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요녕심양전투(遼瀋戰役)의 세 가지 수수께끼

중은우시 2008. 10. 31. 16:14

글: 웅일량(熊一亮)

 

11월 2일은 요녕해방 60주년 기념일이다. 60년전에, 해방전쟁의 최종승리를 얻기 위하여, 중공중앙군사위원회와 모택동 주석의 결정에 따라, 1948년 9월 12일, 동북인민해방군은 요녕심양전투를 개시했고, 동북지역에서 국민당군과 전략적인 결전에 돌입했다. 52일간의 격전으로 47만여명의 국민당군을 섬멸하고, 11월 2일 심양, 영구를 해방시켰다. 이는 요녕과 동북 전지역이 해방된 것을 의미했다. 요녕심양전투는 해방전쟁의 3대전투중 첫번째 전투였다. 요녕심양전투의 승리는 인민해방군으로 하여금 수량에서 국민당군을 넘어서게 만들었고(요녕심양전투전에는 국공병력대비가 373만 대 195만이었으나, 요녕심양전투가 끝난 후에는 290만대 300만으로 역전된다), 중국혁명에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요녕의 해방은 해방전쟁에 가장 공고하고 공업기초를 갖춘 전략적인 후방을 둘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후 진행되는 평진(平津, 북경과 천진), 회해(淮海), 도강(渡江)전투 및 전국의 해방에 유리한 조건을 창조했다.

 

첫번째 수수께끼: 왜 임표(林彪)로 하여금 동북의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였을까?

 

사실 요녕심양전투의 중요성은 모택동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모택동의 군사적인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이처럼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장수를 선택하는 측면에서 절대로 그저 관계에 의존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절대적으로 실력을 따졌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모택동이 임표에게 동북의 군사권을 장악하게 한 것이 그저 개인관계가 좋아서라고 한다. 전쟁에 대하여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한 것도 아마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임표에게 실전경험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것은 그저 구상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고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왜 임표에게 동북의 군사권을 맡기도록 선택했는지도 하나의 수수께끼가 되었다.

 

요녕심양전투를 연구해보면, 임표를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요녕심양전투의 임표를 얘기하다보면 다시 임표와 모택동의 관계를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요녕심양전투의 포성이 멎은 지 이미 60년이 되었다. 모택동 임표의 관계는 아직도 민감한 문제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이 역사는 사람들에게 다루어질 때마다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다. 최근 이십여년동안 임표에 대한 평가가 점차 공정해지고 있다. 1983년 진운은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임표가 제4야전군의 사령관으로서, 당시 정확한 곳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부정할 필요는 없다" 1985년, 양상곤은 <<홍군장정>>등 사료총서를 편찬하는 공작회의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임표는 마지막에 반국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의 반국으로 인하여, 그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부정하거나, 전면적이고 역사적인 평가를 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임표는 중앙소비에트구, 장정의 길에서 일본과 싸우고, 특히 동북해방전쟁에서 공로가 있다." 임표는 동북해방전쟁에 공로가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1990년대초에 상영된 영화 <<대결전>>의 제1부에서 임표는 좋은 이미지로 그려졌다. 다만 임표의 동북전쟁에서의 공로가 얼마나 큰지는 반드시 임표의 요녕심양전투시기의 모택동과의 관계를 명확히 해야만 말할 수 있다. 이건국 선생이 쓴 신작 <<요심전역연구>>(호남인민출판사, 1998년)에서는 이 문제를 깊이 파고 들어 세심하고 전면적으로 중공중앙주석인 모택동과 동북지구 주요책임자인 임표와의 역사적 역할에 대하여 연구했고, 두 사람의 전략, 전술사상이 상호 영향을 미친 점을 언급했으며, 모택동과 임표관계의 역사적 연원을 상술하고, 일부 독특한 견해를 내비쳤었다. <<요심전역연구>>에서 얘기한 모택동과 임표의 관계는 주로 두 가지이: 임표가 동북국 서기를 맡은 것과 금주전투.

 

정강산시기에 모택동은 절대영도를 주장했다. 일부 사람들은 이것이 가장제라고 생각했고, 주덕마저도 전위(前委)가 관여하는 것이 너무 많고, 권력이 너무 집중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모택동은 부득이 전위서기를 사임했다. 당시 임표는 유일하게 모택동을 지지했던 사람이다. 임표가 동북을 경영하는데 대하여, 모택동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임표가 가야지만 동북의 당, 정, 군, 민의 각 방면을 통일시킬 수 있다."

 

두번째 수수께끼: 국민당동북"초총(剿總)"사령관 위립황(衛立煌)은 공산당 편이었나?

 

요녕심양전투에서 국민당, 공산당 양측은 모두 이번 전투가 가지는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양측은 최고사령관을 선택하는데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서 뽑았다. 어떤 사람들은 요녕심양전투에서 실패한 이유의 상당한 부분은 국민당이 보낸 이번 전투의 총사령관이 공산당에게 설득당했다는 것을 든다. 그러나, 한 사람을 설득하는 것, 특히 이처럼 고위장군을 설득하려면 과정이 필요하다 혹은 상당히 긴 기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 반드시 문제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설마 장개석이 그렇게 쉽게 이번전투의 총사령관을 선택했단 말인가? 사실 요녕심양전투가 막 시작되었을 때는 아주 심하게 싸웠다. 그리고 공산군에 아주 불리했다. 그런데도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위립황이 공산군에 설득당하였기 때문인가?

 

위립황은 손중산의 호위출신이고, 장개석의 "오호상장"중 하나이다. 그리고 모택동과는 친구이며, 한때 중국공산당이 지명수배했던 인물이기도 하고, 나중에 다시 중화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부주석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 있다.

 

위립황이 "초총"의 요직에 있으면서도 의거를 일으키지 않은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내부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었지만, 위립황이 부대를 움직이는데 전권을 행사하지 못했고, 신변의 경호부대마저도 지휘하기 힘들었다. 위립황의 중요한 거동은 모두 특무에 의하여 장개석에게 보고되었다. 그리하여 위립황이 동북에 와서도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외에는 병사를 움직이지 않고, 그저 전투의 호기를 놓치게 했을 뿐이다.

 

1948년 10월 2일, 장개석이 비행기로 심양에 도착한다. 사단장이상의 장군을 모아서 훈시를 하며, 동북의 장수들이 소극적으로 전투를 회피한다고 욕을 한다. 장개석은 위립황을 놔두고, 자기가 친히 지휘한다. 이때, 금주에 포위되어 있던 부대가 심양에 구원병을 요청한다. 그래도 위립황은 시종 움직이지 않는다. 10월 14일, 인민해방군이 금주를 함락시키고, 국민군의 방어를 담당하던 범한걸 이하 10여만명이 포로로 잡힌다. 이후 장춘의 방어벽도 신속히 와해된다.

 

1948년 12월 25일, 중공은 국민당의 43명 전범을 발표한다. 장개석이 제일 앞머리에 오르고, 위립황은 13번째에 오른다. 사실 중공의 이 조치는 상당히 고심한 것으로 위립황을 보호하려는 측면이 강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위립황의 '통공(通共)'의심은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위립황은 살신지화를 면할 수 있었고, 장개석에 의하여 남경에 연금되었을 뿐이다. 위기를 넘긴 후, 상해를 통해서 홍콩으로 도망치는데, 이 험난한 역정은 가히 하나의 전기라고 할만하다.

 

위립황은 소극적인 전투회피전략을 실시하여 요녕심양전투의 형세는 공산군에 유리하게 바뀌게 된다. 전투는 금방 승리로 끝나고, 동북의 전지역이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간다. 그리하여 전국에서 국공양측의 군사대치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공산군이 질과 양에 있어서 모두 우세를 점하게 된 것이다.

 

위립황이 공산당에 설득되었다면, 위립황이 행한 다음의 조치들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1) 병력을 보충하고, 부대를 정돈했다. 1947년 겨울작전에서 소멸된 신오군을 재건하고 신8군을 새로 편성하여 정규부대를 14개군 48만명까지 늘였다.

 

(2) 부대를 조정하여, 원래 화북초총과 동북초총이 공동지휘하던 기열요변구사령부를 금주지휘소로 개칭하고, 이를 동북초총이 단독으로 지휘하게 하였으며, 범한걸로 하여금 지휘소주임을 맡게 했다. 제6병단의 4개군 14개사단과 지방부대까지 합하여 15만명이 의현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방어선을 담당했다. 주요도시는 금주, 금서, 호로도였으며, 동북과 화북의 연락을 책임졌다.

 

위립황은 친히 제8병단, 제9병단의 합계 8개군 24개사단, 지방부대까지 합하여 약 30만명을 지휘했고, 심양과 주변의 무순, 본계, 요양등지를 방어했다.

 

동북초공부사령관 겸 제1병단사령관인 정동국이 지휘하는 제1병단의 2개군 6개사단은 지방부대까지 합하여 약 10만명으로 장춘을 방어했으며, 해방군의 주력을 견제했다.

 

(3) 군수물자를 긴급조달하였다. 위립황은 심양, 장춘부대로 하여금 도처에서 식량을 구하도록 하였다. 심양에서는 4천만근을 확보했다. 가장 곤란한 장춘쪽에서는 해방군의 엄밀한 봉쇄로 거의 소득을 얻지 못했다.

 

(4) 점령한 도시에 방어공사를 강화했다. 모두 철근콘크리트로 영구적인 공사를 실시했다.

 

(5) 대거 미국원조를 쟁취했다. 위립황은 친히 미국 주중국고문단단장인 David Barr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David Barr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얘기했고, 1948년 5월 David Barr는 친히 고문단을 이끌고 심양, 무순의 비행장과 창고시설을 시찰했는데, 공수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6) 화북초총과의 연락을 강화하여, 위립황은 참모장을 보내어 화북, 동북 연방회의를 개최하고, 화북방면에 금주, 산해관지역에 병력, 장비, 보급상의 원조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동북방면은 최대한 동북해방군을 견제하여 화북에 대한 압력을 완화시키겠다고 했다.

 

세번째 수수께끼: 국공쌍방은 왜 모두 동북을 이렇게 중시했는가?

 

요녕심양전투는 지금까지 3대전투중 가장 중요한 전투로 인식되고 있다.

 

"군사적으로, 동북은 아주 중요한 곳이다. 동북은 중국최대의 삼림지역인 대흥안령을 보유하고 있고, 풍부한 광산자원이 있고, 병기공장이 있으며, 식량등이 아주 풍부했다. 가장 중요한 점이라면, 동북은 삼면에 의지할 수 있다. 서쪽은 몽고이고, 북쪽은 소련이며, 동쪽은 조선이다. 마치 의자에 편안히 앉은 것처럼 눈앞의 광활한 중원천지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이런 상황하에서 동북을 점령한다는 것은 아주 안정적인 전략후방을 확보하는 것이 된다."

 

동북에 진군한 것은 장개석의 중대실책이었다. 사실 원래 장개석은 금주에만 병력을 주둔시키려고 했다. 요녕심양전투후반기에 그는 두율범에게 마샬이 나라를 망쳤다고 말했다. 그는 반드시 동북 전체를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로써 볼 때, 내전의 배후에는 상당히 복잡한 국제적인 배경이 있었다. 양대진영간의 일대 힘겨루기였다.

 

장개석은 자신의 주력의 상당부분을 이곳으로 파견했는데, 그중에는 5대주력군으로 불리우던 중에서 2개 주력군인 신1군과 신6군이 포함되어 있다. 이 두 개의 군은 모두 인도버마원정군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미국제 장비를 갖추고 있어, 전투력이 아주 강하였다. 그럼에도 요서전투에서 전멸당하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대량의 병력을 보냄으로써, 내전의 후반기에 장개석은 남경, 상해를 지킬 병력도 없다고 한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국민당은 더욱 곤궁하게 되었다"  <<중국인민해방군제4야전군전사>>의 편집위원인 풍형육의 평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