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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사보의 난(沙普之亂): 명나라말기 운남(雲南)의 혼란상황

by 중은우시 2024. 8. 19.

글: 자귤(紫橘)

명나라말기의 혼란한 국면에서 이자성(李自成), 장헌충(張獻忠), 후금(後金)등 유명한 반란세력을 제외하고, 사라들이 잘 알지 못하는 서남토사(西南土司)들도 있다. 중앙정부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그들은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전후로 36년간 지속된 사보의 난(沙普之亂)이다. 사보의 난은 운남(雲南)지구에 침중한 재난을 가져왔을 뿐아니라, 운남에서 이백년간 지속되고, 거의 명나라의 존속시기와 나란히 했던 목씨(沐氏)가족의 운남통치도 끝장내게 된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1. 명나라말기의 운남

사보의 난은 운남 남부에서 발생했다. 이곳은 토사(土司)가 많고, 한인(漢人)은 비교적 적었다. 게다가 외국에 이웃하고 있었으며, 당시는 국경개념이 명확하지 않았다. 하늘 아래 모든 땅은 우리 천조황제의 영토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명나라는 국내토사들이 외국과 교류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들 토사들은 자주 불법적인 마음을 갖게 된다. <운남통지>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토추(土酋, 토착민의 두목)들은 자신의 소굴을 믿고, 십팔산채의 오랑캐도적이 여전히 활동했다." "종횡 일백여리에 크고 작은 삼백여개가 있고, 이족이 많고, 한족은 적다." 중앙왕조의 관료와 군대가 이곳에 진입하기 어렵기 때문에, 역대이래로 기미(羈縻)정책을 써서 다스렸다.

1381년, 주원장(朱元璋)은 부우덕(傅友德), 목영(沐英)으로 하여금 서남으로 진군하도록 명한다. 1383년, 주원장은 목영을 운남총병(雲南總兵)으로 임명하고, 그후 목씨집안은 운남에 뿌리를 내린다. 1407년, 주체(朱棣, 영락제)는 목씨집안의 가주인 목성(沐晟)을 검국공(黔國公)에 임명한다. 그후 목씨집안은 검국공과 운남총병의 작위와 직위를 세습했다.광남

대명 홍치6년, 서남에서 대규모의 개토귀류(改土歸流)를 실행한다. 예를 들어, 광서 남부에 광남부(廣南府)를 설치하고, 지부는 한족(漢族)이 맡지만, 동지(同知, 2인자)는 여전히 토사 농씨(儂氏)가 세습했다. 만력제에 이르러, 광남지방에 전염병이 돌아 지부인 요현(廖鉉)이 감히 현지에 취임하지 못하고, 임안성(臨安城, 운남성 건수현)에서 원격으로 광남을 통치했다. 그 결과 동지인 농사영(儂仕英)이 광남부의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당시에 이곳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를 보면 명나라때 서남에 대한 통제는 실제로 실효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2. 보명성(普名聲)의 난

명나라말기의 시국은 전국각지에서 강남이 태평성세인 것을 제외하고 모두 혼란상태였다. "군량이 부족하여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백성은 빈곤하여 도적이 일어났다." 계속되는 반란에 대응하기 위하여, 정규군이 부족한 상황하에서 명나라의 중앙정부는 토사병을 발탁하여 전투에 참가하게 한다. 저명한 부대로는 진량옥(秦良玉)의 백간병(白杆兵)이다.

보명성은 운남 아미주(阿迷州, 운남성 홍하주 개원현)의 토사이고, 검국공 목씨에 신복(臣服)했다. 다만 천계원년, 귀주, 운남에서 토사 사씨(奢氏), 안씨(安氏)의 반란이 발생한다. 명나라는 사천, 운남, 귀주, 광서, 호북 5개성의 관군을 모아서 토벌한다. 그 결과 9년의 시간이 걸려 평정할 수 있었다. 이번 반란은 직접적으로 보명성의 야심을 키워주게 된다.

보명성은 1631년초부터 각 현성을 습격하고, 유마주(維摩州, 운남 문산주 구북현)를 점거한다. 동시에 자신의 영역에 대규모로 방어공사를 시행한다. "그는 하나의 주를 점거하고, 도망쳐 오는 자들을 받아들였으며, 곳곳에 자신의 앞잡이를 두었다." 당시의 운남순무 왕항(王伉), 검국공 목천파(木天波), 순안 조홍범(趙洪范)은 연명으로 조정에 상소를 올려, 보명성을 진압하고, 유마주를 개토귀류하도록 건의한다. 조정은 그들의 건의에 동의한다. 다만 보명성은 그 소식을 들은 후, 유마주로 온 명군의 척후를 죽여버렸을 뿐아니라, 더욱 사납게 수하를 사방에 보내 약탈한다. 같은 해 6월 8일, 더 이상 참지못한 운남관부가 정식으로 조정에서 공표한 초적(剿賊)문서를 받아들고 보명성을 진압할 준비를 한다. 보명성은 바로 깃발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다. 왕항은 토벌이 순조롭지 못했다. 함정에 빠져 군사를 잃는다. 오히려 보명성이 사방으로 진격했다. 그후 보명성은 독에 중독되어 사망하고, 그의 처인 만씨(萬氏)가 계속하여 반군을 이끈다. 이때의 중앙정부는 이미 혼란상태였다. 숭정제는 이자성과 후금의 계속된 공세에 이미 피로상태였고, 서남변경까지 관리할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만씨를 초안(招安)하여 만씨의 할거를 묵인하게 된다.

3. 사정주(沙定洲)의 난

만씨는 할거에 성공하지만, 그녀는 여자였고, 정치국면을 주재할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안남 장관사(長官司, 운남 몽자현)의 사정주를 찾는다. 사정주는 안남 장관사 토사 사원(沙源)의 아들인데, 사원이 죽은 후 그는 형인 사여정(沙如淨)과 토사의 자리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사정주는 부친이 죽었고, 만씨과부는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바로 마음이 맞아 만씨는 사정주를 사위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를 도와 안남토사의 직위를 얻게 해준다. 만씨는 보씨의 재산을 완전히 승계하고, 보씨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두 사람이 연합한다. 이를 사보합류(沙普合流)라 부른다. 그후 장모와 사위는 힘을 합쳐서 사방을 침략한다. "서로는 원강(元江)에서 남으로 교지, 동으로 광남, 북으로 광서에 이르기까지 수천리에 걸쳐 세력을 키우고, 병력이 이십만에 이르렀다." 운남남부는 완전히 사보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사정주는 안남왕을 칭하고, 북경에 뇌물을 주어, 검국공의 자리를 대체하여 대대로 안남에 자리잡고자 한다.

1645년, 손가망(孫可望), 이정국(李定國)이 대서군(大西軍, 장헌충의 부대. 이때는 장헌충이 죽은 이후임)을 이끌고 남하한다. 목천파는 운남의 명군주력을 북방에 배치한다. 그러나 군대를 이끄는 장수 이대지(李大贄)가 북상하는 길에 토사들을 괴롭혀, 마침내 원모(元謀)토사의 반란이 일어난다. 목천파는 병력이 없어, 황급히 토사병을 모아서 참전하게 되는데, 사정주도 거기에 포함된다.

목천파는 지능이 떨어졌던 것같다. 그는 토사들에 대하여 전혀 방비를 하지 않았다. 병력을 이끌고 토사들에게 먼저 곤명에서 모이게 한다. 그후 이미 자신의 조상들이 200년간 경영한 검국공부에서 토사들을 접대한다. 이들 토사들은 세상이 크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곤명성의 번화함을 보고, 검국공부의 호화사치스러운 것을 보고, 침을 흘린다. 그리하여 12월 1일, 사정주는 목천파에게 떠나겠다고 하고는 백명을 이끌고 곤명성의 성문을 점령한다. 그후 대군을 이끌고 진입하여, 곤명을 점령한다. 목천파는 황급히 도망친다. 그후 사정주는 사방으로 출격하여 운남성의 반이상을 점령하게 된다.

4. 사보의 난의 후속

운남의 내란때, 장헌충은 이미 죽었고, 중원, 강남의 국토는 이미 함락되었다. 견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더 이상 내부소모는 안된다. 원래 남하할 기회를 잃었던 손가망은 그 기회를 틈타 반란평정의 기치를 내걸고 광명정대하게 운남으로 향한다. 이때의 손가망은 항청(抗淸)이라는 대의명분이 있었다. 게다가 전신 이정국이 지휘하다보니, 운남으로 들어간 후 전투는 아주 순조로웠다. 사정주는 침략한 영토를 포기하여 사씨의 본거지인 이혁룡(佴革龍, 대리 식룡산)으로 돌아간다. 이곳은 방어는 쉽고 공격은 어렵다. 손가망, 이정국은 항청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사방을 점령하면서 잠시 사정주는 방치한다. 1648년 10월에 이르러, 이정국은 사정주와 장모 만씨를 생포한다. 두 사람은 곤명에서 처형당한다. 그후 손가망은 운남남부를 개토귀류하여 운남남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 예를 들어, 아미주를 개원으로 고친다.

다만 청군이 침입해들어오면서 손가망은 배신하고, 이정국은 혼자서 버티기 힘들어진다. 할 수 없이 운남과 미얀마의 변경에서 유격전을 벌인다. 목천파는 영력제를 따라 미얀마로 들어간다. 이런 배경하에서, 사보의 잔여세력은 되살아난다. 사정주가 죽은 후, 그의 일당인 왕삭(王朔)이 사정주의 잔여병력을 끌어모아 안남, 왕농등지를 통제한다. 남명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오삼계의 상소를 받아들여 1660년 청나라는 왕삭에게 토사인신을 내리고, 운남남부의 지배를 인정한다.

결론

그후 오삼계는 운남에 자리잡고 여러 토사를 억누른다. 강희4년(1665년)에 이르러, 오삼계는 귀주로 가서 토사의 반란을 진압한다. 이때 운남에서는 돌연 오삼계가 귀주에서 병사했다는 소문이 돈다. 왕삭은 사보의 잔여세력을 끌어모아 반란을 일으킨다. 일시에 운남의 여러 지방이 진동한다. 오삼계는 급히 회군하여 일거에 왕삭을 포함한 사보의 잔여세력을 진압한다. 이리하여 36년간 지속되던 운남남부의 사보의 난은 마침내 끝이 난다. 그후 청나라는 운남남부의 각 토사의 영지를 나누어, 그들간의 갈등을 만들어, 운남남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