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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안록산(安禄山)의 부하들 중에는 한인(汉人)이 많았을까, 호인(胡人)이 많았을까?

by 중은우시 2024. 5. 16.

글: 일국지군(一国之君)

안록산은 혼자서 범양(范阳), 평로(平卢), 하동(河东)의 삼진절도사(三镇节度使)를 맡았고, 3진의 병력을 모두 합치면 18.4만명에 이르렀다. 이는 안록산이 당나라조정에 반기를 들 수 있었던 기반이다. 안록산, 사사명(史思明) 두 사람은 소그드 호인(粟特胡人)이다. 즉 중국사서에서 말하는 "소무구성(昭武九姓)"이다. 이들은 처음에 하서주랑(河西走廊)에서 살았다. 나중에 흉노(匈奴)가 굴기하자, 하서(河西)를 정복하며 월지인(月氏人)을 쫓아낸다.

구성(九姓)은 각각 강(康), 안(安), 조(曹), 석(石), 미(米), 하)-(何), 화심(火寻), 무지(戊地), 사(史)이다. 소무구성은 바로 월지인이다. 흉노에 패배한 후, 소무구성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일부는 서역(西域)으로 가고, 일부는 중앙아시아로 간다. 그리고 일부분은 현지에 남아서 다른 민족들과 융합한다.

안록산이 어떻게 당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이미 알 수가 없다. 당나라는 개국초기에 일련의 대외정벌로 동서돌궐, 고구려, 설연타, 백제, 후돌궐등을 멸망시킨다. 그렇게 되면서 많은 호인들이 당나라에 들어오게 된다. 당나라는 이들 호인을 정착시키기 위해 일련의 기미부주(羁縻府州)를 설치하여, 호인으로 하여금 호인을 관리하게 하였다. 당나라조정은 일정한 세금만 거두어갔다. 기미부주는 대부분 변방일대에 설치된다.

당현종(唐玄宗) 천보(天宝)연간, 전국에 9개의 절도사와 1개의 경략사(经略使, 나중에 절도사로 개칭됨)가 설치된다. 각각 평로, 범양, 하동, 삭방(朔方), 농우(陇右), 하서(河西), 안서(安西), 북정(北庭), 검남(剑南), 영남(岭南)이다. 절도사는 병권을 쥐고 있을 뿐아니라 행정권도 있어서 군정대권을 혼자 장악하고 있었다. 설치목적은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안록산은 혼자서 3개진의 절도사를 겸임하고 있으니, 직권이 상당히 컸고, 당나라의 동북변방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지금의 하북, 산서, 북경, 천진, 요녕등지가 모두 포함된다. 그리고 전국의 4분의 1의 군대를 지휘했다.

하동절도사의 치소는 산서태원(山西太原)에 있다. 주로 돌궐을 방비한다. 산하에는 천병군(天兵军, 지금의 산서성 태원에 있음), 대동군(大同军, 지금의 산서성 대동에 있음), 가람군(岢岚军, 지금의 산서성 가람에 있음), 횡야군(横野军, 지금의 산서성 울현에 있음), 운중수착사(云中守捉使, 지금의 내몽골 토목특우기에 있음)를 관할하며 병력합계 5.5만명이다.

범양절도사는 치소가 유주(幽州, 지금의 북경)에 있고, 주로 해(奚)와 거란(契丹)을 방비했다. 산하에는 경략군(经略军, 지금의 북경시), 위무군(威武军, 지금의 북경시 밀운), 정새군(静塞军, 지금의 천진시 계현), 청이군(清夷军, 지금의 하북성 관청수고), 항양군(恒阳军, 지금의 하북성 정정), 북평군(北平军, 지금의 하북성 정현), 당흥군(唐兴军, 지금의 하북성 백양전동쪽 막주), 횡해군(横海军, 지금의 하북성시 동남쪽), 고양군(高阳军, 지금의 하북성 역현)이 있었으며, 병력합계 9.14만명이다.

평로절도사의 치소는 영주(营州, 지금의 요녕성 조양)에 있으며, 주로 실위(室韦), 말갈(靺鞨)을 방비했다. 산하에는 평로군(平卢军, 지금의 요녕성 조양), 노룡군(卢龙军, 지금의 하북성 노룡), 유관수착사(榆关守捉使, 지금의 하북성 무녕 동쪽), 안동도호부(安东都护府, 지금의 요녕성 금주)를 두었으며, 병력합계는 3.75만명이다.

안록산 수하의 군대구성은 아주 복잡했다. 당시는 부병제(府兵制)에서 모병제(募兵制)로의 과도기였다. 당나라는 당시 100여년간 전쟁이 없었고, 인구가 갈수록 많아지면서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안사의 난(安史之乱) 이전에 총인구가 8000여만명에 이르렀고, 전답이 부족하여, 부병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고 한다. 땅이없는 유민이 갈수록 많아지면서 모병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천보연간 10개 절도사의 분포도

당나라의 중앙기구는 병력을 모집할 수 있었고, 절도사도 스스로 현지에서 병력을 모집할 수 있었다. 모집대상은 주로 토지를 잃은 농민이었다. 호인들은 농사짓는 사람이 아주 적어서, 이들중 절대다수는 한인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안록산 수하의 절대다수의 병사들은 한인이라고. 다만 호인과 한인의 비율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었고, 수시로 변화했다.

<자치통감(资治通鉴)>의 기록에 따르면, 754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기 1년전에 안록산이 당현종에게 올린 글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제가 이끄는 부하장병들은 해, 거란, 구성, 동라(同罗)등을 토벌하며, 전공이 혁혁합니다. 폐하께서는 파격적으로 관직과 상을 내려주시기 청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위임장을 내려주셔서 제가 군대내에서 직접 그들에게 상을 수여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나서 안록산은 일거에 500여명을 장군으로, 2000여명을 중랑장으로 임명한다. 이를 통해 인심을 사고, 이들은 모두 안록산의 심복이 된다. 다만 이들이 호인인지 한인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안록산의 이후 행동을 보면, 분명 호인이 많고 한인은 적었을 것이다.

한명의 장군이 2000명을 거느리는 군대로 보면, 500여명의 장군이라면 10여만의 병사를 통솔하는 것이다. 게다가 2000여명의 중랑장도 있으니, 안록산은 이번 임명은 자신이 이끄는 부대를 거의 망라한 것이다. 안록산은 이를 통하여 모든 부대를 장악했다.

<자치통감>은 또한 755년 이월 안록산이 부장 하천년(何千年)을 조정에 보내어, 번장(蕃将) 32명이 한장(汉将)을 대체하도록 청했고, 당현종이 응락한다. 거의 요청하는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현종은 중서성에 즉시 칙서를 쓰도록 하고 자신이 서명해서 실행했고, 위임장도 발급했다.

이를 보면, 안록산은 한인장수를 호인장수로 교체한 것을 알 수 있다. 755년 11월, 안록산은 범양에서 거병하며 호한군대 15만명이 남하한다. 나머지 병력은 현지를 지킨다.

<구당서. 지리지>에 따르면, 연()의 땅 17개주에는 동북지방에서 투항해온 호인들을 안치시켰다. 이들은 유주, 영주에 분산되어 배치되었고, 이곳은 안록산의 핵심통제지역이었다. 이는 또한 당나라의 기미주이기도 하다. 이들 지구는 안록산의 병사들의 모집지역이고,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킬 때 이들 호인들을 모조리 뽑아서 병력을 보충하고 중원을 친다.

안진경(颜真卿)이 하북에서 거병하여 안록산에 반기를 들자, 금방 하북지구의 주군들이 속속 호응한다. 모두 17개군이 조정에 귀순하고 병력합계 20여만명에 이른다. 나머지 안록산의 반군의 편에 선 것은 범양, 노룡, 밀운(密云), 어양(渔阳), 급군(汲郡)과 업군(邺郡)의 6개군이었다. 이를 보면 하북의 대다수 사람들은 조정을 지지했음을 알 수 있다.

안사의 난 개황

이곳의 하북은 오늘날의 하북성이 아니라, 황하이북지역을 가리킨다. 변방지구에 가까운 곳을 제외하고 하북에는 한인이 호인보다 분명 많았다. 안진경의 수하병력도 대부분 한인이었다. 안록산은 병력을 잃은 후 보충한 자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호인이었다. 그러므로, 안사의 반군은 호인의 비율이 갈수록 높아졌다.

예를 들어, 안록산 수하의 예락하(曳落河), 동라정기(同罗精骑)는 모두 호인의 정예군이었고, 여러차례 중요한 전투에 참여한다. 예를 들어, 최건호(崔乾祜)와 가서한(哥舒瀚)의 영보지전(灵宝之战)에 동라정기가 참전하고, 수양지전(睢阳之战)에서는 윤자기(尹子琦)가 10여만의 동라, 돌궐, 해족정예 및 기타 반군을 지)휘하여 수양을 포위공격한다. 이때의 군대도 호인들이 위주이다. 진도사지전(陈涛斜之战)에서는 당나라장수 방관(房琯)이 이끄는 10여만당군이 반군 안수충(安守忠)이 이끄는 수만의 예락하와 대적한다. 여기에서 반군이 대승을 거둔다.

<구당서.지리지>의 통계에 따르면, 전체 유주와 영주지구의 호인인구는 총인구수의 14.6%였다. 여기에는 거란, 말갈, 동라, 해, 신라, 돌궐등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안록산이 호인장수와 병사를 증가시키더라도, 한인들의 인구자체가 많은 상황하에서 호인은 시종 소수민족일 수밖에 없었다.

하북 여러 주의 호인호구

여기에서 호인장수의 적관((籍贯)을 분석해보자. 안록산이 건립한 대연정권(大燕政权)의 4명황제는 모두 호인이다. 안록산, 안경서(安庆绪), 사사명, 사조의(史朝义)는 모두 소그드 호인이다. 안록산에 회유된 엄장(严庄), 고상(高尚) 두 사람은 하북 한인이다. 이 두 사람은 안록산이 건립한 대연정권의 고위관료이다.

범양절도부사(范阳节度副使) 가순(贾循)은 경조화원(京兆华原, 지금의 섬서성 요현) 사람이니, 당연히 한인이다. 그는 안록산을 대신하여 범양을 지킨다; 별장(别将) 고수암(高秀岩)은 강주직산(绛州稷山, 지금의 산서성 운성) 사람으로 역시 한인이며, 안록산을 대신하여 대동을 지킨다; 평로절도부사(平卢节度副使) 여지회(吕知诲)는 평로를 지키는데, 적관은 불명이다. 서경유수(西京留守) 장통유(张通儒)는 화주하규(华州下邽, 지금의 섬서성 위남 동북쪽)사람으로 당나라의 군사가 장인원(张仁愿)의 손자이다. 즉 한인이다. 오직 좌상(左相) 달해순(达奚殉)은 선비(鲜卑)족이다.

대연정권의 재상 진희열(陈希烈)은 송주상구(宋州商丘, 지금의 하남성 상구) 사람으로 안록산이 낙양을 함락시켰으르 때, 진희열을 포로로 잡는다. 진희열은 그후 투항하여 재상에 임명된다. 그도 한인이다. 또 다른 재상 장계(张垍)는 당나라의 명재상 장열(张说)의 차남으로 하남 낙양사람이다. 당연히 한인이다. 장열의 또 다른 아들인 장균(张均)은 안록산에 의해 중서령(中书令)에 임명되는데 역시 한인이다.

안록산의 모사인 엄장, 고상도 모두 한인이다.

안록산의 수하장수들 중에 호인은 다음과 같다: 아사나승경(阿史那承庆, 돌궐), 아사나종례(阿史那从礼, 돌궐), 안수충(安守忠, 사타), 손효철(孙孝哲, 거란), 채희덕(蔡希德, 잡호), 이헌성(李献诚, 말갈), 이귀인(李归仁, 해), 장효충(张孝忠, 해), 왕무준(王武俊, 거란), 독고문속(独孤问俗, 선비), 이회선(李怀仙, 선비)

안록산의 수하장수들 중에서 한인은 다음과 같다: 최건호(崔乾祜), 전승사(田承嗣), 전건진(田乾真), 윤자기(尹子奇), 하천년(何千年), 고막(高邈), 장휴(张休), 장통오(张通晤), 설숭(薛嵩, 설인귀의 손자), 우정분(牛廷玢), 장지충(张志忠), 이흠주(李钦凑), 이립절(李立节), 이정위(李庭伟), 신자공(申子贡), 영선흠(荣先钦), 서황옥(徐璜玉), 이진수(李秦授), 허숙기(许叔冀), 길온(吉温), 장만경(张万顷), 서귀도(徐归道).

이들 인물들의 적관을 보면, 안록산 수하의 문신은 대다수 한인이고 호인은 아주 적다. 그중에는 한화된 호인도 있다. 호인은 원래 글공부하는 사람이 적으므로 논리적으로 맞다.

무장을 보면 역시 한인이 많다. 한인장수가 개략 2/3에 달한다. 호인장수는 개략 1/3에 달한다. 대체로 이 비율이다. 후기 호인장수가 비록 약간 증가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한인장수보다 많지는 않았다. 가장 많게 보아야 절반가량이다.

보통병사들을 보면, 여전히 한인병사가 많다. 어쨌든 인구기초가 많으므로, 비록 후기에 안록산이 보충한 병력이 대부분 호인사병이지만, 아무리 보충하더라도 사람수에서는 한인에 미칠 수가 없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안록산 수하의 장병은 분명히 한인이 호인보다 많았다. 이를 보면, 안사의 난의 발발원인은 간단하게 호한갈등(胡汉矛盾)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안사의 난을 평정한 두 명의 당나라장군도 모두 호인이다. 이광필(李光弼)은 거란인이고, 복고회은(仆固怀恩)은 철륵(铁勒)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