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마인초(馬寅初) : 모택동에 대들었던 북대교장

중은우시 2006. 11. 6. 15:13

마인초(1882-1981)

 

1950년대중반에 북경대학교 교장직을 맡고 있던 마인초는 중국공산당과 국가지도자들에게 중국의 인구증가를 억제하여야 하며, 가족계획(계획생육)을 실시해야한다고 건의했었다. 마인초는 중국의 인구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1955년 <<인구통제와 과학연구>>를 썼고, 이어서 <<신인구론>>, <<중국인무문제와생산력발전의관계>>, <<왜 인구의 질을 강조해야 하는가>>등의 글을 썼다.

 

1957년에 마인초의 <<신인구론>>의 인구증가억제정책이 전인대에 제출되어 토론되었는데, 당시, 모택동은 "사람이 많은게 좋은가 아니면 사람이 적은게 좋은가? 내생각에는 지금은 사람이 많은게 좋다"고 1957년 1월 최고국무회의석상에서 발언한다. 이후 마인초는 비판을 받고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마인초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나는 비록 나이가 80이 넘었으나, 중과부적이라는 것은 안다. 스스로 단창필마로 나가서 싸우겠다. 전사할 때까지. 절대로 이치로 설복하지 않는 비판자들에게 투항하지 않겠다" 그리고는 <<나의 청구를 다시 신청함>>이라는 글을 써서 "나의 인구론은 반박을 받아 이미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 하지만, 반박을 받아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박을 받아 마음이 넓어지고 몸도 뚱뚱해졌다"고 적었다. 그러나, 마인초는 변명할 수 있는 권한도 금방 박탈당했다.

 

그 때, 북경대학의 모든 간행물과 전국각지의 신문은 맹렬하게 <<신인구론>>을 비탄했다. 그러나, 마인초는 절대 자아비판을 수용하지 않았고, 예전처럼 웃으면서 북경대학을 출입했다. 마인초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행동으로 학생들을 가르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북대의 1만여명의 학생들이 그들의 학문과정과 장래의 실제업무과정에서 어려움을 당해도 앞으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한번 곤란을 맞이했다고 하여 고개숙이지 않기를 바란다" 북경대학의 학생들의 기억속에는 "마인초 교장의 뼈는 정말 단단했다. 그를 굴복시키는 것은 어림도 없다. 그를 핍박해서 자살하게 하는 것도, 망상일 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긍르 써서 오늘날의 사람들은 "마인초의 경랑(硬朗)을 배워야 한다"고 한 바 있다.

 

1960년 1월에는 "마인초가 투항하지 않는다면 그를 소멸시키자"는 구호아래, 이 타협을 모르는 학자의 북경대학 교장의 직무를 박탈했다. 얼마되지 않아, 그는 중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의 직무도 박탈당했다. 이후로 마인초는 정치와 학술무대에서 사라졌다.

 

이 와중에서도 그는 대량의 농촌지역에 대한 조사를 거쳐 심혈을 기울여 100만여자의 <<농서(農書)>>를 집필한다. 그러나, "문혁"이 시작되자 그는 부득이 "다른 사람이 태워버리느니, 내가 태워버리겠다"면서 수십권의 원고를 스스로 불태워버린다. 어떤 사람은 그가 살아서 결국은 승리했다고 말한다. 그는 1979년에 명예회복되고 북경대학 명예교장이 되었는데, 그의 나이 98세때였다.

 

그러나, 인구증가를 반대한 그 자신은 2명의 처와 7명의 자녀를 두어, 봉건적인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었다는 점은 아이러니이다.

 

1882년 6월 24일 절강소흥에서 양조업을 영위하는 집안에서 태어남. 그가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부친은 양질의 물을 찾아 황택강과 담강이 만나는 승현 포구진으로 이사감. 마인초는 다섯아들중 막내였음. 그는 생년월일이 모두 마(馬)였고, 성까지 마이므로 오마(五馬)를 갖추고 있어서 어려서부터 비범한 인물로 고향에서 알려졌다.

 

부친은 총명한 마인초에게 가게장부를 관리하고 가업을 잇도록 요구하였으나, 마인초는 도시로 나가서 공부하기를 원했음. 부친과 싸운 후에 황택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자 하였으나, 동네사람둘이 구해주어 살아남. 이후 부친의 친구인 장강성이 상해에서 승현으로 와서 이 일을 알고 마인초를 데리고 상해로 가서 공부를 시키게 됨.

 

1989년 17세인 마인초는 상해교회학교 육미서관에서 중학과정을 공부함. 성적은 항상 상위였음.

 

1901년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고향의 장인매(張因妹)라는 여성과 결혼함. 마인초는 별다른 반항없이 이 결혼을 받아들이고, 둘은 사이가 좋은 1902년 아들을 낳음. 다만 2살때 사망함.

 

1902년 천진북양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함. 1904년에 딸을 하나 낳음 이름은 마앙반(馬仰班)으로 지음.

 

1907년 북양대학졸업. 북양정부에서 국비유학생으로 미국 예일대학을 보내줌. 출국전에 고향에 와서 처가 임신하였다는 것을 알고 딸은 마앙조(馬仰曹), 아들이면 마앙봉(馬仰峰)으로 하라고 함. 딸을 낳아 마앙조로 지음

 

예일대학에서 경제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1910년, 예일대학에서 경제학석사학위를 받음. 컬럼비아대학 경제학과의 박사생이 됨. 32살이 되던 해에 마인초는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박사학위와 철학박사학위를 받음. 당시 중국유학생들은 대부분 미국 지도교수가 잘모르는 중국에 관한 내용으로 논문을 썼는데, 마인초는 굳이 "뉴욕시 재정"에 관한 논문을 썼다.

 

1916년 귀국하여 북경대학 채원배 교장의 요청으로 북경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를 맡음.

 

1917년, 마인초는 승현에서 왕중정(王仲貞)이라는 여성과 결혼함. 왕중정은 마인초보다 22살이 어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예뻤다고 함. 이후 마인초는 장인매와 왕중정을 북경으로 데려와 함께 생활함.

 

마인초는 두 부인에게 잘 대해주고, 두 부인도 사이가 매우 좋았다고 전해짐. 장인매와의 사이에는 딸을 셋두었고, 왕중정과의 사이에는 딸 둘, 아들 둘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