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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문강(文强): 모택동의 사촌동생은 왜 국민당의 특무가 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24. 5. 28.

글: 유혜빙(游慧冰)

모택동의 사촌동생인 문강(文强)은 전설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일찌기 중국공산당의 중요간부였고, 북벌전쟁, 8.1남창의거에도 참가했으며, 사천성위상위 겸 군위서기, 천동특위서기를 맡았었다. 나중에 공산당을 떠나 국민당 '군통'의 특무와 '국군'의 장교가 되어 회해전투에 참가했을 때 인민해방군에 포로로 잡혀, 감옥에서 26년간 지내다가 1975년에 비로소 특사를 받아 석방된다.

출옥후에 문강은 제6기, 네7기 전국정협위원, 민혁중앙 감찰위원, 황포군관학교 동문회이사등의 직위를 지낸다. 그는 광범위한 인맥을 이용하여 해협양안의 교류업무를 전개했고, 평화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해 공헌했다. 그는 등소평을 존경하여, "나는 <등소평주의>라는 책을 한권 쓰겠다"고까지 한다. 아쉽게도 그가 글을 쓰기시작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다.

23개현을 관할한 중공의 고위간부

문강은 1907년 호남 장사 서록(지금의 망성현 금량향)의 한 지주관료집안에서 태어났다. 전해지는 바로는 문천상(文天祥)의 23대손이라고 한다. 부친 문진지(文振之)는 일찌감치 일본에 유학했고, 신해혁명을 전후하여 손중산(孙中山), 황흥(黄兴), 채악(蔡锷)등과 모두 교류가 있었다. 고모인 문칠매(文七妹)가 바로 모택동의 모친이다. 문강은 어려서부터 모택동을 "모대가(毛大哥)"라고 불렀고, 모택동의 동생인 모택담(毛泽覃)과는 학교를 같이 다녔고, 사이가 아주 좋았다. 모택동은 문강보다 14살이 많았으며, 문강과 농담을 즐겼다. 문강은 성격이 고집있고, 자주 모택동과 논쟁을 벌였다. 문강은 나중에 구술한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택동이 처음 나를 알았을 때, 나는 그와 말장난을 했다. 나중에 내가 그에게 말장난을 한 적이 여러번이었고, 끝까지 그러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점은 소년 문강은 모택동, 하희(夏曦)등에게서 공산당의 영향을 받았고, 결국 혁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1925년 6월, 문강은 장사예군미술전과학교(长沙艺群美术专科学校)에서 공부한다. 모택동의 학교친구인 하희의 소개로 그는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한다. 그리고 그에게 광주로 가서 황포군관학교에 원서를 내도록 건의한다. 모친이 그에게 주면서 옷안에 넣어서 기워놓은 금팔지를 팔아서 노자돈을 삼아, 그는 모택담등을 데리고 배를 타고 수로로 광주에 도착한다. 8월, 3등의 성적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제4기 입학생이 된다. 임표(林彪) 및 주은래(周恩来)의 동생인 주은수(周恩寿), 이대쇠(李大钊)의 조카인 이운창(李运昌)등이 모두 동기이다. 그리고 그는 반장이 된다. 임표의 총기문제로 임표와 한바탕 싸운 적도 있다. 1926년 1월, 문강은 임표, 주은수등과 함께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주은래가 선서감독인이었다. 얼마 후, 국민당 2기중앙감찰위원회 소력자(邵力子)의 소개로 국민당에 가입한다. 그리하여, 문강은 당시 황포군관학교의 여러 선생,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국공합작시기 특유한 '여러 당'에 걸치는 학생중 하나가 된다. 황포군관학교에서, 문강은 중국공산당의 여러 엘리트들을 만난다. 주은래 외에도 등연달(邓演达), 팽배(彭湃), 운대영(恽代英)등이 모두 문강을 가르친 바 있고, 그들은 문강의 혁명이념은 굳건히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공분열후, 문강은 공산당원의 신분을 의연히 공개하고, 국민당을 나온다.

1926년 7월, 제4기 황포군관학교는 졸업을 앞당기고 북벌전쟁에 참가한다. 문강은 국민혁명군 총정치부 선전대대에 배속되어, 선전원이 된다. 9월, 북벌군이 무창성밖까지 치고 올라갔고, 문강은 주덕(朱德)을 따라 사천으로 넘어가, 국민혁명군 제20군(군장은 양삼(杨森), 주덕은 군당대표였다)의 당부에서 조직과장을 맡고, 중공지하지부의 선전위원이 된다. 1927년 장개석이 "4.12"정변을 일으키고, 양삼은 즉시 안면을 바꿔, 군내에서 '청당(清党)'을 실시한다. 문강과 이미 신분이 노출된 공산당원들은 긴급히 떠난다. 8월, 문강은 남창에서 8.1남창의거에 참가한다. 히룡(贺龙)이 이끄는 20군 제3사의 당위성원, 소령특무연대장이 된다. 의거가 실패한 후, 의거부대를 따라 남하하여, 광동성 조주(潮州), 산두(汕头)등지에서 적군과 격전을 펼쳤으나 흩어지게 되고, 문강은 십여명을 이끌고 홍콩으로 도주한다. 한푼도 가진 게 없다보니 여객선의 짐꾼으로 일하면서 노비를 벌어, 여러곳을 전전하며 상해로 간다.

백색공포가 심각하므로, 당조직은 그들에게 귀가하여 잠복하며 명을 기다리도록 한다. 그리하여 문강은 고향 장사로 돌아간다. 당시 문강의 혁명신념은 굳건했고, "인생역려하수기(人生逆旅何须记), 유암화명소리면(柳暗花明笑里眠)"이라는 싯구를 짓기도 했다. 잠복하던 반년동안, 문강은 여러 방면으로 당조직과 연락하려 했으나,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천으로 가서 당을 찾아가는 모험을 하기로 결정한다. 1928년 봄, 그는 사천 만현, 중경 등지로 간다. 당국의 감시가 엄중한 것을 보고 그는 즉시 성도로 도망친다. 문강이 여비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황포군관학교 동기이며 당시 중공천서특위 병위서기를 맡고 있던 요종택(廖宗泽)을 만난다. 요종택의 도움으로, 문강은 다시 당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자신의 포부를 실천하게 되며, 한걸음 한걸음 중요한 직위로 올라간다. 1929년, 중공사천 강파(江巴) 병위서기(兵委书记), 사현행동위원회서기(四县行动委员会书记)등의 직책을 맡는다. 1930년 10월, 중공사천성상위 겸 군위대리서기, 천동특위서기가 되어 23개현을 관할한다. 문강은 구술한 자서전에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때 모택동의 소비에트구는 겨우 12개현이었는데, 나는 23개현을 책임졌다. 최대의 근거지였다."

7년후, 문강은 다시 한번 좌절을 겪고, 오갈데가 없어졌을 때, 이미 "국통"특무로 변신해 있던 요종택이 그에게 도움을 손길을 내민다. 이번에는 그를 잘못된 길로 이끈 것이다.

반성문을 쓰지 않은 전범

1931년 6월, 문강은 배신을 당해 체포당하지만 당내 특공의 도움을 받아 요행히 탈출할 수 있었다. 사천성위는 당시 왕명(王明)의 좌경교조주의방침을 고수하면서,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잔혹하게 투쟁하라"는 노선을 실천하고 있었다. 심지어 적과 투쟁하는 방식으로 당내의 동지를 대했다. 살아서 귀대한 문강은 자연히 중점적인 의심대상이 된다. 조사를 거친 후, 문강은 "실절행위(失节行为)가 있다"는 이유로 유당관찰(留党察看) 1년의 처분을 받는다. 억울하다고 여긴 문강은 이치를 따져가며 다투었지만,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는 화가나서 성위의 주요책임자에게 서신 한통을 남기고, 사천성위 부녀부장을 맡고 있던 처 주돈완(周敦琬)을 데리고 떠나간다. 서신에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잠시 당신을 떠나겠다. 당신은 당신의 혁명을 하라. 나는 나의 혁명을 하겠다. Goodbye!" 부부는 상해로 갔고, 사방으로 그들이 가장 신뢰하는 중앙군위서기 주은래를 찾는다. 그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일을 바로잡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시종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장사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기르고 학교선생, 신문사편집자, 기자로 살아간다. 이때부터 공산당과는 관계가 끊어진다.

1935년, 문강이 쓴 비판문장이 그에게 화를 불러온다. 호남성주석 겸 사로군(四路军)총사령관 하건(何键)이 명을 내려 그를 붙잡아 법에 따라 처벌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문강은 그 소식을 듣고 바로 도망친다. 한동안 이리저리 도망을 다닌 후에 요종택을 찾아가서, 그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때의 요종택은 이미 공산당을 벗어나, 국민당 군통국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문강을 절강중앙경관학교(浙江中央警官学校)에 재직할 수 있도록 소개하고, 그를 "군통"특무의 우두머리인 대립(戴笠)에게 소개한다.

대립은 이전의 중공 고위간부가 투항하러 오자 기뻐하면서 문강을 군통국에 가입시키기 위해 설득한다. 그리고 전후로 그를 중앙경관학교 지도원, 참모본부 상교(上校, 대령)참모로 임명하고, 나중에 문강으로 하여금 러시아에서 막 귀국한 장경국(蒋经国)에게 최근의 중국형세를 브리핑하게 하였다.

문강은 다시 국민당에 가입했고, 대립이 이끌어주자 관운이 형통해서 급속히 승진을 거듭한다. 1944년봄에는 미중합작소 제3특종기술훈련반 부주임이 되고, 1945년봄에는 군통국 북방구 구장, 겸 제1전구 사령장관부 숙간위원회 주임위원이 되며, 같은 해 12월 군통국 동북판사처 처장이 된다. 화북, 동북부대를 회유하여 귀순시키는데 공로가 있어, 1946년에는 중장으로 승진한다. 동북에 있는 동안, 그는 당시 동북구성보안사령부 사령장관이었던 두율명(杜聿明)과 교분을 맺는다. 이는 그가 나중에 국민당이 패퇴하기 전에 회해전선으로 가서 전투를 하다가 포로로 잡히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항전발발후 제2차국공합작이 형성되었을 때, 주은래는 사람을 보내어 문강에게 돌아오도록 권한 바 있다. 그러나 문강은 응하지 않았다.

1946년 3월 16일, 대립은 남경 판교진의 대산에서 비행기추락으로 사망한다. 뒤를 봐주던 인물이 죽으면서 문강은 군통 내부의 내분에 실망을 느끼고, '군통'을 나와 정규군직을 맡을 생각을 하게 된다. 1948년 여름, 문강의 부친과 교분이 있던 호남수정공서주임 겸 성주석인 정잠(程潜)이 그를 데려가서 그를 호남수정공서 판공실 중장주임 겸 제1처 처장으로 임명한다. 문강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군통을 벗어났지만, 나중에 나는 전범이 된다. 공산당은 내가 군통에 있던 일에 대해서는 추궁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옮긴 것이 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1948년 9월, 장개석과 서주"소탕총사령부 부사령관" 두율명은 문강을 서주 '소탕총사령부' 전선지휘부 중장부참모장, 대리참모장으로 임명한다.

11월, 문강은 회해전투에 암가하고, 다음해 1월 인민해방군에 포로로 잡힌다.

문강은 자칭 "두율명을 도운 바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서주에서 철수하는 도중에, 부하로부터 인민해방군의 7명 무공대원을 체포했다고 보고를 받는다. 두율명은 바로 지시를 내려 '즉결처분'하도록 한다. 똑똑한 문강은 아마도 퇴로를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온갖 방법을 써서 두율명을 속이고 이 7명을 풀어준다. 나중에 두율명이 전명으로 잡혔을 때 죄행중 하나는 7명의 무공대원을 살해한 것이었는데, 문강이 바로 나서서 증인이 되어 심사위원회에 말했다: "그 7명은 내가 풀어주었다. 한명도 죽지 않았다!" 심사위원회는 심사를 거쳐 과연 그 7명의 행방을 찾아낸다. 두율명은 1959년 12월 특사를 받았는데 , 그때 문강에게 말했다: "부참모장 네가 내 목숨을 구했구나. 네가 아니면 특사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문강은 공덕림감옥(功德林监狱)에 갇힌다. 그는 자신이 다시 자유를 회복하는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게다가 성격이 집요하여 반성문을 쓰기를 거부한다. 다른 전범들은 속속 반성문을 썼지만, 그는 쓰지 않았다. 그리고 감옥의 관리인원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모택동은 나의 사촌형님이다. 주덕은 나의 상사이다. 주은래는 나의 선생이고 입당소개인이다. 유소기는 나와 같은 고향사람이다. 임표는 나와 동기이다. 이렇게 많은 공산당의 고위관료들이 내 주변에 있었지만, 나는 국민당이 되었다. 그들이 나를 제대로 이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반성문을 써야 한다면 그들이 써야 한다. 나는 쓰지 않겠다." 1959년 12월 4일부터 1966년까지 전후로 6차례에 걸쳐 전범에 대한 특사가 있었지만, 문강은 시종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 '문혁'이 발발한 후, 전범에 대한 특사는 중단된다. 1975년 3월 최후의 전범특사가 이루어지는데, 문강은 마침내 특사를 받아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세차례의 혼인

문강은 세차례 혼인을 했다. 앞의 두번은 행복했지만, 두명의 처는 비명에 세상을 떠난다. 세번째 혼인은 그에게 쓰라림을 가득 맛보게 해주었다. 기이한 것은 그의 세명의 처는 모두 다른 사람이 안배해준 것이고,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루어진 적은 없다는 것이다.

그의 첫번째 처는 주돈완이다. 연경대학(燕京大学)을 졸업한 재녀로 문강보다 3살이 많았다. 두 사람의 결합은 주돈완의 사촌오빠가 소개해준 덕분이다. 당시 문강과 주돈완은 동료였다. 문강은 사천성위 군위 비서자으로 있었고, 주돈완은 성위위원, 부녀부장으로 있었다. 주돈완은 이전에 결혼을 한 적이 있는데 전남편의 이름은 유원암(刘愿庵)으로 사천성위 제1서기, 중앙후보위원이었는데 나중에 체포되어 죽었다. 하루는 주돈완의 사촌오빠인 오방길(吴芳吉)이 주돈완을 보러 왔다가 자신의 제자인 문강을 만나게 된다. 두사람은 만나서 서로 기뻐했다. 오방길은 문강이 아직 미혼인 것을 보자 "내가 보기에 너와 주돈완이 잘 어울릴 것같다. 내가 중매해주겠다 .오늘 저녁에 바로 결혼식을 올리자." 성위의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듣자 두 사람이 확실히 잘 어울린다고 여겼고, 역시 두 사람이 결혼하도록 부추겼다. 문강과 주돈완은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얘기하자 동의하고, 모두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이것이 결혼식인 셈이었다. 결혼후 두 사람은 서로 애정이 깊었고, 두 아들을 낳는다. 1941년 주돈완은 부인과수술을 받고 있었는데 마침 일본비행기폭격이 있었다. 의사는 놀라고 정신없는 사이에 수술칼을 그녀의 뱃속에 남겨두고 결국 그것으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게 된다. 죽기 전에 주돈완은 유서를 남기는데, 문강에게 갈세명(葛世明)이라는 여자와 재혼하도록 당부한다. 이 갈세명이 누구인가? 그녀도 대학졸업생으로 아주 예뻤다. 그녀도 역시 다른 사람이 문강의 곁으로 데려다준 것이다.

문강은 당시 '국군' 장교이다. 하루는 그의 부하중 유인규(刘人奎)라는 사람이 멋쩍어 하면서 도움을 청했다. 갈세명이라는 여교사가 재직하던 학교가 운영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먹을 돈도 없고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도 없으니, 문강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기를 청한 것이다. 문강은 유인규가 그 여교사를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즉시 서신 두통을 써서 한통은 무한의 친구에게, 한통은 장사의 처인 주돈완에게 보내어 여교사에게 일자리를 주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유인규에게 배표를 살 돈을 주어 갈세명에게 무한으로 가게 시켰다. 1년여후, 문강과 유인규가 상해에 도착했는데, 갈세명이 무한에서 와서 유인규와 만난다. 문강은 두 사람의 약혼식을 열심히 치러주었고, 유인규에게 돈을 줘서 약혼반지까지 갈세명에게 주게 한다. 그리고 갈세명을 대신하여 손목시계를 사서 유인규에게 준다. 모든 준비를 끝냈는데, 유인규가 돌연 문강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건 안되겠습니다. 저에게는 미혼처가 있습니다.

갈세명은 상심하여 상해를 떠난다. 호남 장사로 가서 문강의 처인 주돈완을 만난다. 주돈완은 마침 병중이었고, 갈세명은 남아서 주돈완과 그녀의 두 아이를 보살핀다. 주돈완은 갈세명이 순박하고 선량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리하여 유서에서 문강으로 하여금 갈세명을 취하게 당부한 것이다. 문강은 처의 장례를 마친 후, 이미 귀주로 돌아간 갈세명을 찾아서 그녀와 결혼한다. 결혼후에 두 사람은 세 아들을 낳았다. 1949년초, 회해전투에 참가중이던 문강은 장개석정부가 곧 무너질 것이라고 여겨 갈세명에게 서신과 돈을 보내면서 급히 세 아들을 데리고 대만으로 도망치라고 한다.

문강이 포로로 잡힌 후, 갈세명은 그를 그리워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대만에서 상해로 되돌아온다. 당시 상해시장이던 진의(陈毅)는 원래부터 문강과 서로 알고 있었다. 그는 관련정책에 따라 갈세명을 중소우호협회와 부녀연합회에서 일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녀가 학교에서 교사로 지내도록 해준다. 나중에 대륙에서 '진반(镇反, 반혁명진압)'이 일어나며, 갈세명은 자살하고 만다. 그녀의 세 아이 그리고 문강과의 전처 소생인 두 아이는 비록 고생을 겪기는 했지만 모두 성장하여 어른이 된다.

문강이 특사를 받았을 때는 이미 나이가 칠순에 가까웠다. 한 동료의 여동생이 그가 혼자서 외롭게 사는 것을 보고 그에게 여자를 소개시켜준다. 그녀의 성은 장()으로 과부이며 문강보다 15살이 어렸다. 문강은 단위에 보고한 후 결혼해도 괜찮은 여자인지 살펴봐달라고 한다. 단위에서는 조사를 거친 후 문강에게 포기할 것을 권한다. 장씨는 일도 없고 수입도 없으며, 성격도 고약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문강은 포기하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소개인은 그 소식을 듣자 바로 달려와서 문강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성격이 고약해진 것은 문혁때문이다. 출신이 좋지 않아서 계속 비판을 받아보니 마음이 좋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그녀가 당신과 결혼한다면 분명 좋아질 것이다." 문강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약해져서 장씨와 결혼등기를 한다. 그러나 결혼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장씨는 문강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문강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문강에게 밥도 주지 않고, 어떤 때는 문을 걸어잠그고 나가지 못하게 했다. 문강의 급여는 그녀가 모조리 가져가서 '관리'하고, 심지어 장위국이 그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보낸 달러까지도 그녀가 가져가서 '관리'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문강의 큰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돈을 보내라고도 했다. 문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와 별거하며, 그녀가 고쳐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별거후에 장씨는 더욱 사나워진다. 문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혼소송을 제기한다. 그녀에게 얼마의 돈을 주고, 집도 그녀에게 넘겨준다. 자신은 아들 집으로 이사한다. 그후에 비로소 조용하게 지낼 수 있었다. 94살까지 살다가 편안히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