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북부)

양주(揚州)의 이십사교(二十四橋)

중은우시 2006. 10. 17. 20:51

양주는 역사와 문화를 지닌 유서깊은 도시이다. 양주하면 유명한 것은 "이십사교(二十四橋)"이다. 이십사교의 유래는 당나라때의 대시인 두목(杜牧)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양주를 찬양하는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청산은은수초초 (靑山隱隱水迢迢)

추진강남초미조 (秋盡江南草未凋)

이십사교명월야 (二十四橋明月夜)

옥인하처교취소 (玉人何處敎吹簫)

 

푸른 산은 숨은 듯하고 물은 저 멀리 흘러가는데

가을이 끝나가는 강남에는 풀들이 아직 시들지 않았네

이십사교에 밝은 달이 뜬 밤에

아름다운 이는 어디에서 피리부는 걸 가르칠까

 

이십사교를 얘기하자면 천년을 내려온 수수께끼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십사교라는 것은 하나의 다리를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24개의 다리를 가리키는 것일까? 이 것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이십사교"라는 아름다운 이름은 천년이나 내려왔고, 두목의 이 아름다운 시에 힘입은 바 크다. "이십사교"의 이름을 얻게 된 경위에 대하여는 아름다운 하나의 전설이 전해져 온다. 당나라때 어떤 사람이 달빛이 밝고 맑은 바람이 부는 밤에 24명의 아름다운 선녀들을 보았다고 한다. 몸에는 깃털과 비단을 입고, 고운 손에는 퉁소를 들고, 볼은 부풀어 올랐고, 붉은 입술은 가볍게 열려 있고, 하나의 작은 돌다리위에서 아름다운 선율로 24개의 퉁소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1950년대말에 양주에서 서문으로 나와서 서북으로 3-5리를 가면, 석교(돌다리) 하나와 목교(나무다리) 하나가 있었다. 두 개는 서고 가까이 붙어 있어서 다리끝에서의 거리는 24보밖에 되지 않았는데, 시골의 어른들은 이곳이 이십사교라고 불렀다. 그들이 어릴 때, 모두 어른들이 손을 잡고는 숫자를 세면서 다리를 건너곤 하였던 경력이 있다고 한다. 다리 하나를 지니고, 그 다리끝에서 다른 다리 끝가지 걸어가면 "1보, 2보, 3보..."하고 헤아렸다고 한다. 그러면 꼭 24보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이십사교"는 두개의 다리를 함께 부르는 말이 된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런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작은 다리는 도시의 발전과 더불어 이미 옛모습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다.

 

송나라때부터, "이십사교"는 여러 학설이 난무하면서 정설이 없는 수수께끼가 되고 말았다. 어떤 사람은 한 개의 다리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스물네개의 다리라고 하였다. 역대의 사전, 주석도 모두 이 두 파의 견대를 다 싣고 있고, 함부로 하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남송의 사인인 강백석은 초동에 양주에 와서 <<양주만>>이라는 천고절창을 썼다.

 

이십사교잉재(二十四橋仍在)

파심탕(波心蕩)

냉월무성(冷月無聲)

념교변홍약(念橋邊紅藥)

년년지위수생(年年知爲誰生)

 

이십사교는 여전히 있는데

물결은 마음 속에 일고

차가운 달은 소리도 없네

다리옆의 붉은 약을 생각하니

해마다 누구를 위하여 나는가?

 

이 사의 내용으로 보면 "이십사교"는 하나의 다리라고 보고 있는 것같다.

 

어떤 사람은 유명한 "이십사교"는 사실상 없는 것이라고 한다. 실재로는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당나라때 양주에 있는 다리를 총칭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최초로 이에 대하여 해석한 사람은 송나라때의 대과학자인 심괄이다. 그는 "양주는 당나라때 가장 부유하고 흥성했다. 옛성은 남북으로 십오리일백오십보이고, 동서로 칠리삼십보이다. 기록할 수 있는 다리가 스물네개였다" 그리고 책안에서 성안의 문하차원교로부터 동쪽의 산광교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다리 이름을 열거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계산해봐도 21개의 다리이름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두목의 시에서 "하처(어느 곳)"이라는 두 자를 보면 이것은 분명히 하나의 다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고 얘기한다.

 

이삽사교의 자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십사교의 달은 얼마나 묘한가? 역사상 이십사교가 있기는 했던 것일까? 이십사교는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문인학자들이 그 해답을 찾고자 하였으나 아직까지 모든 사람이 인정할만한 답변이 나오지는 않았다. 종합하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이십사교"는 바로 하나의 다리라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수양제때, 스물네명의 미인이 달밤에 다리위에서 피리를 불었는데, 이로 인하여 이십사미인교라고 불렀다가 나중에 이십사교로 바뀌었다고 한다. 청나라때 이르러, 사람들은 이십사교가 하나의 다리라는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청나라때 양주 사람인 이두는 <<양주화방록>>에서 "이십사교는 바로 오가전교(吳家磚橋)이다. 일명 홍약교(紅藥橋)라고 한다" "서문가(西門街)의 동서 양안에 걸쳐 있다"라고 썼다.

 

최근, 양주의 한 청년작가가 언어상, 지리위치상으로 "이십사교"에 대하여 대량의 논증을 한 바 있다. 양주 "이십사교"는 "아사교(阿師橋)"의 동일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심괄이 기재한 아사교가 지금의 성북쪽의 나사만교(螺絲灣橋)라는 것을 밝혔다. <<한어음운학도론>>에 따르면 당나라 발음상 "이" "십" "사" "교"는 각각 "아" "사" "교"의 동일음이라는 것이다. 양주방언으로 보면, "이십사교"와 "아사교"의 고음은 비슷하다. 왜냐하면 "아"의 고음은 a이고 "이"의 고음도 a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십사교"는 양주지역에 널려 있는 스물네개의 다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심괄은 스물네개의 다리에 대하여 이름을 일일일 기재했었다. 그러나 그저 스물한개의 다리 이름만을 적었을 뿐이다. 남송의 왕상지는 <<여지기승>>에서 "소위 이십사교라는 것은 혹은 남아 있고 혹은 없어졌을 것이다. 지금은 고증할 수 없다"

 

셋째, "이십사교"는 고대 양주교량의 일련번호라는 것이다. 고시에서는 순서로 다리를 칭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나라때 양주에서도 다리의 일련번호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나라때 시견오의 <<희증이주부>>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부지암수춘유처(不知暗數春遊處,)

편억양주제기교(偏憶揚州第幾橋)

 

봄놀이를 했던 곳이 어딘지를 속으로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단지 양주의 몇번째 다리인지만 기억할 뿐

 

당나라때 장제의 <<기양주고인>>이라는 시에서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월명기득상심처(月明記得相尋處)

성쇄동풍십오교(城鎖東風十五橋)

 

달밝을 때 서로 만나던 곳을 기억한다

성이 잠기고 동풍 열다섯째 다리를

 

넷째, "이십사교"는 시에서 언급하는 '허수'이지 '실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십사교"는 한 개도 아니고, 그저 양주에 있는 크고 작은 다리 전부를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두목은 자주 숫자를 시에 써넣기를 좋아했는데, <<강남춘>>에서도 "남조사백팔십사, 다소누대연우중" "십년일각양주몽, 영득청루박행명"등등이 있다. 이로써 볼 때, 두목은 숫자를 쓰기를 좋아했을 뿐 이것은 실제의 숫자라고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어떤 사람들은 "이십사교"라는 것을 통하여 양주라는 곳이 번화하고 양주에 미인이 많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십사교"에 대한 최종 해석권은 여전히 두목에게 맡겨야 할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