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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문학일반

"노곽모파노조(魯郭茅巴老曹)"를 논한다

by 중은우시 2024. 8. 31.

글: 장성각(張成覺)

대륙에서 중국당대문학사의 서열은 오랫동안 모두 "노곽모파노조(魯郭茅巴老曹)"의 순서였다. 각각 노신(魯迅), 곽말약(郭沫若), 모순(茅盾), 파금(巴金), 노사(老舍), 조옹(曹禺)을 가리킨다. 그러나, 실제로 이건 합리적이지 않다.

원래 이런 말이 있다: "문무제일(文無第一), 무무제이(武無第二)". 문학은 스포츠경기와 다르다; 후자는 공인된 게임규칙에 따라, 심판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재주를 발휘하고 각자의 기술을 펼쳐서 고하를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작가마다 신앙이 다르고, 표현방법이 다르고, 또 같은 도시에 살지도 않아서, 각자 여기저기 흩어져 살면서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고저를 나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공(毛共,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의 독재체제는 당국에서 문인의 언행을 엄격히 단속한다. 그래서, 양산박의 호한들의 서열을 본받아, 관방에서 누가 첫번째이고 누가 두번째인지를 정해주었다. 큰돌은 게를 압사시킬 수 있다. 눈치가 있으면 고분고분 따라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 사이에는 잠재적으로 묵인하고, 잘못된 것이 올은 것이 되어버렸다. 헤겔이 말한 것처럼,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합리적이다" 위에서 말한 서열은 확실하게 못박아놓았기 때문에 뒤흔들기가 어렵다.

위의 서열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왕요(王瑤)의 <중국문학사>이고, 그 배후에는 주양(周揚)의 보고서가 있다.

왕요는 "1949년 여름방학이 끝난 후", 앞장서서 청화원(청화대학의 캠퍼스)에서 "중국신문학사"과목을 강의한다. "학기가 끝날 때, <중국신문학사고>이 상권이 기본적으로 완성되었고, 1952년초에 다시 하권을 완성한다. 이 작품은 업계에서 공인된 중국현대문학의 '개산지작(開山之作)'이다. 거기에는 노, 곽, 모, 파, 노, 조와 밀접하게 관련된 장절이 있어 의미심장하다.

중공이 이들 6명을 이토록 중시하는 것은 그들이 공산당과 모택동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공헌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주양은 1949년 7월 2일 제1차전국문대회(文代會)에서 <새로운 인민의 문예>라는 보고서를 내놓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다:

"노신은 위대한 혁명의 현실주의자이다. 그는 이후 창작활동에서 사회주의현실주의의 위대한 선구자이자 대표자가 되었다. 우리의 걸출한 작가인 곽말약과 모순은 모두 삽십여년동안 신문예운동의 전선에서 활약한 노전사이다."

1950년대, 주양은 조수리(趙樹理)를 평론하면서, 나아가 노신, 곽말약, 모순, 파금등을 "언어대가"라고 불렀다. 1978년, 곽말약의 병이 위중했을 때, 주양은 병실로 찾아가서 그를 이렇게 칭찬했다: "당신은 괴테이다. 다만 당신은사회주의시대 신중국의 괴테이다."

그는 또한 노사는 자신을 개조하여 빠르게 '전환'을 실현한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말한다:

"노사 선생이 잘하는 것은 사실적인 수법과 독보적인 유머재능이다. 그의 신사회에 대한 고도의 정치적 열정을 결합시켜, 그는 예술창작에서 새로운 경지로 매진했다."

이 6명의 문학적 조예는 확실히 비교적 높다. 다만 중공에 이용당하지 않았다면 중공체제내에서 지위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곽말약같은 경우에는 아부를 잘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북경 "사대불요검(四大不要臉, 네명의 체면을 모르는 자)"의 으뜸이 된다.

주목할 점이라면, 이런 서열은 형이상학적인 허함(虛銜)이 아니고, 실질적인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즉 물질적 이익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세계각국의 작가들이 원고료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과는 달리 대륙중국은 모든 전문작가를 작가협회에 가입시키고, 등급에 따라 급여를 주어 기른다. 그리고 그 등급은 서열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하면 당태종이 과거를 치러 오는 선비들을 보면서, "천하의 영웅을 내가 모두 거두겠다"라고 한 것과 같다. 작가들은 손쉽게 당국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게 되는 것이다.

유일한 예외라면 파금선생이다. 그는 평생 원고료로 살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신주대륙의 문예생태에넌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중공이 항상 사용하는 단어로 말하자면 "생존권"이다. 대륙작가의 생존권은 정부의 손에 쥐어져 있다. 손오공의 긴고주(緊箍呪)보다 더욱 유효한 지배수단이다.

그러나, 세상만사만물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지구촌의 일부분으로서, 공산중국도 국제사회와 완전히 단절될 수는 없다. 하지청(夏志淸)의 영문저작 <중국현대소설사>가 1961년 미국에서 출간되고, 1979년 <중국현대소설사> 영문판이 두차례 재판된다. 그리고 유소명(劉紹銘), 하제안(夏濟安), 이구범(李歐梵)등 여러 홍콩, 대만의 일류학자들의 번체중문번역본이 1979년, 1985년과 1991년에 각각 홍콩과 대만에서 출판된다. 복단대학에서 내놓은 간체중문본은 이 저명한 문학사저작이 세상에 나온지 40여년이 지나서, 대륙에서 처음으로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장애령(張愛玲), 심종문(沈從文)과 전종서(錢鍾書)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여, '노곽모파노조'의 서열을 뒤흔들어 버린다. 이어서 임어당(林語堂)도 주목을 받게 된다.

주목할 가치가 있는 점이라면 전종서의 <위성(圍城)>은 <담예록(談藝錄)>과 <관추편(管錐篇)>을 더하여 그 지위를 확립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처음 파금의 <가(家)>를 읽은 것은 초등학교 5학년때이다. 나이 겨우 9살이었다. 기억 속에 명봉(鳴鳳)을 특히 주목했었다. 머리 속에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어른거렸고, 그녀가 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장면에서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50년대 한국전쟁기간동안, 파금은 두 차례 북한으로 가서 위문하며, 약간의 단편작품을 남긴다. 그중 <황문원동지(黃文元同志)>(아마 기억이 맞을 것이다)의 주인공은 말미에 총부리를 막고 희생당한다. 그의 사적은 황계광(黃繼光)에 가깝다. 그러나 그 글은 그다지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그가 말년에 쓴 <수상록(隨想錄)>은 오히려 독자가 많다.

그는 심종문, 소건(蕭乾)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 노신도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에게는 한 가지 특색이 있다. 평생 자신의 원고료로 살아간 것이다. 이런 진정으로 좋은 사람은 기념할 가치가 있다.

아래에서는 임어당, 장애령과 전종서 세 사람의 창작역정을 돌아보기로 하자:

임어당(1895. 10. 10 - 1976. 3. 26)

중화민국 문학가, 발명가. 복건 용계(지금의 장주시 용해구) 사람이다. 평화현 판자진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옥당(玉堂)인데, 나중에 어당(語堂)으로 개명한다. 성요한대학에서 영문학 학사를 받고,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비교문학 석사를 받았으며, 독일 라이프찌히대학에서 언어학 박사를 받는다. 일찌기 북경대학 영문학과 교수, 하문대학 문학원 원장, 남양대학 초대 총장(취임은 하지 않았음)을 지냈다. 나중에 홍콩에 정착해서, 홍콩중문대학 연구교수, 유네스코 미술및문학주임, PEN International 부회장등의 직을 지낸다. 1940년과 1950년에 두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다.

1935년 그는 영문으로 <우리나라와 우리민족(吾國與吾民)>을 써서 중국문화를 소개하고, 1939년에는 <경화연운(京華煙雲)>을 써서, 1900년 팔국연합군이 북경에 침입한 때부터 1938년 항전초기까지를 배경으로 하여 신구인물의 변화를 묘사했다; 1941년에는 <풍성학려(風聲鶴唳)>를 쓰는데, <경화연운>의 속편이다. 두 소설은 모두 구미인들에게 중국항전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한 것이다.

임어당은 또한 "명쾌중문타자기"를 발명한다. <임어당당대한영사전>이 1972년 홍콩중문대학에서 출판되는데,모두 8천단어와 약 8만5천개의 범례와 구절을 수록하였다. 거기에는 그가 편찬한 신규단어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비록 임어당은 반공을 부르짖은 적이 없지만, 자유주의사상이 뿌리깊었기 때문에 중공당국에서는 계속 배척해왔따. 게다가 중요한 문학작품을 모조리 영문으로 써서 대다수의 대륙독자들은 알지 못했다. 역사의 본래면목을 회복하기 위하여, 마땅히 문학사에서 마땅한 지위를 누려야 할 것이다.

장애령(1920. 9. 3 - 1995, 9, 8)

원래 이름은 장영(張煐)이다. 필명은 양경(梁京)등이 있다. 상해출신으로 나중에 미국에 장기거주한 산문가, 소설가, 극본작가 및 극본평론가이다.

그녀의 조부와 외증조부는 각각 장패륜(張佩綸)과 이홍장(李鴻章)이다; 그들은 모두 청나라중앙정부에서 요직을 맡았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상해에서 한어교육을 받는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그녀는 일본이 점령한 상해에서 높은 문학적 성취를 이룬다. 1950년이후 그녀는 중공정권이 인간을 압박하는 본질을 꿰뚫어보고, 홍콩의로 이주한다. 나중에는 미국으로 건너간다. 1960년대말에서 1970년대초까지, 그녀의 작품은 하지청(夏志淸)등 학자에 의해 다시 발굴된다. 그녀의 작품은 이로 인하여 다시 한번 중국계사회내에서 널리 환영을 받게 된다.

그녀의 주요 작품스타일은 현실주의와 현대주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문학평론가는 그녀가 또 다른 중국항일전쟁하의 중국대중생활의 작품방식을 건립했다고 말한다. 이런 서사방식은 당시 및 그후 중국문학계에서 그 시기의 주류묘사방식과 분명하게 차이가 있다.

그녀의 중편소설 <앙가(秧歌)>(영문으로 발표함)와 장편소설 <적지지련(赤地之戀)>은 모두 1952년 7월 홍콩으로 이주한 이후의 작품이다. <앙가>의 이야기는 '토지개혁'시기 농민이 처한 고난을 그렸다. 호적은 제목을 <기아(飢餓)>로 고쳐도 되겠다고 했다. 작품은 토지개혁시기 대륙농민이 제대로 먹지 못해 굶어죽은 시신이 되고, 위험을 무릎쓰고 마을의 양식창고를 털다가 피비린내나는 진압을 당해서 사상자가 널부러진 참상을 묘사했다. 그리하여 "독초(毒草)"라는 비판을 받는다. <적지지련>은 대학생 유전(劉荃)과 황견(黃絹)의 사랑을 주제로 하면서 토지개혁, 한국전쟁, 삼반오반등 사회운동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대륙문학계에서 장애령은 오랫동안 부정적인 인물의 전형으로 묘사되었고, 1990년에 이르러 비로소 독자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전종서(1910. 11. 21 - 1998. 12. 19)

강소 무석 사람. 원래 이름은 앙선(仰先)이고, 자는 철량(哲良)이다. 나중에 종서로 개명하고 자는 묵존(默存), 호는 괴취(槐聚)로 한다. 일찌기 필명으로 중서군(中書君)으로 썼다. 중국의 작가, 문학연구가이다. 오월전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여러 외국어에 능통하여,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도 유창했고, 라틴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도 알았다. 작가, 시인 겸 교수인 여광중(余光中)이 당대 중국문학을 얘기할 때, 전종수의 서학은 중국인중 제일류라고 항상 말했다. 전종서는 '문학곤륜(文學崑崙)'이라는 별명이 있다. 특히 언어능력은 독보적이어서, "전무고인(前無古人), 후무래자(後無來者)"라 할 수 있다.

전종서는 비록 <모택동선집>을 번역한 바 있지만,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원인은 여영시(余英時)가 말한대로 그는 "순수한 선비이고, 조그만치도 정치적으로 위로 올라가려는데 흥미가 없고, 또한 그런 것은 회피하며 다가가지 않으려 했다." 전종서는 끝까지 입당하지 않았지만, 세상사에 통찰력이 있었따. 중공에서 역대에 일어난 정치운동에서도 전혀 다치지 않았다. 그의 처인 양강(楊絳)도 마찬가지로 선비집안 출신이지만 역시 명철보신에 능했다.

이런 말이 있다: 백성들의 마음 속에는 저울이 하나 있다. 사람들이 알고 잇는 문학가는 극소수일 수 있지만, 작가의 서열에 대하여는 사람들마다 모두 나름의 생각이 있다. 중남해에서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