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이름 : 덩즈런(등지인, 鄧智仁) : 채권추심선생
직위 : 현재 불명
별명 : 험도신(險道神)
이전기록 : 홍콩 황가경찰 출신, 1984년 다른 사람과 합작으로 홍콩 이달행(利達行)을 설립하여, 부동산대리의 인생을 시작한다.
신문보도 : 1950년경 홍콩의 공무원가정에서 태어난 후, 고등학교 졸업후 홍콩 황가경찰에 투신한다. 여러해의 사업경력에서는 수출입, 의류장사도 하고 금융선물도 했으나, 가장 잘된 것은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채권추심업무를 한 것이라고 한다. 덩즈런이 설립한 홍콩의 이달행은 모든 홍콩부동산대리업계의 모범이 되었고, 하나의 완전한 부동산수수료제도를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어떤 사람은 그가 홍콩부동산대리업계의 게임룰을 만들었다고도 말한다. 덩즈런은 1992년말에 북경매괴원에 투자하면서 10여년간의 북경발전사를 펼친다. 이것은 전설적인 색채가 있는 인생의 큰 연극이라고 볼 수 있다. 매괴원의 큰 실패와 만통신세계의 큰 성공이 겹친다. 2003년에 이르러 업계를 떠나게 되며 듣기로는 청두(成都)에 은거하고 있다고 한다.
소문 : 등즈런은 스스로 처량하게 자조한 바 있다고 한다. 자신은 너무 양심적인 사람이었다고. 어떤 사람이 매괴원이 망한 이유를 어디에 있다고 보느냐에 대해서 그는 한마디로 말했다 "부패"라고.
출신영향 : 홍콩에서 와서, 중국대륙 부동산시장의 '숨은규칙'에 적응하지 못하여 결국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평가 : 덩즈런은 북경 부동산시장의 독특한 예외였다. 그의 독특하고 유아독존적인 행보로 인하여 그는 북경의 부동산업계에서 군계일학적인 존재였다.
12. 런즈창(임지강, 任志强) : 군대전사
직위 : 화원(華遠)집단 총재
별명 : 혼세마왕(混世魔王)
이전기록 : 군인출신, 1984년 북경화원에 들어옴.
신문보도 : 산동 액현(掖縣) 출신. 1951년 3월 출생. 1969년 1월 섬서성 연안현 풍장공사에 들어감. 그 해에 군대에 들어감. 전사, 배장, 연장, 참모, 영립이등공 1차, 삼등공(집체공 포함) 6차, 여러 번에 걸처 우수공산당원에 뽑힘. 일찌기 서성구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선임됨, 현재 북경시 정협위원이다. 이외에 많은 사회단체, 대학등의 기구에서 고문, 이사, 겸직교수, 부주석등의 직위를 담당하고 있다.
소문 : 런즈창이 막 전업해서 회사를 차렸을 때 어떻게 돈을 벌겠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하여, 그는 "막 시작해서는 나는 새벽 4시에 유병(油餠)을 굽고, 밤 11시에 문을 닫고 계산을 했는데, 얼마인지를 다 계산하고나서 비로소 잠들었다. 유명 1개가 6푼이었고, 한 그릇의 탕장이 3푼이었다. 우리가 받은 것은 모두 한푼 한푼 번 것이었다. 돈은 한쪽에 무더기로 쌓아두었다가 탁자를 거두면서 세었다."
출신영향 : 여러해 군대생활을 해서, 행동이 민첩하고, 말이 직설적이라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평가 : 런즈창은 말하는데 매우 솔직하다. 군인출신답다.
13. 이름 : 류보(유박, 劉博) : 문학청년
직위 : 북경의련헌(依蓮軒)방지산공사 동사총경리
별명 : 일장청(一丈靑)
이전기록 : <<산문선간(散文選刊)>>편집인 출신. 1988년 사업에 뛰어듬.
신문보도 : 류보는 일찌기 경건한 문학여성이었고, <<산문선간>>의 편집업무에 종사한 바 있다. 그는 무게있는 작품을 쓰고자 하였고, 대작가가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매주 이틀만 출근하는 여유로운 방식으로는 생활의 기반을 다지기에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1988년, 류보는 180도 생활을 바꾸게 된다. 그는 정저우 아세아쇼핑의 공관부 경리라는 직위로 출발하여, 널리 이름을 떨치고, 중국소매상업혁명으로 불리우는 '아세아현상'을 기획한다. 이어서 해남 삼련공사의 상무부총경리를 맡고, 해남중성방지산공사의 투자부부장, 해남박아여업개발유한공사의 동사장등의 직위를 맡고, 마지막으로 북경으로 진입한다.
소문 : 첫째, 1988년 류보는 정저우 아세아상장이 공관부경리를 모집하는 것을 보고 응시한다. 참고할 문장이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1주일만에 평생의 첫번째 기획안을 작성하는데, 매우 높이 평가를 받고, 1주일내에 원 직장에서 사직절차를 마치고 와서 출근하도록 요청받는다. 둘째, 각종 소문이 돌아, 류보는 아세아를 떠나서 부동산회사에 들어간다. 강인한 의지로 회사를 위하여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1억여위안을 번다. 그러나, 회사가 미리 약속했던 보수를 주지 않자 그녀는 스스로 창업하기로 한다.
출신영향 : 여러해동안 '문인의 생애'를 보낸 영향으로 기획에 치중하고 판매에도 문화적인 것을 내세운다.
평가 : 그녀의 사고는 항상 시대의 앞장을 섰다.
14. 이름 : 판스이 (반석흘, 潘石屹) : 벽돌공장 공장장
직위 : SOHO중국 동사장
별명 : 소면호(笑面虎)
이전기록 : 국가간부출신, 1989년경 펑룬을 따라 해남에서 부동산업에 뛰어든다. 1992년경 북경으로 온다.
신문보도 : 1963년생. 감숙성 천수(天水) 사람임. 황토고원의 농촌에서 초등, 중등학교를 마친다. 대학입학이 회복된 후, 판스이는 석유관도대학에 합격한다. 1984년, 그는 졸업후 하북랑팡의 석유부 관도국 경제개혁연구실에서 근무한다. 1987년 사직하고 사업에 뛰어들어, 심천, 해남을 전전하다가 최후로 북경에서 스타의 길로 들어선다.
소문 : 첫째, 최초에 판스이가 사직하고 북경을 떠나 심천으로 갈 때, 자기의 모든 재산을 매각하였는데 겨우 80여만위안이었다고 한다. 둘째, 그는 심천에서 처음에 자문회사에서 근무하였는데, 날씨도 덥고, 말도 통하지 않으며, 항상 연장근무를 하여 매우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셋째, 그가 해남에서 벽돌공장 공장장을 할 때 공장에 300여명의 민공이 있었다. 그때 태풍이 불어 모든 공사가 중단되고 민공은 배고픔을 호소하여, 그는 자신의 돈을 내서 맨공을 위하여 쌀을 사고 한 가마니를 다 먹으면, 또 한 가마니를 사는 식으로 해결한 바 있다.
출신영향 : 해남도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어떤 타격에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주었고, 지금은 누가 어떻게 욕을 해도 화를 내지 않는 정도가 되었다.
평가 : 어떤 사람은 판스이의 돈을 부러워하고, 어떤 사람은 판스이의 유머와 큰 뜻을 부러워하지만, 어느 사람도 그의 이미지를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15. 이름 : 팡차오(방초, 房超) : 발전소의 과장
직위 : 북경국화치업(國華置業)유한공사 동사장
별명 : 진삼산(鎭三山)
이전기록 : 국유기업 책임자 출신, "화무중심(華貿中心)"의 개발은 그를 부동산업계의 중심인물로 성장하게 하였다.
신문보도 : 팡차오는 1955년생이다. 1979년부터 산동래무발전소의 과장, 부공장장을 지냈다. 일찌기 서단 싸이터상성의 동사장, 산동노능집단공사의 총경리, 산동전력 다종산업관리국국장, 국가전력공사 중흥총공사 부총경리등의 직위를 지냈다. 그는 노능집단(魯能集團)이 부동산업에 뛰어드는 선봉역할을 하였다. 서단국제대하(서단 싸이터)를 개발하였는데, 독측한 개발방식은 이후 북경의 부동산업계에 아직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부동산업계의 초점이 된 것은 화무중심의 개발이다.
소문 : 런즈창은 예전의 파트너인 팡차오에 대하여 말하기를 "팡차오가 우리가 처음으로 협력한 때에는 임금이 매우 낮았다. 왜냐하면 노능은 국유기업의 방식으로 관리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때 한달에 겨우 수백위안을 받았고, 나중에는 일이천위안을 받았다. 매우매우 낮았다. 우리는 주주로서, 그에게 경영성과에 따라 상여금을 지급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실제적으로 그들은 감히 이 몇만원의 상여금도 가져가지 못하였다"
출신영향 : 국유기업의 사장출신, 일처리가 대범하고 박력이 있으며 감히 구오마오에 도전할 정도이다.
평가 : CBD의 다크호스로 불리운다. 사실상 팡차오는 부동산업계의 원로급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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