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몇 개의 왕조가 서안을 수도로 정했을까? 역대이래로 여러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11왕조설, 12왕조설, 13왕조설, 14왕조설 등등이다. 그렇다면 어느 설이 정확한 것일까?
11왕조라는 견해는 서안을 수도로 정한 왕조를 차례대로 서주(西周), 진(秦), 서한(西漢), 신(新), 전조(前趙), 전진(前秦), 후진(後秦),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隋), 당(唐)을 든다. 이 11개 왕조가 서안을 수도로 하였다는데 대하여는 아무런 이론이 없다.
이 기초상에서 12왕조라는 설은 서진(西晋)을 추가하는 것이다. 진민제(晋愍帝)는 건흥원년(313년)에 장안에서 정식으로 즉위를 선포한다. 이 왕조는 비록 4년밖에 존속하지 못했지만, 서진이 서안을 수도로 한 왕조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13왕조라는 설은 12왕조설을 인정하는 기초위에서 다시 동한(東漢)을 추가하는 것이다. 동한의 마지막 황제인 한헌제(漢獻帝)는 초평원년(190년)에 동탁(董卓)에 의하여 장안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후 초평3년(192년)에 이르러 동탁이 피살되면서 헌제는 겨우 장안을 떠나게 된다. 3년간 수도로 있었던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14왕조라는 설은 다시 여기에 대하(大夏)왕조를 더하는 것이다. 대하왕조가 지금의 섬서성 경내에 있었다는 점에 대하여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관건은 도성인 통만성(統萬城, 지금의 섬서성 靖邊縣)을 장안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지에 관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장안은 관중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것인데, 통만성은 아무래도 서안의 범주에 넣기는 힘들다. 그러나, 서안이 섬서성의 성회(성정부소재도지)이므로, 억지로 넣는다면 장안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무측천이 건립한 무주(武周) 정권, 황소의 난때 건립된 대제(大齊) 정권, 이자성의 난으로 건립된 대순(大順) 정권을 서안에서 건립된 왕조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서안을 수도로 삼은 왕조는 17개로 늘어나게 된다.
무주정권이 서안을 수도로 하였는지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의문이 있다: 첫째, 무주정권을 독립된 왕조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당나라의 내부적인 과도기인가에 관한 점이다. 둘째, 도읍을 낙양으로 하였는지, 아니면 도읍을 장안으로 하였는지에 대한 점이다. 일단 무주정권도 독립왕조라는 전제하에서 본다면 무측천은 확실히 낙양에서 등극하였고, 장기간 낙양에서 집정하였다. 장안은 겨우 배도(陪都)일 뿐이었다. 그러나, 무주왕조때에도 당나라의 기본은 여전히 장안에 보류하고 있었고, 무측천도 상당히 많은 시간을 장안에서 정사를 하느라 보냈을 것이다. 장안은 여전히 국가정권의 중심이고 세계정치, 경제, 문화교류의 중심이었다. 그러므로 서안을 수도로 하였다고 하더라도 말은 될 수 있다.
두개의 농민정권은 비록 짧기는 했고, 국가를 유효하게 통제하는 기구를 아직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확실히 두 개의 전 왕조를 뒤집고, 권력공백인 상태에서 이 두개의 농민정권은 확실히 국가정권중심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들이 서안에 건립한 정권은 억지로 말하더라도 준왕조의 존재로 봐주는 범위를 넘기는 힘들다.
현재, 가장 권위있는 관방의 견해는 서안에 수도를 세운 왕조는 13개라는 것이다. 즉, 서주, 진, 서한, 신, 동한, 서진, 전조, 전진, 후진, 서위, 북주, 수, 당이 그것이다.
이 관점은 약간 보수적이기는 하지만, 논쟁의 여지는 없다. 바로 이 13왕조때문에 서안(장안)은 중국에서 첫손꼽히는 고도로서 로마, 아테네, 바빌론과 나란히 세계사대문명고도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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