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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베이징주변 댐들의 전략적 안전문제

by 중은우시 2024. 8. 28.

글: 왕유락(王維洛)

  1. 트럼프는 중국이 대만을 침범하면 북경을 폭격하겠다고 말했다.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는 미국대통령선거전의 모금활동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만일 중국이 그의 임기내에 대만을 침범하면, 그는 북경을 폭격하는 것으로 대응하겠다고. 미국대통령 바이든은 타임지와의 인터뷰때 이런 말을 한다. 그는 미국이 무력으로 대만을 보호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이는 바이든이 공개적으로 입장을 다섯번째 표시한 것이다. 북경이 무력을 사용하면 출병하여 대만을 보위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선결과가 어떻게 되더라도, 미국의 태도는 아주 명확하다. 만일 중공이 대만을 공격하면, 미국이 군사개입할 것이다. 만일 트럼프가 금년에 승리하면, 북경을 폭격할 가능성도 미군이 고려하는 수단중 하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물어볼 것이다: 미국이 정말 북경을 폭격할까? 만일 폭격한다면, 최우선목표는 무엇일까?

2. 1969년 중소분쟁이래 북경이 받은 두번째 폭격위협

미군이 정말 북경을 폭격할까?

통상적인 이치대로 분석하면, 트럼프의 말은 아마도 국내 경선의 필요에 따라 내뱉은 강력한 발언일 수 있다. 미중간에 설사 대만전쟁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큰 확률로 국부전일 것이다. 다만 전면전쟁으로 업그레이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만일 미중간에 전면전이 일어난다면, 북경이 미군의 폭격을 맏을 리스크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기실 이는 북경이 1969년이래 받은 제2차 폭격위협이다. 제1차 폭격위협은 미국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중공과 무상한 합작의 전면적 전략파트너인 전 소련 지금의 러시아에서 나왔다.

1969년 모택동과 중공종앙군사위원회의 비준을 받아, 심양군구사령원 진석련(陳錫聯)은 중소변경 우수리강에 있는 진보도(珍寶島)에서 한차례의 소규모, 통제가능한 '자위반격전'을 전개한다. 3월 2일 "중소진보도자위반격전"의 첫 충돌이 발생하고, 중국의 인민해방군의 순찰대가 돌연 중도에 만난 소련군 순찰대를 급습한다. 소련군의 절름발이 상위(上尉)는 전사한다. 처음 총을 쏜 것은 해방군의 주등국(周登國)이라는 반장이다. 소련군은 사전에 설치한 매복권내에 들어왔고, 사상자가 비교적 많았다. 다만 교전과정에서, 소련군은 무기우세를 가지고 특히 탱크의 우세를 가지고, 인민해방군에 큰 타격을 입힌다. 교전과정에서 해방군은 놀라운 발견을 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대탱크무기, 대탱크포, 대탱크로켓, 심지어 지뢰, 폭약등이 모두 소련군의 T-62탱크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소련군은 처음에 손해를 입은 후 보복을 하고자 했고, 해방군은 다시 한번 전투기회에 소련군의 신형탱크를 알아보고자 했다. 가장 좋은 것은 탱크 한대를 부수거나 획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3월 15일 발발한 "중소진보도자위반격전"의 제2차충돌이 벌어진다. 제2차충돌은 지속기간이 비교적 길었다. 주로 우수리강에 빠진 소련제탱크의 쟁탈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제2차충돌의 결과 해방군과 민병은 소련군보다 더욱 많은 사상자를 내지만, 결국 가장 선진적인 소련군의 T-62탱크를 노획할 수 있었다. 이 탱크는 해방군의 탱크와 대탱크무기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나중에 이 탱크는 북경의 중국군사박물관에 공개전시된다. 현재는 아마 중공의 소공에 대한 전리품으로 계속하여 전시하지는 않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1969년 3월 9일, 항주를 떠나 중소변경지방의 흑룡강 북대황삽대로 갔다. 3박4일의 여행을 거쳐 12일 흑룡강성 부금현(富錦縣)에 도착했다. 부금현은 1929년 중소해전이 발발하고, 중국군함이 전멸한 곳이다. 우리는 진보도의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중소변경지구로 갔다. 그리하여 중소진보도군사충돌은 필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몇년후 진보도에서 전투한 부대를 찾아갔는데, 처음 총을 쏘았던 주등국은 이미 연대의 책임자가 되어 있었다. 필자는 또한 러시아로 가서 러시아민중의 진보도전투 및 중국에 대한 견해를 알아보았다.

"중소진보도자위반격전"이후, 이전에 아무도 살지 않던 진보도는 해방군이 실제 점령하고, 섬에 영구막사를 짓고, 병력을 보내어 주둔시킨다. 다만 중소변경의 흑룡강, 우수리강에는 근 200여개의 도서가 있는데, 거의 모두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다. 만일 해방군이 "중소진보도자위반격전"을 승리했다고 말한다면, 그 결과 더 많은 국토를 잃었고, 잃은 국토를 되찾아와야 한다는 말도 덧붙여야 한다.

중소진보도사건이 발발한 후, 소련공산당지도자들은 아주 격렬하게 반응한다. 소련의 국방부장 안드레이 그레치코 원수, 부장조리 바실리 추이코프 원수등을 위시한 강경하들은 "일거에 영원히 중국의 위협을 제거하자"고 주장하며, 극동지구 중거리탄도미사일을 배치하고 수백만톤급의 핵탄두를 휴대하여 중국의 북경등 목표와 중국의 핵무기기지에 대해 훼멸적인 타격을 가하고자 준비한다. 당시 가장 병백한 징조는 바로 소련이 전략로켓군 부사령관이 극동군구사령과으로 옮겨왔다(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추가하자면, 시진핑은 여러 방면에서 러시아를 모방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해방군제2포병사령부를 로켓군으로 고치고, 새로 응급부를 만든다). 중공고위층은 이번 인사임명은 소련이 중국에 선제 핵타격을 가하는 전주곡이라고 보았다.

1969년 북경은 소련군폭격위협의 목표물이 된다. 이는 중소협력에 하한도 없다는 역사적 증거이다.

3. 소련군의 위협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모택동 후계자 임표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된다.

1969년 4월, 임표는 중공제9기 1중전회에서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정되어, 중공의 2인자에 오른다. 소련군의 위협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는 임표가 후계자에 오른 후 맡은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임표의 주요조치는 다음의 몇 가지이다:

  • 국방비를 대폭 늘인다. 1969년 국방비는 전년도에 비해 34% 늘어난다. 1970년, 1971년도 전해보다 15%, 16% 늘어난다.
  • 군비확장의 일련의 비상조치를 취한다. 예를 들어 새로 3개의 육군군부, 18개 보병사단, 보병인원이 9% 증가한다. 원래 보병사단에 소속되어 있던 다수의 탱크단을 탱크사단 혹은 탱크독립단으로 개편한다. 이를 통해 소련의 장갑부대에 대응하고자 한다. 공병부대는 16개단을 34개단으로 늘인다. 그중 다수는 3북지구(동북, 화북과 서북지구를 가리킴0로 가서 지하은폐소를 축조하도록 한다.
  • 대만해협전선의 야전군주력을 삼북지구로 이동시킨다. 에를 들어, 27군은 명을 받아 강소 무석에서 하북 장가구부근의 선화, 연경으로 이동배치되어, 주둔군인 65군을 증원한다. 장가구는 몽골에서 북경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천연장벽이고, 장가구이남은 험준한 지형이 없기 때문이다. 공군은 다시 장가구에 홍기2호지대공미사일의 몇개 방공미사일영을 배치한다. 이를 통해 현지의 방공을 강화한다. 28군은 복견에서 산서로 이동배치한다. 탱크제9사단, 고사포제67사단은 각각 강소, 산동에서 산서로 이동배치된다. 제24군은 하북 당산에서 승덕으로 이동배치된다. 63군은 하북에서 산서로 이동배치된다. 69군은 산서태원에서 북으로 옮겨 대동으로 간다.
  • 해방군의 공군, 해군과 총참모부, 총후근부는 직접 국방공업의 제2 내지 제7기계공업부 및 중앙기상국, 국가측회총국등 중요부서를 접수한다.
  • 전국각지에 방공동을 만들어 전쟁, 기근에 대비한다. 전국이 전쟁준비상태(군사관리상태)로 접어든다.
  • 중공지도자는 북경에서 전국각지로 분산된다. '일망타진'을 막기 위해서. 북경의 중앙기관은 각지의 "5.7"간부학교로 분산배치된다. 북경의 대학도 전국각지로 분산된다. 동시에 성분이 좋지 않은 가정은 북경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간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북경에서 모두 90만인구가 분산배치된다. 북경의 총인구는 650만으로 감소한다.

4. 임표: 밀운,관청,회유댐은 소련군폭격의 최우선목표이다.

소련은 고의로 중국에 대해 핵타격을 가하는 계획을 미국에 알린다. 미국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 그러나 미국은 소련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공개적으로 반대의견을 표시하기는 곤란하여, 소련의 계획을 중국에 알려준다. 1969년 8월 27일의 외신전보에 따르면, CIA국장 핼름스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련이 중국의 핵시설에 대해 선제타격하는 문제에 관하여 동유럽공산당의 파트너들과 협의하고 있다." 그후 미국측은 고의로 소련의 군사의도를 중국에 알려준다. 9월 16일, KGB출신의 소련기자 루이스는 ,런던저녁뉴스에 출연하여 소련이 중국핵시설에 대하여 핵급습을 실시하는 시험적인 경고를 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공중매체에서 소련군이 핵타격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중국이 사전에 준비할 수 있어 유리한 점이 있엇다. 다음으로 소련군은 중국에 핵타격한다는 소식이 국제여론의 관심을 끌게 되고 반대여론이 일어난다.

이들 국외의 소식은 모택동, 임표, 주은래등으로 하여금 더욱 소련군이 북경과 중국중요군사목표에 대한 타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1969년 9월 20일, 중공중앙군산위는 각 군구, 군병종사령관 및 정위들이 참가한 전군전비공작회의("삼북"작전회의라고도 함)를 소집하여, 다시 한번 소련의 기습공격에 대한 대응조치를 논의한다. 22일, 주은래는 고위장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전투를 준비하라. 이는 새로운 전략적 배치치다" 그후 며칠동안, 회의실에서 가장 많이 들려오는 말은 '소련의 습격이 곧 닥칠 것이다'였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1969년 9월 23일 영시15분 중국에서 진행된 제1차 지하핵실험이 이루어지고, 9월 29일 다시 300만톤급의 수수폭탄을 폭발시킨다. 이를 통해 소련군의 진공을 저지하거나 늦추고자 했다(일설에 따르면 중국이 두 차례 지하핵실험과 1차레의 수소폭탄실험을 진행했다고 한다). 당시 중국측은 보편적으로 소련군의 가능한 공격시간은 1969년 10월 1일이라고 생각했고,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성립20주년의 기념일이다.

나중에 임표가 모택도으이 후게자에서 중공의 반도로 바뀌면서, 임표가 1969년의 의사결정과 완전히 다른 서술이 있었기 때문에, 독자들이 모두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지금 대표적인 3가지 서술을 아래에 요약하고자 한다. 어느 서술을 취하든간에, 모두 한 가지 사실은 바꿀 수 없다; 중국의 걸출한 군사장군으로서 임표는 북경의 밀운, 관청, 회유의 3개 댐이 소련군폭격의 제1목표로 여겼다.

5. 밀운댐은 북경시에서 13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일단 폭파되면, 전체 북경이 순식간에 물에 잠긴다.

임표는 중공의 장군들 중에서 가장 먼저 댐의 안전문제에 대해 이해하고 있던 사람이다. 1949년이전에, 중국은 단지 20여개의 댐이 있고, 주로 동북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일본인이 만주국시기에 건설한 것들이다. 에를 들어 풍만댐(豊滿水庫), 수풍댐(水豊水庫)등이다. 동북지구는 해방군전쟁시기에 임표가 지도한 제4야전군의 근거지이다.

1949년이후, 모택동은 소련큰형님에게 댐건설경험을 도입했다. 홍수방지도 하면서 가뭄방지도 하며, 발전까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화대지에 대거 건설되어,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가장 먼저 건설된 댐은 북경의 관청댐(官廳水庫)공사였다.

관청수고공정은 북경과 하북의 경계선에 놓여있다. 대부분은 하북성 장가구시 회유구에 속하고, 일부는 북경시 연경구에 속한다. 댐부지는 천안문광장에서 90킬로미터의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관청수고의 상류의 상간하(桑干河)는 양하(洋河)와 만나서 영정하(永定河)릴 형성하고, 관청수고로 들어간다. 그외에 규수하(嬀水河)도 흘러들어온다. 하류는 영정하이다.

관청수고공사는 1951년 10월부터 건설을 시작하고, 1954년 5월 13일에 준공된다. 중공이전인 1954년 4월 12일 모택동이 현장을 시찰한다. 준공시의 댐총용량은 22.7억입방미터이다. 이 댐이 놓인 영정하의 평균연유입량보다 약간 많다. 보통사람의 말로 하자면, 2년의 유입량을 저장할 수 있다. 댐의 높이는 해발 485.27미터이고, 북경성의 평균높이보다 많이 높다. 관청수고댐공사의 안위는 직접 북경성의 안위에 영향을 미친다.그래서 천년만에 한번 만나는 홍수를 기준으로 설계했고, 만년에 한번 만나는 홍수를 기준으로 검사했다. 이는 중국의 댐중에서 가장 높은 기준이다. 듣기에는 괜찮아 보인다. 그러나 실제 차이는 아주 크다. 실제로 250년에 한번 만나는 홍수기준에 도달했고, 말그대로 아주 위험한 댐이었다. 그리하여 그후 관청댐공사는 여러차례 확장건설과 공고화공사를 거친다. 현재의 총용량은 41.6만입방미터이고, 중공시의 근 2배가 되었다. 독자들은 2023년 7월, 8월 북경시 문두구의 홍수로 댐공사배출시의 위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댐이 붕괴되었을 경우의 공포스러운 광경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관청댐공사는 총용량이 41.6만입방미터라고 하지만, 2023년 홍수과정에서 모두 0.7입방미터만 저장했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위험한 댐이기 때문이다. 만일 과거의 설계대로 물을 저장하게 되면, 댐의 수위가 높을수록 댐이 붕괴될 위험이 커지는 것이다. 지리적인 위치와 지형으로 분석하면, 관청수고의 붕괴로 조성될 리스크는 북경시에 있어서 밀운댐처럼 크지 않다. 대부분의 홍수는 하북의 보정등지를 수몰시켜버릴 것이다. 현재 관청수고댐은 400만위안을 들여 안전검사를 하고, 다시 돈을 들여 공고화공사를 할 예정이다.

밀운댐은 완전히 대약진의 산물이다. 이론적으로 보면, 관청댐이 있으면, 북경시의 음용수는 충분히 공급된다. 최초의 설계대로라면, 밀운댐은 주로 북경, 천진의 농업관개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다. 농업을 진흥시키고 식량을 증산하기 위함이다. 나중에 관청댐의 수질이 오염되면서, 밀운댐이 북경시의 음용수의 수원으로서의 임무를 갖게 되었다. 남수북조의 중선공정이후, 밀운댐은 윰용수 예비수원의 역할을 하게 된다.

밀운현은 원래 하북성관할이었다. 1958년 6월말 국무원은 1958년 밀운댐의 건설에 착수하기로 결정하고, 밀운현을 북경시관할로 옮겼다. 밀운댐공사는 1958년 9월 1일부터 시작하였다 .당시 밀운현은 30만인구인데, 그중 20만명이 댐공사에 동원된다. 공사는 1960년 9월에 완공된다. 밀운댐의 총용량은 계속 확장되어 지금은 43.75억입방미터이다. 곤명호 150개에 상당한다. 높이는 160미터이다. 만년만의 홍수위는 158.5미터로 계산되었고, 천년만의 홍수위는 157.5미터로 계산되었다. 최저 한계수위는 152미터이다. 최저한계수위도 북경성보다 100여미터 높다.

이렇게 하여 임표의 견해가 나타난다. 밀운댐의 면적은 180만평방킬로미터이고, 용량은 40억입방미터이다. 전체 북경성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북경시에서 거리가 13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일단 폭파되면, 전체 북경성이 순식간에 수몰당한다.

6. 당산대지진으로 밀운댐에 활파(滑坡)사태가 벌어져, 임표의 우려가 정확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1958년, 중공중앙은 밀운댐공사를 결정한다. 댐의 내진강도는진도 8이다. 즉, 지진이 발생하면, 지진의 진도가 8도에 이르더라도 댐은 안전하다. 공사는 이 기준으로 검수된다.

1976년 7월 28일 새벽 3시 42분, 하북성 당산시에서 8급대지진(일설에는 7.8급)이 발생한다. 이번 대지진은 당산을 파괴시켰고, 주위의 넓은 지역에 영향을 미친다. 밀운댐의 지진등급은 6.8급고 진도는 8이었다. 즉 설계표준내에 들어왔으므로 문제가 없어야 했다. 그러나 중국의 댐은 지면상의 표준은 아주 높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밀운댐의 백하(白河)주제방이 크게 손상된다. 백하주제방의 주체이 큰 면적이 무너지고 상황이 아주 위급했다....북경시 수리국의 문헌자료를 보면, 이번 지진으로 백하제방이 손괴된 기록이 있다: 육안으로 관측했을 때, 댐은 500미터 범위내에서 활파가 발생했다. 댐은 이미 일부 물아래로 내려갔고, 물위에 약 20미터 높이의 댐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이미 지탱을 잃었다. 만일 여진이 발생하여, 추가로 손상이 생기면, 심각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사후에 추산한 바에 따르면, 만일 당시 밀운댐 특히 백하제방이 무너졌다면, 전체 북경 내지 천진시, 보저, 하북의 계현등의 지역이 바다로 화했을 것이다. 어떤 보도에 따르면, 천안문광장이 2미터높이로 수몰될 것이라고 한다.

댐을 복구하기 위하여 해방군의 지휘관과 지방의 지도자들은 주마장부근의 산을 하나 폭파시켜 석재를 조달해서 댕이 붕괴되지 않도록 보수하기로 결정하다. 산을 폭파시키는데는 많은 폭약이 사용되었다. 폭파시에는 버섯구름이 보여 마치 원자탄을 터트리는 것같았다. 댐이 받는 압력을 줄이기 위해, 댐의 물은 방류하는데 반달간 지속되었다. 물을 모조리 방류하고나서야 멈춘다.

이러한 사실은 모두 1969년 임표가 소련군이 북경을 폭격할 때 제1목표가 댐이 될 것이고, 폭파후의 재난효과에 대해 분석하고 판단한 것이 모두 전문적이고 정확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비록 중국정부가 긴급히 산을 폭파해서 석재로 보완해서 댐이 붕괴되는 것은 막고, 댐의 물을 방류하여, 댐을 강화하는 시간을 벌었지만, 당시 중공의 의사결정층은 근본적으로 생각지 못했었다. 그후 십여년간 화북에 연이어 가뭄이 생겨, 또 다른 생태재난을 불러오게 될 줄은. 북경 내지 화북평원은 대량으로 지하수를 사용했고, 결국 지하수의 수위가 대폭 하강하여 심각한 지면침하가 발생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