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

일본학자: "청나라는 일본을 이길 수 없다"

중은우시 2012. 8. 21. 01:22

글: 정만군(程萬軍) 

 

청일전쟁이 끝난 후, 일본의 저명한 사상가이자, '근대대부'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吉)는 '문명'의 각도에서 이렇게 결론지었다:

"중국의 문명정도는 일본에 미치지 못하다. 그러므로 전투에서 일본을 이길 수 없다."

왜 중국의 문명이 일본만 못하다고 하는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청나라는 "외재문명(外在文明)"이 있을 뿐, "내재문명(內在文明)"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엇이 외재문명이고, 무엇이 내재문명인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그의 <문명론개략>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여기에서 간략히 정리하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예를 들어 서양물건, 서양건축은 모두 외재문명이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예를 들어, 세상의 이치나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비로소 내재문명에 속한다.

이런 구분법은 나누기 어려워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으며, 무엇을 하고 놀고, 어디에 사는지, 의식주의 각분야에서 유행하는 생활방식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고,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문명과는 무관하다. 그래서 외재문명에 속한다. 가치관, 사상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본질을 결정하므로 내재문명이다. 한 국가가 외래문명을 흡수하여 본국문명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외재문명은 쉽게 취할 수 있지만, 내재문명은 얻기가 어렵다.

기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말한 '외재문명'을 잘 분석해보면, '위문명(僞文明)'과 의미가 비슷하다. 이 주장에 따르면, 화하문명은 최소한 청나라때까지 일본에 의하여 '위문명'의 범주로 분류된 것이다.

마치 후쿠자와 유키치의 예언을 실증이라도 하듯이, 당시 청나라말기의 양무운동은 중국에는 '외재문명'이 있다고 말하는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양무운동후, 중국인들은 어떤 정신상태인가? 영국의 리드부인이 1901년에 출판한 <푸른 장포를 입은 나라>라는 책에서, 당시 청나라신민을 '무력하다'고 표현한다.

"약 4분의 1의 사람이 아편을 흡입한다. 나는 이곳의 사람들보다 더 허약하고 무력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어떤 곳은 토지가 비옥한데, 전체 마을의 남자들은 모두 얼굴색이 창백하고, 허리를 굽히고 있다. 몸이 모두 비었다. 아마도 늑골마저 비어버린 듯하다. 길에 사람들은 모두 길을 가고 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이 아니라, 짐을 들고 길을 걷는다."

양무운동이전의 중국문명상황과 다른 점이 없고, 심지어 더욱 악화된 듯하다.

왜 양무운동은 중국의 문명상황을 바꿔놓지 못했을까? 병제를 개혁하고, 거선을 만들고, 대포를 구매하는 이런 것들은 인력을 들이면 만들 수 있고, 돈을 쓰면 살 수 있다. 이는 문명의 외형이지 본질이 아니다. 문명의 겉모습이지 그 정신이 아니다. 문명의 실현은 문명본질정신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저 기술문명에 의존하고 문명의 정신을 무시하여서는 문명개화의 목표를 실현할 수 없다.

"중국문명이 중국만 못하다"는데 대하여, 이 일본대부는 '4가지 방면'에서 결론을 내렸다.

첫째, 법치정신. 고대의 전제정치를 행하며, 법률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

둘째, 과학정신. 과학이 무엇인지 알지를 못한다.

셋째, 존엄방면. 굴욕을 당하고도 부끄러운줄 모른다.

넷째, 인도방면. 형법이 잔인하다.

일본학자는 중국이 이 네가지 분야에서 모두 갖추지 못하고 있으므로 중국은 4가지 야만적인 특질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이것이야말로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4가지 근원이라고 보았다.

중국의 4가지 '야만적 특질'에 관하여 일본의 육군대장 이타카키 세이시로(坂垣征四郞)은 더욱 봐주는 것없이 말했다. 중국은 "자치부락을 보유한 지역에 국가라는 명칭을 덧붙였을 뿐이다."

근대일본학자, 군인들이 화하문명을 악평한 것은 사실을 논한 것인가 아니면 편견인가?

비록 고대 화하문명이 흥성했을 때 확실히 보급하지 못한 '문명'이 있었다.

예를 들어, 환관과 전족이다. 고대일본은 중국의 이 두 가지 '문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두 가지 문명은 불완전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 명청이래, 환관, 전족은 더욱 심해졌지만, 이웃나라인 일본은 절대로 따라하지 않았다.

근대일본에 구와바라(桑原鷺藏)라는 학자가 있는데, 일찌기 일본이 이 두 가지 문명을 따라배우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수,당이래로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였는데, 오직 환관제도는 가져오지 않았다. 이것은 실로 좋은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영국의 스텐트는 <중국의 환관>이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서 갈파한 바 있다: 동양 각국의 이처럼 보편적으로 쓰인 환관제도가 서양에서는 그다지 유행하지 않았다. 이것은 기독교의 덕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아국(일본)은 종교의 힘을 전혀 빌리지 않고, 이런 야안적인 풍속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이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한 일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당시 선각자들의 사고와 분별력에 아주 감사드려야 한다."

일본문화인류학자인 이시다 에이이치로(石田英一郞)는 이렇게 탄식한다: "거세"는 원래 목축기술인데, '문명국가'에서 궁중생활에 응용되었다. 일본학자인 미타무라 다이스케(三田村泰助)는 일본은 문명개화를 숭배하고, 이렇게 잔혹한 짓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말도 거세하지 않았고, 사람도 거세하지 않았다.

그외에 중국인들은 '삼촌금련(三寸金蓮)'도 하지 않았다. 일본학자들도 구미와 마찬가지로 반감을 나타냈다. 강제로 생리구조를 바꾸어 여인에게 전족을 하게 하고, 전족한 발을 가지고 노는 것을 그렇게 많은 문인아사들이 좋아했다니, 이는 일종이 잔인한 행위이다.

다만, 청나라말기의 중국이 비문명적이었다고 주장하는 일본엘리트들도 부인하지 않았다. 일본도 메이지유신전에 문명정도에서 중국과 별 차이가 없었고, 메이지유신이후에 문명이 고개를 들었다는 것을.

메이지유신의 대표적인 구호는 바로 "문명개화(文明開化)"이다. "문명"은 표면에 머무르지 않았고, 썩은 것을 도려내고 없애는 운동이었다. 일본인의 '개화"는 상층인사들이 사교춤을 추는 것이나, 솔선하여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으로 나타났을 뿐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인의 정신기질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개체 및 '신일본인'의 각성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일본정치자, 사상가들이 제기한 '인민성질개조'이다. 정부는 신분제를 폐지하고, 일본은 '사민평등'을 기초로 한 사회로 매진한다. 신분제의 속박을 벗어난 후, 작은 백성은 큰 국민이 되었다. 근대일본은 '법치, 과학, 존엄, 인도'의 네 가지 분야에서 청나라를 추월했다.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위문명'만 가진 중국의 미래에 대하여 후쿠자와 유키치는 대담하게 예언한 바 있다: "중국은 '문명동점의 풍조'하에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독립을 유지할 길이 없다. 만일 '지사'가 출현하지 않는다면, '만일 우리처럼 유신을 하고, 국사를 개화하고 정부를 개혁하고 정치를 개조하고 사람의 마음을 일신하지 않는다면, 몇년이 지나지 않아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고, 국토는 반드시 세계문명제국들에게 분할될 것이다."

비록 그의 견해는 한계성이 있기는 하지만, 중국의 '문명'에 대한 인식과 예언은 모두 상당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청나라는 나중에 결국 그의 예언대로 되었다. 야만에 정복당한 문명은 '위(거짓)'이거나 '약'하다. 그 때의 화하문명은 이미 '위문명' '약문명'의 괴태(怪胎)였다. 그래서 나라는 온갖 수모를 당한다. 진정으로 강대한 문명은 야만에 정복당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