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동흥은 모택동의 곁에서 30년간 경위(警衛)로 지낸 유일한 인물이다. 기등규(紀登奎)는 모택동의 옛친구의 신분으로 외부에 알려져 있다. 오덕(吳德)은 동필무가 죽은 후에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실질적인 주재자가 되었고, 주덕이 죽은 후에는 중공전국인민대표대회당조 서기가 되어 인대를 3년간 장악하였다. 진석련(陳錫聯)은 모택동이 만년에 매우 중시한 군내의 ‘소장파’이다. 그는 당시 가장 젊은 야전군사령관이었고, 섭검영의 뒤를 이을 첫번째 후보였다. 그래서 이상의 4사람은 모택동이 만년에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네 총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을 파악하는 것은 모택동의 만년의 정치를 이해하는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먼저 총관(總管) 왕동흥을 살펴보자. 1955년 왕동흥은 중국인민해방군의 소장계급을 받는다. 그러나 이전에 그는 혁혁한 군공을 세운 바도 없고, 뛰어난 전투업적을 쌓은 바도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은 겨우 공안, 경위보안의 측면에서 세심하게 노력한 것뿐이다. 그는 나서경(羅瑞卿)의 조수로서 직접 중남해 내부의 경위를 담당했다. 모택동의 생활, 외출에 대하여 절대적인 책임을 졌다. 그는 1958년 딱 한번 강서로 가서 내무를 담당하는 부성장을 맡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시는 중앙경위의 직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는 중앙판공청주임, 중앙경위국당위제1서기를 맡은 외에 북경위수구의 3인핵심소조의 책임자이고, 중앙군사위 경위국의 책임자이며, 11차전인대에서 화국봉의 아래에서 당과 국가지도자중 1명으로 선출된 바 있다.
모택동의 왕동흥에 대한 평가는 “그는 계속 나와 함께 했다. 다른 사람들을 쓰면 내가 안심되지 않지만, 동흥이 나의 곁에 있는 것은 이미 습관이 되었다. 사람은 역시 옛 사람이 좋다. 그의 장점은 세심하다는 것이고 결점은 이론수준이 낮다는 것이며, 머리를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무시해서는 안된다. 한나라때 주발(周勃)도 큰 공을 세우지 않았는가.” 임표는 여러 번 왕동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했고, 강청도 몇번 왕동흥에 타격을 가하고자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모택동의 말은 그와 왕동흥의 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왕동흥은 여산회의때 국가주석을 두어야 한다고 말실수를 한 바 있다. 이것은 임표가 자신에게 인색하게 구는데 대한 것이외에 경위인원으로서 ‘호주(護主, 주군을 보호하려는 것)’의 심리가 작용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거의 순수해보인다. 그래서 모택동은 제9기2중전회상에서 왕동흥의 행동에 대하여 “1비2보(一批二保, 첫째는 비판하고 둘째는 보호한다)”의 태도를 나타냈는데 주요한 것은 보호하는 것이었다. 왕동흥의 잘못은 주은래, 강생, 강청, 장춘교, 요문원, 허세우등 소수인이 알고 있는 것이외에 다른 사람들을 잘 몰랐다. 일단 모택동이 적이라고 확정을 짓고 나면, 왕동흥은 아무른 의문도 품지 않고 모택동의 편에 섰다. 1966년 유소기를 타도할 때도 그랬고, 1970년 임표에게 손을 쓸 때도 그랬다. 왕동흥의 눈에는 모택동 한 사람 뿐이었다, 신속하게 임표집단을 해결하기 위하여, 왕동흥은 심지어 모택동에게, 온옥성(溫玉成)을 처리하자고까지 제안했다. 온옥성은 임표 강생과 관계가 좋았던 장군이다. 왕동흥은 비록 제9차예비회의상에서 파천황식으로 그에게 소장의 계급을 준 임표에게 감사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는 모택동이 임표에 대하여 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왕동흥은 임표의 거주지로 파견되어 간첩역할을 할 것까지 생각했었다.
장사사건이후, 왕동흥은 모택동이 사인방에 대하여 반감을 가진 것을 알고는 그는 적시 중앙판공청의 사람들에게 모택동이 사인방을 비판하는 소위 강화를 학습시켰고, 이로써 강청등 사람들의 죄를 묻기 시작했다. 모택동이 그에게 머리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왕동흥은 어떤 때는 머리를 쓰기도 한다. 이것은 그의 주군이 죽은 다음의 일이다.
왕동흥은 오랫동안 전문사건팀의 책임자였다. 중앙일전, 이전의 사건은 모두 그가 관리했다. 그래서 그는 자주 모택동을 대표하여 처벌받은 노간부, 노군인을 ‘시찰’, ‘관찰’했다. 그에게 시찰당하고 관찰당했던 사람들은 모두 왕동흥에 대하여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담진림(潭震林)은 나중에 진리대토론때 한가지 지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주석이 이미 나를 풀어주기로 결정했다. 왕동흥은 아직도 마찬가지의 분위기로 나를 대했고, 나에게 다시 사람이 되라고 설교를 했다. 나는 70세가 된 사람이다. 어떻게 다시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늙은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말투는 정말 받아들일 수 없었다” 증지도 도주의 마지막 생활을 회고함녀서 왕동흥에 대하여는 전혀 거리낌없이 비난했다. “어디 조그만치의 공산당원의 맛이 났는가. 그는 여러 차례 도주에게 빨리 떠나라고 했다. 나는 도주의 몸이 좋지 않으니, 북경에 남아서 치료할 수 없겠느냐고 하였는데, 왕동흥은 호랑이얼굴을 하고 말했다. 보황파가 아니냐. 혁명의 투쟁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주석에게 진실된 상황을 보고하지 않았다” 섭검영이 호남에 좌천갈 때, 왕동흥의 전화 하나로 섭검영을 쫓아보냈다. 섭검영은 눈물을 흘리면서 갔다. 그러나, 사인방을 잡기 위하여 섭검영은 적극적으로 왕동흥과 협력했다. 그리고 나중에 확대된 중앙정치국회의에 들어가도록 왕동흥을 위하여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왕동흥은 화국봉이 뒤를 받쳐준다고 생각했으며, 섭검영의 호의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은 쓴 맛을 보게 된다.
다시 정계에 복귀한 등소평이 사인방과의 1974-1975년의 투쟁사를 얘기할 때 당내에서 모두로부터 좋은 평을 받았다. 그러나 중앙부주석이던 왕동흥은 중앙당교에서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등소평과 사인방의 투쟁은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들의 영명한 영수인 화국봉주석과 같이 언급할 수 있는가. 그는 사인방에게 당했지 않았는가? 만일 화국봉주석이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오늘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말이 등소평의 귀에 들어갔고, 그 결과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1977년 중앙은 진운(陳雲)의 직무문제에 대한 토론을 벌였을 때, 왕동흥은 엉뚱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
양적인 변화는 결국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1979년 중앙정치국에서 왕동흥등에 관한 모임에서 여러 지도자들은 왕동흥을 공격했다. 진운은 오랫동안 침묵하던 습관을 깨고, 첫번째로 왕동흥에 대하여 정의를 내렸다. “왕동흥 동지는 이미 혁명의 뒷편에 쳐졌다. 그는 우리의 당을 개조하고, 우리의 나라를 발전시키고, 이왕의 잘못된 정책을 수정하는데 좋은 건의를 제공할 수 없을 뿐아니라, 오히려 중앙의 결단을 흔들고 있다. 이런 동지가 계속 당중앙의 지도자의 지위에 있다면 적합하지 않다. 전당의 동지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이루어진 결의에서는 “왕동흥등 동지는 이미 새로운 역사시기에 중요한 잘못을 범했고, 그가 계속 당과 국가의 지도적 지위를 맡는 것은 적합하지 못하고 허용할 수 없다. 그들이 예전에 당과 인민을 위하여 유익한 일을 했던 것을 감안하여, 중앙은 그들의 문제를 확대화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때는 이미 칼속에 약간의 정을 남겨주고, 살길은 마련해주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왕동흥은 중앙에서 진운, 왕진을 보내어 그와 얘기할 때, 그가 유일하게 말한 것은 “보기에 화국봉 주석이 나를 위하여 한 마디 말도 해준 것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화국봉을 제2의 모택동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고심은 화국봉으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받지 못했다. 적어도 강력한 보답은 받지 못했고, 그래서 그는 이에 대하여 매우 의외로 생각했다.
1976년 회인당사변(懷仁堂事變)때 왕동흥의 전적인 협조가 없었다면, 화국봉, 섭검영은 사인방을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섭검영은 이전에 이미 최악의 계산을 해두었고, 경위인원에게 최후의 말까지 해두었으며 심지어 다시 타도될 것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왕동흥은 관건적인 순간에 공심에서건 사심에서건 객관적으로 사인방을 없애고 중국20년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는데 공로를 세운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없앨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세 사람은 중앙에서 완전히 사라졌지만, 왕동흥은 계속하여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의 지위와 두 기의 중앙고문위원회의 공개적인 직위를 가졌던 것이다. 중앙정치위원의 대우에 따라 퇴직했다. 이것은 그의 공로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따는 것을 보여준다.
만년의 왕동흥의 두뇌는 역시 일관성은 있었다. 나중에 자주(90년대이후) 화국봉과 만난 것을 제외하고는 이미 다른 사람과는 만나지 않았다. 많은 시간을 외출하거나 놀러가는데 보냈다. 가끔 회고록을 썼고, 여러 방면에서 비난과 질책을 받았다. 그가 문혁과 모택동에 관한 평가를 되돌리기 위하여 노력했다고 보는 것이다. 미국을 포함한 국외의 일부 출판상들은 여러 번 왕동흥에게 경위중남해의 회고록을 쓰도록 요청했고, 가격도 낮지 않게 제시했다. 그러나, 왕동흥은 줄곧 거절했다. 왕동흥은 “쓰게 되면 살아있는 사람의 미움을 받게 되고, 죽은 사람의 미움도 받게 된다. 이후 나는 주석 어르신을 만날 면목이 없어진다.” 매번 모택동의 생일, 기일을 맞이하면 왕동흥은 친히 기념당으로 가서 공손하게 꽃을 바쳤다. 그는 기념당에서 이날의 고정된 방문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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