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시초(翅楚)
1948년 3월 29일에서 5월 1일까지, 국민당은 남경에서 제2기 국민대표대회를 소집개최했다. 주요의제는 총통, 부총통 선거였다. 호적은 국민대회대표로 이번 회의에 참석했다. 사람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회의기간동안 호적을 총통후보로 세우려는 풍파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학술명인인 그는 졸지에 초점인물이 되었다.
풍파가 일다
원래, 장개석의 당시 지위와 영향으로 봐서는 총통은 그밖에 없었다. 아무도 그와 경쟁할 수가 없었다. <<대공보>>의 보도에 따르면, 4월 4일, 장개석은 총재의 신분으로 국민당 중앙전회를 소집개최해서, 총통, 부총통의 선거후보자지명을 토론했다. 각 중앙위원들을 발언을 통하여 일치하여 장개석 총재를 총통후보자로 추천했다. 회의기간동안 장개석은 말했다: 본당의 지금까지의 태도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었고,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제1기 총통은 본당내에서 선출해서는 안되고, 당외인사를 선출해야 한다. 당외인사중 아래의 조건을 갖춘 사람이 당선될 수 있을 것이다: 헌법에 충성하고, 헌정의 추진에 노력할 것; 민주정신이 있을 것; 민족국가사상이 있을 것; 중국문화역사에 깊은 인식을 가지고 있을 것. 호적은 그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오늘 국민당이 임시중전회를 개최했다. 장군은 미리 전부한 연설사를 했고, 후보자가 되지 않겠다고 성명했다. 그리고, 국민당은 무당파의 사람을 후보자로 선출할 것을 제안했다. 이 사람은 반드시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법을 지킬 것; 민주정신이 있을 것; 중국문화에 이해가 있을 것; 민족사상이 있고 국가를 애호하며 반란에 반대할 것; 세계국면과 국제관계에 확실히 이해할 것." 호적은 추가해서 말했다: "그는 시종 이름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내외의 사람들은 모두 나라고 추측했다."
소식이 나가자, 이는 대형폭탄이 터진 것같이 중국대륙을 뒤흔들었다. 연속 며칠간, 국내의 각 신문은 속속 <<장주석은 총통경선에 참가않음>>, <<총통부총통경선에 국민당은 후보자를 지명하지 않음>>등의 제목으로 보고했다. 4월 5일, 국민대회주석단선거에서 호적은 21표를 얻어 당선된다. 많은 기자가 그를 포위해서 물었다: "4일 장주석이 말한 총통경선조건이 마치 호선생을 위해서 만든 것같은데 호선생의 의견은 어떤가?" 호적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총통경선에 참가하지 않습니다. 이 조건은 누구나 갖추고 있습니다." 기자는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호선생께서는 누구를 뽑겠습니까?" 호적은 대답했다: "나는 이미 장주석을 총통으로 하자는데 서명했다."
장개석은 스스로 총통선거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호적이 총통에 선출될 것을 암시했고; 호적은 다시 기자에게 '절대 총통선거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여, 오리무중이 되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모순의 호적
장개석이 호적을 총통후보자로 선출하려고 하는 것을 호적은 사실 일찌기 알고 있었다.
3월 30일 아침, 장개석은 외교부장이자 호적의 오랜 친구인 왕세걸(王世杰)을 만나서, 그에게 호적이 총통후보자로 하고 자신은 행정원장을 하려고 하니, 왕세걸보고 호적과 만나서 협의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날, 왕세걸은 호적의 거주지로 와서 장개석의 의도를 전달했다. 왕세걸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소식이 새어나갈까 걱정하여, 집안에서는 감히 말하지 못하고, 찻속에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그를 중산릉의 곁에 있는 길위로 데려갔다. 차에서 내려 잔디밭에 앉아서야 그에게 얘기할 수 있었다." 왕세걸은 호적에게 장개석의 의도를 얘기한 후, 호적은 그것이 아주 총명하며 위대한 견해라고 하고, 국내외의 이목을 일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여, 약간 마음이 동했다. 다만 자신의 신체가 그다지 건강하지 않고, 동시에 자기의 성격상 장개석과 충분히 협조할 수 있을 것같지 않아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했다. 다만, 생각해본 후에 다시 답변을 주겠다고 말했다.
3월 31일 아침, 왕세걸은 장개석에게 전날 호적과 협의한 경과를 보고했다. 장개석은 왕세걸에게 호적을 설득해서 걱정하지 말고 용기를 내서 그의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을 계속해달라고 부탁했다.
같은 날 아침 8시, 호적은 친구인 주경생과 이 일을 협의했다. 오후에 다시 주경생, 왕세걸과 세 시간을 얘기했다. 협의결과를 호적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왕세걸은 다시 호적을 찾아와서 얘기한다. 왕세걸의 격려와 권유하에 호적은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큰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 동시에 왕세걸에게 장개석에게 그의 두 가지 뜻을 전하도록 한다. "첫째, 더욱 적당한 사람을 골라보기를 청해달라, 둘째, 만일 곤란하거나 장애가 있으면 즉시 취소해라. 그는 나에게 약속을 지킬 책임이 없다" 왕세걸은 즉시 상황을 장개석에게 보고한다. 장개석은 "아주 좋다. 내가 중앙집행위원회의를 소집해서 내가 제안하겠다."고 말한다.
4월 1일, 호적은 왕세걸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의 어제 결정은 너무 총망중에 이루어졌고, 재삼 생각해보니 역시 안하는 것이 좋겠으니, 왕세걸에게 다시 장개석에게 정중하게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달라고 했다. 호적은 "어제는 책임감때문에 할 수 없이 받아들였는데, 오늘 역시 책임감으로 인하여 나는 어제 받아들인 것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 그날 저녁 장개석은 호적을 접견한다. 그리고 그에게 여러 생각하지 말고 총통후보자가 되라고 설득한다. 호적은 나중에 친구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제 저녁, 장선생이 나를 만나서 그의 관저에서 오랫동안 얘끼했다. 그는 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전체회의에서 나를 총통후보자로 지명하겠다고 했다. 그는 이 헌법에, 국가최고의 행정실권은 행정원에 있고, 그는 실권이 없는 총통을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총통을 나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행정원장을 하겠다는 것이다. 혹은 그가 총통을 한다면 나보고 행정원장을 하라고 했다. 장선생의 태도는 이처럼 성의있어서, 나는 감동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장선생이 결정하십시오.'라고."
소동의 진상
4월 4일, 총통후보자를 토론하는 중앙집행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장개석은 먼저 자기는 절대 총통후보자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동시에 당외인사를 총통후보자로 하자고 제안한다. 다만, 이 제안은 국민당내의 절대다수의 사람으로부터의 반대에 부닥쳐, 통과되지 못한다. <<대공보>>의 보도에 따르면, 장총재의 발언후 각 중앙위원은 여전히 일치하여 장총재를 총통후보자로 옹립하고자 했다. 호적은 일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번회의는 6시간가량 계속 열었고,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장군의 말에 찬성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왕세걸은 회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그(호적)와 3일을 얘기했고, 그는 그의 신체건강이 이렇게 큰 책임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역시 장선생 자신이 담당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장선생은 들은 후, 다시 나에게 가서 권하게 했고, 결국 호선생이 정중하게 고려한 후에 응락했다. 이후 장선생은 호선생의 말을 듣고 아주 기뻐했고, 즉석에서 당내의 동지들에 대한 설득공작에 들어갔다. 장선생은 일찌기 이 일에 큰 노력을 들였다. 그러나 겨우 오치휘와 나가륜의 두 사람만을 설득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이 총통후보자는 장개석이 아니면 안되게 되었다. 동시에 헌법수정을 제안했고, 총통에게 더욱 큰 권력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더 이상 호적에게 총통후보자가 되라고 고집하지 않았다.
4월 5일, 왕세걸은 장개석을 대표하여 호적을 보러 왔고, 그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전달했다. 호적은 그 소식을 듣고, 큰 짐을 내려놓은 것같았다. 그리하여 "나의 일이 오늘 오후에 비로소 구원받았다"는 말을 한다. 다음 날, 즉 4월 6일, 호적은 북경대학 비서장 정천정에게 전보를 보내어, "연일 나에 대한 여러가지 유언비어를 북경에서도 들었을 것이다. 이번 풍파는 이미 평정되었으니 사람들에게 알려달라."
4월 8일, 장개석은 호적을 주석관저로 불러 식사를 같이 했다. 호적이 총통후보자로 당선되지 못한데 대하여 미안함을 표시했다. 장개석은 "나의 건의는 여산에서 고민한 결과인데, 당내에 기율이 없어, 나의 정책이 통과되지 못했다." 호적은 아주 성의있게 답변했다: "당의 최고간부들이 장총재의 주장을 반대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지, 나쁜 현상은아닙니다." 장개석은 호적에게 정당을 하나 조직하여, 정치에 참여할 것을 권했다. 호적은 거기에는 흥미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당을 조직하는데 적당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가지 건의가 있습니다. 국민당은 2,3개 정당으로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개석은 대권이 집중되지 않는 것을 우려했는데, 어찌 당내의 재분화를 용인할 것인가?
장개석이 총통후보자가 되기로 결정한 후, 다시 호적을 내세워 그와 함께 총통경선을 하기를 원했다. 다만, 장중정, 호적지(蔣中正, 胡適之)의 두 이름을 나란히 놓으면 그 뜻이, "장개석이 어디로 도망칠 것인가?"라는 것이 된다. 이는 당시 국공대결전에서 이미 열세에 처해 있던 국민당 장개석에게는 아주 불길한 것이었다. 이것이 아마도 호적이 최종적으로 총통후보자가 되지 않은 이유중의 하나이다. 결국 장개석과 함께 총통경선에 참가한 사람은 국민당 원로인 거정(居正)이었다. 장중정, 거정의 두 이름을 나란히 놓으면, 그 뜻이 좋아서, 장개석으로서는 어느 정도 정신적인 안위를 얻었을 것이다.
4월 19일, 장개석은 국민당이 주도한 국민대회에서 "총통"에 당선된다. 그리하여 그와 호적간에 발생했던 일련의 소동은 마무리된다.
이전에, 장개석은 호적에게 주미대사, 국부위원 혹은 행정원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이들 정치유혹은 모두 호적의 신체상황, 학술연구와 개인독립등의 이유로 완곡하게 거절당했다. 다만, 장개석이 그에게 총통후보자가 되라고 했을 때는 확실히 마음이 동했었다. 왜냐하면 총통은 그저 상징이라고 생각했고, 구체적인 업무도 그저 외국사신접견, 국서접수, 인장관장등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호적은 다른 사람에게 코가 꿰어 끌려다녔다.
사실, 장개석이 호적에게 총통후보자가 되라고 한 것은 취옹지의부재주(醉翁之意不在酒)였다. 한편으로 미국으로부터의 압력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였다. 이를 통하여 더 큰 권력을 획득하고자 한 것이다. 장개석이 총통이 된 후, 국민당 내부에서 행정원장 인선이 물망에 올랐을 때, 장개석이 뽑은 두 후보자는 장군(張群)과 하응흠(何應欽)이었다. 호적이 아니었다. 당시, 황우인이라는 사람이 발언을 신청하여 물었다: "왜 호적을 지명하지 않는가?" 그러자 장개석은 얼굴을 굳히면서 답했다: "서생은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 호적은 나중에 짐을 벗은 듯이 말했다: "나는 글읽는 사람이지, 관리를 지낼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또 말했다. "나는 개인 책장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데, 어찌 정치를 하겠는가?" 이는 확실히 호적의 내심독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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