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만주를 뒤흔든 장관일(張貫一) 사건

중은우시 2008. 9. 25. 23:58

글: 두응태(竇應泰)

 

1929년 8월 30일, 일본인이 통제하는 <<만주일보>>는 머릿기사로 눈에 띄는 제목을 달았다. <<공산당지하두목 장관일 여순에서 검거>>라는 기사였다. 이어, 심양에 영향력이 있는 몇 개의 신문인 <<성경일보>>와 <<봉천신문>>등에도 마찬가지로 이 사건을 기사화했다. 일시간에 "장관일사건"은 만주의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장학량이 제지명령을 내려, 심양의 신문에서 먼저 일본뉴스에서 장관일에 관한 뉴스를 전재하지 않기 시작했고, 이어서 일본신문에서도 관련뉴스가 사라지게 된다. 이는 일본인이 통제하는 <<만주일보>>에서 장관일이 감옥에 갇힌 후 입을 굳게 다물고 전혀 실토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이 중공지하당원의 실상을 보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소기가 친히 특지서기로 임명하다

 

장관일이 도대체 누구인가? 그는 왜 일본 관동군(關東軍)에서 그렇게 두려워하는 인물이 되었을까?

 

원래, 장관일이 바로 양정우(楊靖宇) 장군이다. 양정우의 본명은 마상덕(馬尙德)이고, 하남성 확산현 사람이다. 1927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후, 확산농민유격대장 및 중공예남특위위원등의 직위를 지냈고, 확산농민폭동을 지휘했다. 1928년 양정우는 하남 신양에서 현위원회 서기를 맡을 때, 지하투쟁의 필요에 따라 장관일이라는 가명을 사용한다. 1929년 여름, 상해 중앙군정간부훈련반에서 공부한다. 그 이후, 주은래에 의하여 전국총공회(노동조합)에 부임한다. 나중에 상해의 투쟁형세가 긴박하여, 중앙의 동의를 받아 소련으로 보내어져 군사를 학습하는데 동의한다.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 양정우가 상해에서 수로로 동북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중동로사건"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중소변경을 지나갈 수 없게 되어, 중앙에서는 양정우에게 동북에 남아 장관일이라는 가명으로 지하공작을 하도록 지시한다.

 

양정우는 심양에서 당시 만주성위 서기를 맡고 있던 유소기(劉少奇)를 만난다. 양정우는 그가 하남에서 지하투쟁을 지휘한 경력을 보고한다. 유소기는 그를 무순지구 특지서기로 임명하고, 구체적으로는 석탄광산노동자를 이끌고 반일투쟁을 벌이게 한다.

 

당시 무순석탄광산은 암흑지대였다. 일찌기 1905년 러일전쟁후, 이 석탄광산은 일본인들이 장악한다. 관동군은 이 동북최대의 광산에 경찰서와 헌병대를 두었고, 중국광산노동자가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즉시 진압했다. 양정우는 명을 받아, 무순광산에 간 후에, 석탄상인의 신분으로 광산노동자들의 사이에 나타난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장사를 했으나, 실제로는 암중으로 진보적인 광산노동자들과 연락했고, 야간을 이용하여 광산노동자들과 회의를 개최했으며, 어떻게 광산노동자의 비인간적인 대우를 개선할 지를 논의했고, 암중으로 대규모 파업투쟁을 기획한다.

 

일본의 광산주는 양정우가 광산에 온 후의 행적이 이상하다고 보았다. 특히 양정우가 지도한 석탄광산대파업이 무순을 진동시킬 때, 관동군은 광산노동자들의 파업은 분명히 공산당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무순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경찰서에게 하루빨리 중공지하조직을 찾아내고 지도자를 체포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의 양정우는 비록 이미 일본특무들의 주의를 끌기는 했지만, 그가 파업을 지도했다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무순의 특지위원이면서 천금채광구 당소조의 조장인 왕진상(王振祥)이 노동자파업을 선동하는 선전물을 붙이다가 부주의하게 행적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바로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왕진상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변절하며, 장관일이 그의 상부라고 진술한다. 일본경찰은 금방 양정우를 체포하고, 그의 거처에서 일부 진보서적과 <<홍기보>>를 찾아내게 되자, 장관일이 바로 석탄노동자파업을 주도한 막후지휘자라고 단정한다.

 

옥중의 특수투쟁

 

그러나, 양정우는 일본헌병의 혹독한 고문에도 그가 공산당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특무는 변절한 왕진상과 그를 대질시켰지만, 양정우는 사실을 실토하지 않고, 그는 장삿꾼이라고 주장했고, 왕진상과는 모르는 사이라고 버텼다. 일본헌병은 갖은 혹형을 다했지만, 그들은 왕진상의 구두진술 이외에 아무런 다른 증거를 찾아낼 수 없었다. 결국 혹형과 신문을 그만두게 된다.

 

무순광구경찰서가 아무런 결과도 얻어내지 못하자, 일본특무는 할 수 없이 그를 감옥에 가둬놓기만 한다. 양정우는 기회를 틈타, 병이 든 것처럼 가장하여 소란을 부리는데, 일본경찰이 속수무책이었다. 그해 10월 13일, 무순공안국은 할 수 없이 양정우가 옥중에서 병이 든 것을 이유로 그를 지방법원에 인도한다. 무순공안국은 <<구속범 장관일의 질병사유보고>>에서 "구속되어 일본경찰서에 인도된 장관일은 이 법인이 입소할 때 몸에 중상을 입었고, 현재 상처가 약간 나았지만, 두통의 증세가 있고, 상세가 엄중하니, 위험한 것으로 보여서, 보고합니다..."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하여, 양정우는 감옥의 여러가지 유리한 조건을 잘 활용하고, 병이 든 것처럼 하여, 일본인의 손아귀를 벗어나게 된다. 그해 10월 19일, 양정우는 "공산당혐의범"의 죄명으로 무순지방법원에 인도된다. 무순지방법원은 여러번 심리를 했는데, 양정우는 그가 산동에서 북경으로 석탄장사를 하는 상인이라고 말한다. 이 법원은 할 수 없이 그해 12월 다시 양정우를 봉천고등법원 검찰처로 인도한다. 이곳에서 그는 1년반의 유기징역을 받는다. 1930년 겨울 양정우는 봉천제1감옥으로 보내어져 수감된다.

 

유소기와 중공만주성위는 양정우가 감옥에 갇힌 소식을 잘 알았다. 시종 각종 사회관계를 이용하여 그를 감옥에서 빼내고자 한다. 그러나, 양정우는 "공산당사건"의 혐의를 받고 있어, 비록 봉천고등법원이 그에게 경미한 형을 과하기는 했지만, 양정우가 조기석방되도록 하지는 못했다.

 

양정우는 감옥에서 유소기위 성위의 지시를 들은 후, 감옥에서 특수한 투쟁을 전개한다. 이때의 양정우는 이미 '공산당'의 죄명을 벗어났을 뿐아니라, 감옥에서 유일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죄수였다. 그리하여 여러 수감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는 수감자들을 위하여 편지를 대신 써주는 기회에 점점 상대적으로 자유를 얻게 된다. 양정우는 기회를 틈타 감옥내의 반일인사들과 접촉하고, 빈농출신의 경찰과 간수들도 양정우를 동정하고 지지했다. 양정우는 인간관계도 좋고, 일처리도 기민하고, 문화수준도 높아, 감옥에서 그는 바로 '밥역'의 일을 맡게 된다. 이렇게 하여 매일 감방의 바깥에서 생활한다. 이때, 중공 만주성위는 암중으로 진보적인 간수를 통하여 양정우와 연락하게 된다.

 

이때, 양정우는 유소기가 이미 떠났다는 것을 안다. 새로 임명된 중공 만주성위서기는 이자분(李子芬)이었다. 그는 옥중의 양정우에게 비밀서신을 보내어, 그에게 믿음을 잃지 말아라는 것과 만주성위는 관계를 동원하여 그를 감옥에서 나오도록 해주겠다고 알려준다. 양정우는 계속 감옥에서 비밀리에 진보역량을 결집하는 공작을 벌인다. 3개월만에, 양정우의 곁에는 옥중의 일정한 역량이 집결된다. 그는 한편으로는 외부에서 전해지는 진보서적을 가지고 투지를 고무시키고, 한편으로는 감옥동지와 감옥경찰간의 헤게모니투쟁을 이끈다.

 

1930년 5월, 불행한 소식이 감옥에 전해진다. 새로 직무를 맡은 중공 만주성위 서기 이자분이 적들에게 체포된 것이다. 그리고 이자분은 바로 양정우와 같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양정우는 이자분을 출옥시킬 조건을 만들기 위하여 감옥내에서 여러가지 공작을 한다. 그가 보기에 이자분의 출옥은 전체 요동지구의 혁명역량의 존망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1년 4월에 양정우가 형기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이자분등 중공 만주성위의 책임자들을 구해내는 일은 성공하지 못한다.

 

석방3일만에 다시 수감

 

양정우가 출옥한 때, 요녕의 형세는 아주 험준했다. 비록 그가 금방 중공 만주성위를 찾았지만, 당시의 성위기관은 이자분등이 체포됨에 따라 긴장상태에 있었다. 그리하여 잠시 그에게 일자리를 안배해주지 못했다. 양정우는 심양 대동구의 중동여사에 거주했다. 이곳에서 감옥에 갇힌 동지들을 구해내기 위한 임시기구를 만드는데, 호조회(互助會)라고 불렀다. 양정우는 그가 옥중에서 알았던 내용을 호조회에 보고하고, 철야를 하며 이자분을 출옥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양정우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그가 출옥한 네번째날 새벽에 그가 성위서기를 구출해내려는 계획이 시행도 되기 전에, 군경은 중동여사를 포위한다. 양정우는 막 감옥에서 도망쳐 나왔는데, 다시 "폭동음모"죄로 감옥에 갇힌다.

 

이번에 양정우가 수감된 원인은 봉천군경이 호조회의 구성원을 체포하였을 때, 몸에 지니고 있던 일기에서 호조회가 마침 중공만주성위의 요인을 구출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고, 호조회의 회의참가자중에 막 '공산당혐의분자'로 석방된 장관일(양정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봉천경찰국은 신속히 행동하여, 중동여사에서 아직 도망치지 못한 양정우를 체포하게 된다.

 

양정우는 봉천감옥 북감에 수감된다. 이는 요인의 구금지이다. 봉천군경은 여러번 호조회에서 획득한 신증거를 가지고 양정우를 고문했다. 그러나, 이미 여러번 수감경험이 있는 양정우는 여전히 그가 중공만주성위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경찰이 그가 호조회에 가담하여 중공지하당 지도자를 구출하려고 했다는 부분에 대하여는 전혀 모른다고 하였다. 막 출옥된지 3일밖에 되지 않아 외부의 상황을 잘 모른다는 이유로 고문하는 자에게 반박했다. 여러번 심문을 해도 아무런 결과가 없자, 봉천군경은 할 수 없이 양정우를 북감소에 넣고 판결을 기다리게 된다.

 

양정우는 북감소에서 금방 중공지하당과 연락이 된다. 그중에는 진담추등이 이미 "북감소"에 조직한 옥중당지부가 있었다. 양정우는 진담추등과 감옥에서 투쟁을 전개한다. 그해 4월 5일 다시 수감된 때로부터 입동때까지, 양정우는 시종 자신이 중공당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산동상인의 신분으로 9.18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감옥내의 적들과 어울린다. 중공만주성위의 조직부장인 하성상(何成湘)은 바깥에서 구출작전을 준비한다. 12월 하순, 하성상등은 동북군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봉천제1감옥안에 있던 모든 중공인사를 구출해낸다. 양정우도 무죄석방된 사람에 속하여 빠져나온다.

 

양정우는 출옥한 후, 심양이 이미 친일정권의 천하가 되었음을 발견한다. 그는 이전에 출옥했을 때의 교훈을 되살려, 신속히 심양을 떠나 흑룡강 밀림으로 가서 항일전선에 참가한다. 출옥한 다음 날, 그는 고향의 친구인 당시 중공만주성위에서 비서장을 맡고 있던 상성을 만난다. 양정우의 요청으로 상성은 양정우를 흑룡강으로 보내게 된다.

 

12월 29일, 양정우는 상성이 친히 기차역까지 바래다 주고, 하얼빈으로 가는 기차를 탄다. 오래지 않아, 양정우는 하얼빈시위 서기 겸 중공만주성 군위 대리서기가 된다. 장백산과 흑룡강의 사이에 항일의 기치를 들고, 연이어 적군을 섬멸하는 전투를 벌인다. 1938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이 성립된 후 항일명장 양정우 사령관의 위명은 동북삼성에 진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