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명원(陳明遠)
완대성은 명나라 만력15년(1587년)에 태어났고, 청나라 순치3년(1646년)에 사망했다. 그는 반평생을 동림(東林), 복사(復社)를 싫어하였다. 그러나, 그도 일찌기 동림, 복사의 문생(門生)으로 인정된 때도 있었다. 완대성은 서른살때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다. 그는 "어려서 총명했고, 젊어서 부귀를 얻은" 청년준재였다. 그러나, 이 뛰어난 인재는 청년때 조용히 엄당(閹黨)에 가입한다. 그리고 환관 위충현(魏忠賢)의 양아들이 되어, 이들의 막후에서 이론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세상에 처음부터 멍청한 자도 없고, 태어나면서부터 성인인 사람도 없다. '군자'와 '소인'은 모두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즉, 사회생활을 통하여 계속 선택하고 변신을 거듭한 결과인 것이다. 사람의 유한한 인생중에 결정적인 선택, 즉 인생의 전환점은 그다지 횟수가 많지도 않고, 기회가 많은 것도 아니다.
완대성의 관료일생을 살펴보면, 앞뒤로 합쳐서 약 2년가량의 기간이다. 그는 일시의 탐욕으로 후세에 오명을 남겼다. 수단방법을가리지 않고 관직을 차지하려는 자들이 경계로 삼아야 할 인물이다.
완대성의 인품은 아주 떨어졌지만, 그래도 그는 글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사교범위가 넓어서,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기간동안에 사가법(史可法), 문진맹(文震孟), 장대(張垈), 범경문(范景文)등의 명사들이 바로 완대성과 함께 연회를 베풀고 놀던 친구들이다.
완대성은 시문(詩文)에서 재주가 뛰어났을 뿐아니라, 희곡(戱曲)에도 남다른 뛰어남이 있었다. 예를 들면, <<연자전(燕子箋)>>, <<춘등미(春燈謎)>>등이 있다. 그러나, 희곡을 통하여 정치선전을 한 것도 역시 완대성이 처음이다. 완대성의 희곡인 <<쌍금방(雙金榜)>>의 극중인물은 각각 동림파(東林派), 동창(東廠) 그리고 그 자신을 나타낸다. 자기의 무죄를 변명하며, 재삼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청렴결백을 호소한다. 완대성의 또 다른 전기인 <<모니합(牟尼合)>>에는 <<영조(伶調)>>라는 곡이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각본에는 서로 다른 글자로 쓰여 있기도 하다. 이는 완대성이 권력자에게 잘보이기 위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방식이었다.
완대성은 동림파인사들의 장점과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일을 할 때마다 도리를 앞세운다. 만일 그들과 변론을 한다면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관직이 강등되거나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만, 동림인사들은 책략을 쓸 줄모르며, 모욕을 참지 못한다. 완대성은 그리하여 여러가지 방안을 강구하여 아무런 근거없이 그들을 모욕한다.
완대성에 대한 평가중에서 야사, 필기등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는 인품은 형편없었지만, 글재주는 뛰어났다는 것이다. 이는 "소인(小人)"과 "재자(才子)"가 서로 다른 것으로 본 것인데, 사실 완대성은 희곡가로 세상을 살아갔던 것이 아니라, 빈객(賓客)의 신분으로 세상을 살아갔던 인물이다. 그가 희곡을 쓴 것은 정치목적에 의한 것이고, 정치수단이나 모략술수에서 아주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악역을 하면서도 남다른 능력을 보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악행은 자주 아주 기이하다.
유언비어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서는 큰 일을 할 수 없다" 300여년전의 완대성은 일찌감치 이 도리를 잘 알았다. 사실 유언비어를 만드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점이라면, 유언비어는 적수를 공격하는 것이고, 거짓말은 그저 자신을 분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악인에 대하여 침을 뱉고, 되돌아보지 않는다. 소위 "역사의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그러나 그가 나쁠 수 있었고, 나빴던 것에는 모두 조건이 있다. 그중에는 인간성, 시대, 사회등의 이슈가 나타난다. 이는 간단하게 좋은 사람과 비교하여 적고(少), 얕고(淺), 약(弱)하다는 것이 아니다.
소위 "소인다재(小人多才)"라는 것은 '소인'은 시세를 잘 이용하고, 사회조건을 잘 이용하고, 제도의 결함을 잘 이용해서, 빈틈이 있으면 뚫고 들어가서 사리사욕을 차리고 다른 것은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지, '소인'이라고 하여 모두 아름다운 글과 희곡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막후에서 책동을 하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람들이 증거를 붙잡기 어렵다고 느끼게 하는 것은 바로 천계년간에 완대성이 행하였던 행동의 특징이다. 완대성이 이렇게 한 것은 동림, 복사가 나중에 그에게 분풀이를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엄당이라는 것은 이해관계로 모인 것이고, 일단 형세가 변하거나 이익관계가 나뉘면, 반드시 쓰러질 것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완대성은 엄당내에서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앞장서지 않았다. 아주 조용하게 움직였고, 모든 사람들에게 잘 대했다.
명성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하나의 중요한 난제가 있다. 즉, 어떻게 좋은 후원자를 찾느냐는 것이다. 이는 찾고 싶다고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연, 기우등의 외부적인 요소도 필요하다. 완대성이 젊을 때 그는 위충현을 양부로 모셨는데, 이로 인하여 한때 잘나갔지만, 엄당역적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렸고, 그 무게는 태산이 위에서 누르는 것같았다.
완대성의 친구인 장대는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완대성은 아주 재주가 많다. 그는 '거심물정(居心勿靜)'을 싫어하여, 극을 만들어서, 세상을 욕하고, 세상을 조롱했는데, 많은 경우에 동림당을 폄훼하고, 위충현의 엄당을 변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선비들로부터 욕을 먹었다" 그에 의하면 완대성은 '거심물정'하지 못한 것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보았다. 즉, 완대성은 야심을 가지고, 분수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핵심을 찌른 말일 것이다.
그는 권력자에게 잘 보이고,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데에는 아주 뛰어났다.
자고로 소인들 중에서 재주가 뛰어난 자가 적지 않다. 당나라의 시인인 심전기(沈佺期), 송지문(宋之問), 송나라의 손적(孫觌), 방회(方回), 채경(蔡京), 명나라의 엄숭(嚴嵩), 조방화(趙方華)등. 매번 사회의 변혁기에 처하면 이들처럼 인품은 좋지 않지만, 글재주가 뛰어난 엘리트 혹은 대가가 많이 나타나는 편이다. 모든 사람들이 짧은 인생에서 모두 역사의 강물에 자신의 종적을 남기고 싶어한다. 완대성의 일생을 살펴보면 이익에 눈이 멀어, 자기의 좋은 글재주를 잘못 쓴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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