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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시진핑)

시진핑의 권력이 쇠락하고 있다는 10가지 징조

by 중은우시 2024. 8. 23.

글: 진파공(陳破空)

금년 8월 19일, 여러가지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시진핑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어, 베트남공산당의 신임서기장 또럼 을 접견하여, 그에게 문제가 있다는 소문을 불식시키는 듯했다. 그러나, 외부의 의혹은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다. 가장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당매체의 촬영과 보도수법이다: CCTV는 원거리에서 환영식과 회담을 라이브로 방송했고, 나중에 정교하게 편집한 이후에 비로소 저녁뉴스시간에 근거리화면을 삽입시켰다. 여러가지 의문점은 여러가지 의문부호를 남겨놓게 된다.

8월 20일, 시진핑은 다시 모습을 드러내어 피지총리와 회견하고, 올림픽대표단을 접견했다. 외부에 보내는 신호는: 그는 모든 것이 정상적이다. 혹은 정상으로 회복했다. 시진핑이 이틀간 모습을 드러냈지만, 중국주식시장은 이틀간 크게 폭락했고, 다시 7개월만에 최저점까지 하락하여, 시장의 시진핑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시진핑이 비록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모든 것이 정상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가 병에 걸렸다는 소문을 제외하고, 중공제20기 3중전회가 폐막한 후, 여러가지 현상은 이런 점을 방증한다: 시진핑의 권세는 쇠락하고 있다. 최소한 10가지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첫째, 제20기 3중전회는 아무런 새로운 내용이 없었고, 뭐 하나 보태지도 덜지도 않았다. 5천자의 공보이건 2만2천자의 결정이건 모든 내용, 단락, 문구는 예전에 나왔던 것이고, 아무런 새로운 내용이 없었다. 반년이상 미뤄가면서 개최한 경제와 개혁에 관련한 중요회의에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둘째, 인사변동에 관하여, 부득이하게 친강(秦剛)과 리샹푸(李尙福)의 상황을 발표하고, 겨우 쑨진밍(孫金明, 로켓군참모장)을 언급한 외에 나머지 인사문제는 모조리 방치해놓았다. 특히 일찌감치 국방장관에 취임한 동쥔(董軍)은 중앙군사위위원으로 승진하지도 못하여, 원래 7명으로 구성된 최고군사기구인 중앙군사위가 인사공백으로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있어, 극히 비정상적상황이 나타났다.

셋째, 위의 두 가지 상황은 의문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3중전회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가장 큰 가능성은 정치강자 시진핑 개인에게 모종의 상황이 발생했다고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소문대로 건강문제가 있어 중풍이 발작하여, 회의일정을 급히 변경시켜 상관의제를 모두 중단하고, 방치해두거나, 혹은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넷째, 3중전회이후, 당매체, 당신문에서 시진핑의 이름과 보도, 사진과 영상까지 모두 대폭 감소하여, 끌어내리는 추세를 보였다.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이러한 점은 외부에서 추측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양의 변화가 질의 변화로 바뀌는 것인가?

다섯째, 8월에 중공고위층이 집단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분위기가 괴이했다. 이는 베이다이허회의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시진핑과 가까운 홍콩매체는 미리 고의로 이런 말을 내보낸다: "이미 베이다이허회의같은 것은 없어졌다." 이건 연막탄이고, 뭔가를 감추고자 하는 것이다. 금년의 베이다이허회의에 정치노인들이 참석했을까? 회의기간에 내부투쟁이 발발했을까? 흑막속에서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같은 시기에 당매체 당보도가 보여준 여론의 변화(아래에서 언급하는 몇 가지 점)은 투쟁이 격렬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여섯째, 몇개의 중요한 글이 간행된 후, 금방 내려졌다. 예를 들어, 신화사는 3중전회 전날 <개혁가시진핑>이라는 글을 실었는데, 3중전회가 개최되는 도중에 내려졌다; 중국사회과학원은 7월 30일 <제도형 개혁혁신을 강화하여 월항오(粤港澳, 광동-홍콩-마카오) 대만구(大灣區)를 만들 시기이다>는 철저히 홍콩의 '일국양제'를 폐지할 것을 암시했지만 8월 7일 내려진다; 샤먼대학 양안도시계획연구소가 8월 5일 발표한 <하루빨리 타이완을 접수할 준비를 시작하자>도 그후 내려진다; 이렇게 시진핑을 치켜세우거나 극좌성향의 글들이 내려졌는데 이는 모두 시진핑의 좌절이거나 혹은 시진핑을 대표로 하는 당내극좌세력의 좌절이라 할 수 있다.

일곱째, <해방군보>에 약간의 글을 발표했는데, 이는 시진핑을 빗댄 것이다. 그중 <당내정치생활은 용속화를 경계해야 한다>(7월 27일)는 글에서는 "어떤 사람은 개인을 당조직위에 두고, 가장제, 일언당(一言堂, 한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을 꾀하고 있다"고 하여 창끝을 시진핑에 향했다. 글에서는 또한 "반드시 민주집중제의 집행력을 증강관철시켜야 한다. 무릇 중대문제에 속하는 것은 모두 집단영도, 민주집중, 개별연구, 회의결정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과학적 의사결정, 민주적 의사결정, 법에 따른 의사결정을 견지해야 한다>는 글(8월 10일)에서는 "경험에 따른 의사결정, 기분에 따른 의사결정, 일도절(一刀切, 한칼로 잘라버리는)의사결정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행정회의로 당의 회의를 대체하거나, 비분문건을 보내는 방식으로 당위의 집단연구를 대체하는 방식, 개인의 의사를 전달하고, 특별한 사안을 특별하게 처리하는 방식등을 방지해야 한다." 그 창끝은 모두 시진핑을 향하고 있다.

여덟째, 이와 동시에, 먀오화(苗華)가 이끄는 중앙군사위 정치공작부는 돌연 전군에 <민주집중제>책자를 발송한다. 이는 보기 드물고 심상치 않은 일이다. 그리고 3중전회 전날, 시진핑은 돌연 허홍쥔(何宏軍)을 상장 겸 궁사위정치공작부 상무부주임으로 발탁한다. 그 뜻은 군사위 정치공작부주임이자 군대내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먀오화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몰아내려는 것이다. 시진핑은 그에 대하여 갑자기 기습을 한 것이다.

아홉째, 3중전회이후, 당매체는 장문의 글을 실어 등소평을 치켜세우고, 암중으로 시진핑을 깍아내린다. 중공의 최고이론간행물 <구시(求是)>는 전후로 4,800자의 장문으로 제목은 <등소평과학기술사상의 역사공헌>(8월 12일), 8,500자의 장문으로 제목은 <등소평동지가 개창한 중국특색사회주의의 위대한 사업으느 계속하여 앞으로 추진하여야 한다>(8월 16일)을 연이어 발표했다.

두 편의 장문은 모두 이런 글로 시작한다: "등소평동지는 전당 전군 전국각족인민이 공인하는 숭고한 위망을 지닌 탁월한 지도자이다." 그후에 더 많은 치켜세우는 말들이 나온다. 장문을 발표하여 등소평을 대거 치켜세우는 것은 시진핑시대에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시진핑은 취임한 이래 자신을 끌어올리고, 등소평을 깍아내린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모택동노선을 갈지언정 절대로 등소평노선은 가지 않았다. 이런 시대배경하에서 돌연 당매체가 이렇게 등소평을 치켜세우는 장문의 글을 발표하다니, 실로 심상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전후가 선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3중전회가 개최되기 전에 당매체는 연이어 장문을 발표하여 시진핑을 높이 치켜세웠었다. 시진핑은 "사상유례없이 강력하게 개혁을 심화하고 개방을 확대했다"고 하면서 등소평의 이름은 거명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3중전회가 끝나자마자, 어조가 완전히 바뀌어 장문의 글을 통해 등소평을 대거 치켜세우고, 글에서 시진핑은 언급하지 않거나, 가볍게 언급하고 지나갈 정도가 되었다. 이는 3중전회를 전후하여 노선이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진핑노선이 등소평노선에 패배한 것이다. 중앙고위층이 집단으로 등소평식의 개혁개방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비록 이미 때는 늦었지만.

열째, 등소평탄생기념일을 크게 기념했고, 장쩌민탄생일은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다. 8월 17일은 장쩌민의 탄생일이고, 8월 22일은 등소평의 탄생일이다. 그러나 강탱민에 대하여는 당내외에서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등소평에 대하여는 당매체에서 사전에 기념의 분위기를 띄웠다. 비록 등소평의 탄신일이 120주년이어서 관방에서 통상적으로 기념행사를 하기는 하지만, 장쩌민은 사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20대가 막 폐막한 이후인 2022년 11월), 그의 탄생기념일을 맞아 당매체에서 소식이나 기념글이나 회고글을 싣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 마디도 싣지 않아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시진핑의 권세가 몰락한다는 것이다.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시진핑은 장쩌민이 격대지정한 후계자이고, 장쩌민노선의 전인이지 등소평노선의 전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알아야 할 점은, 장쩌민이 죽은 후, 시진핑은 그의 국장으로 융중하게 규격을 넘어 거행했으며, 등소평의 장례식규격을 넘어섰었다.

주목하고 음미할 점은 당매체가 등소평을 기념하는 두 편의 장문의 글에서, 여러번 시진핑의 1992년 남방강화를 언급했다는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등소평의 남방강화는 장쩌민을 겨냥한 것이다: "누구든 개혁하지 않으면, 하야해야 한다!" 장쩌민은 하마터면 등소평에 의해 끌어내려질 뻔했다. 장쩌민이 굴복하고 등소평에게 개혁개방노선을 견지하겠다고 맹세하여야 했었다. 만일 장쩌민시대가 상대적으로 좌경이었다면, 등소평시대는 극좌이다. 당매체가 다시 등소평의 1992년 남방강화를 언급한 것은 다시 등소평이 시진핑을 친 것을 얘기한 것이다. 그러나 장쩌민은 이미 죽었다. 실제로는 당내인사들은 이를 빌어 시진핑을 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중전회가 어떻게 개최되었건, 회의도중 무엇이 발생했건, 외부에서 볼 수 있는 결과는 바로: 시진핑이 최소한 노선투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이다. 당내에서 등소평의 기치를 다시 내걸거나 다시 내걸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