로 한쌍의 개념에서 후자를 선택하는 유형의 사람이다.
하루는 왕후닝이 생각한다. 한 친구가 몇년전에 자기에게 물었던 문제이다: 매일 책을 읽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여기에 대하여 왕후닝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같은 유형의 사람은 이미 행복이 없는 생활, 즉 생활의 평범하고 담백함에 습관이 되었다. 행복이 없는 욕망은 고통이 없다. 고통은 왕왕 행복을 추구함에 뒤따르는 것이다. 행복 자체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의심해야할 것은 행복 자체가 아니라. 매 개인의 주관상탱의 희망이다. 나의 문제는 역시: "중은 왜 불경을 읽는가?"이다. 이 문제에 대답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은 평범하고 담백하게 돌아갈 수 있다. 평화롭게 무한한 천기를 기를 수 있다. 행복의 일은 바랄 수는 있지만, 추구해서는 안되고, 추구할 수는 있지만 집착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여러 해동안 수련하면서 충분한 공간이 마음 속에 있으나 소위 행복은 아니다. 당연히 나는 다른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이 똑같이 생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이 답에는 감동이 있다. 평화는 무한한 천기를 기른다. 현재도 이 이치를 다 깨닫지는 못했다. 만일 다시 십여년이 지나서 불혹의 나이가 된다면, 왕후닝처럼 분명하게 알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아주 행운이겠다.
왕후닝이 1994년에 읽은 책리스트
<성단아래의 임표> <성단을 내려온 주은래> <북회귀선> <앙시앙레짐과 프랑스대혁명> <미국의 민주> <정치안정> <사조영웅전> <고계> <폐도> <하나의 가장 신비한 전쟁> <다큐멘터리과 허구>, <기인(畸人)>, <토가(土街)>, <백록원(白鹿原)>, <교류와 사회진보> <프로테스탄트윤리와 자본주의정신> <다원주의민주의 곤경> <무정부, 국가와 유토피아> <1976년의 등소평> <열애명운(熱愛命運)> <논어별재(論語別裁)>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관리사상사> <중국고대성문화> <문화와 국제관계> <세계의 혼란변혁과 계승의 이론> <민족주의와 국제사회> <문화전략> <정체된 제국 두 세계의 충돌> <프랑스병> <관료주의의 폐해> <잠자는 사자가 깨어날 때> <제국의 정치체제> <경영의사결정의 신과학> <경영행위> <도피자유> <킨제이성학보고> <신관리방격> <역사결정론의 빈곤> <증국번> <경제학> <미래의 사회주의> <순세론> <도봉(刀鋒)> <신진(新鎭)> <모택동의 대강남북시찰> <신십일담> <천렵(天獵)> <반부패: 중국의 실험> <제경(帝京)> <제3의 눈으로 본 중국> <스탈린시대의 수수께끼사건> <구역(媾疫)>, <중국대역사> <등소평문선> <제프슨박사> <여요도(女妖島)> <현대화신론> <금방자(金房子)> <월광> <중국공산당민족전쟁중의 지위> <추항(醜巷)> <93중국단상 -누가추악한 중국인인가> <성북지대> <모택동의 비서들> <생명특이현상고찰> <고난과 풍류> <사람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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