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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향충발(向忠發):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중공최고지도자, 그는 변절했는가?

by 중은우시 2024. 10. 17.

글: 조대부(趙大夫)

중공은 탄생이후 지금까지 이미 100년여가 지났다. 백년의 역사과정에서 현제 세계최대의 당내에 당의 1인자가 된 사람을 보면 손가락으로 꼽을만하다. 아래는 역대중공최고지도자의 목록이다:

중앙국서기: 진독수(1921년 7월 중공1대에서 선거로 선임)

중앙집행위원회위원장: 진독수(1922년 7월 중공2대에서 선거로 선임)

중앙집행위원회위원장: 진독수(1923년 6월 중공3대에서 선거로 선임)

중공중앙총서기: 진독수(1925년 1월 중공4대에서 추선)

중공중앙총서기 : 진독수(1927년 4월 내지 5월 중공5대에서 추선)

중공중앙총서기: 향충발(1928년 6월 내지 7월 중공6대에서 선거로 선임)

(주: 1931년 향충발이 국민당에 체포되어 살해당한 후, 왕명이 대리함)

중공중앙총서기: 박고(진방헌)(1934년 1월 중공6기 5중전회에서 선임)

중공중앙총서기: 장문천(낙보)(1935년 1월 준의회의에서 선거로 선임)

중공중앙주석: 모택동(1945년 6월 중공7기 1중전회에서 선임)

중공중앙주석: 모택동(1956년 9월 중공8기 1중전회에서 선거로 선임)

중공중앙주석: 모택동(1969년 4월 중공9대 1중전회에서 선거로 선임)

중공중앙주석: 모택동(1973년 8월 중공10기 1중전회에서 선거로 선임)

중공중앙주석: 화국봉(1976년 10월 중앙정치국회의 통과, 1977년 7월 10기 3중전회 추인)

중공중앙주석: 화국봉(1977년 8월 중공11기에서 1중전회 선거로 선임)

중공중앙총서기: 호요방(1980년 2월 중공11기 5중전회에서 선거로 선임)

중공중앙주석: 호요방(1981년 6월 중공11기 6중전회에서 선거로 선임)

중공중앙총서기: 호요방(1982년 9월 중공12기 1중전회에서 선거로 선임)

중공중앙총서기: 조자양(1987년 11월 중공13기 1중전회에서 선거로 선임)

중공중앙총서기: 강택민(1989년 6월 중공13기 4중전회에서 선임)

중공중앙총서기: 강택민(1992년 10월 중공14기 1중전회에서 선거로 선임)

중공중앙총서기: 강택민(1997년 9월 중공15기 1중전회에서 선거로 선임)

중공중앙총서기: 호금도(2002년 10월 중공16기 1중전회에서 선거로 선임)

임시대리한 왕명까지 포함하여 겨우 11명이다. 이 11명중에서, 향충발은 최후가 가장 비참하고, 평가가 가장 낮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향충발은 어떤 사람인가?

향충발(1880-1931.6.24), 일명 중발(仲發), 호북(湖北) 한천(漢川) 사람. 노동자출신. 중공성립초기, 당이 영도하는 무한지구 노동자운동에 참가함. 1922년 중공에 가입하여 무한구위 집행위원이 됨. 1926년 여름가을경, 중공호북구집행위원회 위원이 됨. 1927년 중공5대에서 중앙위원에 당선됨. 같은 해 중공87회의에서 중공임시중앙정치국위원으로 선임됨. 제6대 1중전회에서 중공중앙총서기, 중공중앙 정치국상무위원회 주석에 당선됨.

1931년 6월 22일, 상해에서 국민당 당국에 체포되고, 곧이어 변절함. 24일, 국민당당국에 의해 상해 용화에서 총살당함.

2. 역사적 평가

현재의 평가는 이러하다: 그는 권력을 추구했으나, 지도자로서의 재능은 부족했다; 그는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정확한 방향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3년간 당을 이끌었으나 전혀 자신의 정치적 주장이 없었다; 그는 불행히 체포되고, 아무런 망설임없이 그와 생사를 같이 했던 동지들을 배신했다. 그리하여 주은래는 "절개가 기녀보다 못하다"고 말하게 된다.

3. 의문의 유래

중공제6기 중앙총서기 향충발은 국민당 특무기관에 체포된다. 그런데 불과 이틀도 지나지 않아, 국민당에서는 처형해버린다. 그의 죽음은 도대체 국민당특무기관의 잔혹한 고문때문에 발생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정상적인 처형이었을까? 지금까지도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 만한 해석이 나오지 않고 있다.

이 일은 오랫동안 이해하기 어려웠다. 국민당당국이 왜 이전이나 이후처럼, 충분히 체포된 중공지도자의 잠재적 가치를 활용하고, 체포의 성과를 확대하여, 최대한도로 공산당조직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이렇게 서둘러 향충발을 총살해버렸을까?

다음으로, 향충발이 체포된 후 25시간내에 중공에서 아무도 그로 인하여 체포되지 않았지만, 공산당원이 국민당측에 체포된 일은 있었다. 당시 반한년이 변절했는지 여부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조사할 때, 요승지등이 이런 류의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4. 송호경비사령부 웅식휘의 난언지은(難言之隱)

향충발은 국민당 송호경비사령부로 인도된 후, 단지 23일 하루 낮, 그리고 밤밖에 없었다. 그 다음 날인 24일 즉, 24일 새벽 3시, 향충발은 국민당 송호경비사령부에서 처형당한다. 어렵게 붙잡았는데 겨우 하루만에, 중공중앙의 1인자를 이렇게 총살해버린 것이다. 이 일은 사람들이 믿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전의 관례대로라면 체포된 중공의 고위층인물에 대하여 국민당측에서는 모두 이를 공로로 생각해서 대거 선전했다. 향충발은 체포되고 송호경비사령부로 인도된 후 하루만에 처형당해 죽었다. 이건 국민당당국이 공산당원을 체포한 후에 사건처리한 규정에 어긋난다. 다음으로, 중요한 사건처리자인 송호경비사령부, 그리고 그 사령관인 웅식휘는 이 일에 대하여 수십년후까지도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웅식휘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공산당을 공격하는 말을 가득 담았다. 입만 열면 "공비", "주모비군(朱毛匪軍)"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중공 수뇌인물의 체포에 그는 동정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향충발을 체포한 건에 대하여는 회고록에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건 이상하지 않은가?

향충발이 빠르게 총살당한데 대하여, 한 가지 해석은 전보전달과정에서 시간을 실수하여 발생했다는 것이다. 향충발이 체포된 후, 프랑스 포방(捕房)에 갇혀 있었따. 나중에 국민당 용화사령부(龍華司令部)로 압송된다. 경비사령부는 즉시 장개석에게 전보를 보내어, 공산당의 총서기를 체포했다고 보고한다. 당시 장개석은 여산(廬山)에 있었다. 전보를 받은 후 바로 회신을 보낸다. "취지창결(就地槍决, 즉결처형)". 나중에 다시 두번째 전보를 받는다. 향충발이 투항하고, 변절했다는 것이다. 장개석은 다시 회신을 보낸다. "잠완처결(暫緩處决, 처결잠정보류)". 그러나 두번째 회신이 상해에 도착했을 때, 향충발은 이미 총살당한 후였다.

또 다른 해석에 따르면, 향충발의 죽음은 사고라는 것이다. 국민당 송호사령부의 일처리에 실수가 있었고, 소위 "처결" 운운은 모두 허구라는 것이다.

5. 중공내부에서 나온 의문

1970년대말, 문화대혁명이 끝나면서, 중공당사자료수집업무가 시작되고, 향충발이 변절했는지 여부에 관하여, 새로운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1979년 9월, 상해역사연구소의 이화명(李華明), 심억금(沈億琴)은 당시 중공중앙 기요처 주임 장기은(張紀恩)을 인터뷰하고, <주은래동지의 상해혁명활동 편단 및 기타>로 정리한다. 장기은은 글에서 네 가지를 얘기했다. 거기에는 "파괴당한 기관은 전날 이미 문제가 있다고 느꼈고, 향충발의 변절하였는지 여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향충발이 알고난 후 체포된 4명은 중공당원이다. 다만 4명은 모두 직접 향충발과 업무관계가 없이 체포된 것이다. 그후에 아무도 연루되어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다. 향충발이 죽은 후 전해지는 1천자짜리 진술서는 아마도 허위조작된 것일 것이다. 감옥에 체포되어 있던 관향영, 여창생도 신분이 폭로되지 않았다."

그후 당시 중공중앙 비서처 처장, 진독수의 전 비서 황개연(黃玠然)도 <당의 6대전후 약간의 역사상황>에서도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두 글이 발표된 후, 큰 논쟁이 벌어진다.

당사자중 한명인 진종영(陳琮英, 任弼時의 부인)은 그가 직접 향충발이 비굴하게 중공당원을 팔아먹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주단수(朱端綏, 전 중앙정치국기관 공작요원), 이목영(李沐英, 전 상해전국적색총공회 보관 겸 통계공작인원)도 향충발이 변절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다만, 논쟁은 계속하여 확대된다. 1980년 4월 28일, 전국정협 부주석 이유한(李維漢)은 호남당사공작자좌담회에서 이 일을 언급한다. 당시 중국혁명역사는 복잡하여 연구 토론해볼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당시 전국정협주석으로 있던 등영초(鄧潁超, 주은래부인)는 황개연의 글을 읽은 후, 이 일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를 만나 상황에 대해 대화를 한다. 황개연은 결국 주은래의 결론에 동의한다. 1989년, 등영초는 <향충발변절문제에 관하여>라는 글을 써서 <중앙당사연구>에 싣는다. 등영초는 이 글을 발표하기 전에 진운(陳雲)에게 보내어 심의해달라고 한다. 진운은 당시 중공특과 책임자였고, 향충발사건의 조사와 사후처리에 참가한 바 있다. 진운은 등영초의 글을 읽어본 후, 등영초의 의견에 찬동한다고 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