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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종교

천지회(天地會) 창립초기의 비밀종교특징 (2)

by 중은우시 2024. 7. 13.

글: 맹효봉(孟曉峰), 홍콩이공대학

5. 초기 천지회의 비밀종교요소

가경16년(1811년) 요본회부에는 소림사 일백이십팔승이 서로(西魯)를 정벌하고, 소림사가 불에 타고(火燒少林寺), 오조(五祖)가 소림사를 나온 이야기등을 담고 있다. 함풍,동치연간의 월중회부에는 경신비(庚辛碑, 達宗公和尙塔)이 기록되어 있고, 회장에는 가사(袈裟), 발우(鉢盂), 소주(素珠)등을 놓아둔다. 서로이야기에는 소림사, 오조 및 달마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천지회에서 도입한 불교적 요소는 그렇게 많지 않다.

가경7년(1802년) 광동 신회현의 정사도(鄭嗣韜), 임도경(林道經)등의 결회사건에 이런 기록이 있다: "때가 되어 모였다. 정사도가 목두(木斗)를 하나 사용했다. 목두의 안에는 오색종이로 깃발을 오면으로 만들었고, 그 위에는 일월청풍령(日月淸風令)이라는 다섯 글자를 썼다. 그리고 검을 2개 꽂고, 전도(剪刀), 척(尺)을 각각 1자루씩 놓았고, 동경(銅鏡)을 하나 탁자위에 놓아두었다. 황지(黃紙)에 글을 쓰고, 여러 형제가 목욕하며, 천지일월에 절했다. 각자는 홍(洪)을 성으로 삼았으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우고, 하늘을 아버지로 삼고, 땅을 어머니로 삼는다는 등의 글자를 썼다. 피를 내어 맹세하고 끝냈다. 정사도는 칼을 손에 쥐고 이렇게 말했다: 충심의기검전과(忠心義氣劍前過), 불충불이도하망(不忠不義刀下亡). ....그리고 개구불리본(開口不離本), 거수불리삼(擧手不離三)의 암호로 서로 만났을 때 쓰기로 한다. 나이를 따지지 않고, 모두 정사도를 대가로 추대하고, 맹세사를 불살랐다. 술을 마시고 각자 흩어졌다." 가경11년 복건 남평의 첨제회(添弟會)사건에서는 "정흥명(鄭興名)이 신탁(神卓)을 세우고, 만화상의 패위를 쓰고, 가운데 미두(米斗), 칠성등(七星燈)을 두고, 전도, 경척(鏡尺), 철척(鐵尺), 첨도(尖刀), 및 오색포(五色布)등 각종 물건을 놓고, 입회하는 사람들에게 칼아래 서서 서로 돕기로 맹세하게 했다. 그리고 개구불리본, 출수불리삼을 전수했다. 물건을 취하거나 먹거나 담배를 피울 때 손가락 세개를 앒으로 향하는 암호를 알려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문력(李文力)에게 구회부(舊會簿) 1부를 주었다." 이 두 가지 사례는 관방에서 기록한 천지회내 도교색채가 농후한 입회의식이다. 요본회부내에는 오색기, 전도, 칭(秤), 척, 경, 도(桃), 검등 도교기물을 제목으로 하는 잡시외에 <관성대(關聖對)>도 있다. '관성'은 '관성제군'에서 온 것으로 관우를 도교에서 모시는 신이다. 요본회부, 월중회부등에는 또한 관우의 대표적인 야이기에서 온 <오본시>도 있다. <천본시>는 "천본단원(天本團圓), 인재기중(人在其中), 삼재병립(三才幷立), 일체개동(一體皆同)"으로 되어 있고, '도원삼결의(桃園三結義)로 설명한다. <지본시>의 '신두노각(身頭露脚)'은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선 적토마로 해석할 수 있다. 다른 시도 관우와 적토마를 묘사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인본시>의 "개개무량초(個個無糧草), 대등일주인(待等一主人)"도 '주맥성(走麥城)' 고사에서 따왔다. <신본시>의 "신시홍면신(神是紅面臣), 위마대오신(魏馬帶吾身)"도 관우가 조조가 준 적토마를 타고 있다는 것이다. <수본시>의 "수본재장중(手本在掌中), 사해일반동(四海一般同), 정욕개래간(正欲開來看), 우파일진풍(又怕一陣風)"은 관우가 관우가 야외에서 촛불을 들고 '야독춘추(夜讀春秋)'하는 장면을 가리킨다. 월중회부에는 회장진설도(會場陳設圖)가 있는데, 관우의 화상을 가운데 두었다. 진설도의 우상귀에는 도교의 도부(圖符)가 있는데, 관우에게서 나온 이야기인 '온주참화웅(溫酒斬華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회부에는 관제묘(關帝廟) 도식(圖式)도 있다. 위에는 "칙봉진무관제성군(勅封眞武關帝聖君)"이라고 적혀 있다. 즉 함풍, 동치연간의 천지회는 여전히 관우를 도교의 신으로 모시고 있었다. 회장진설도에는 미두, 전도, 경척, 도리검등 도교의 기물이 놓여 있다. 또 다른 싯구와 도화에도 도교팔선(道敎八仙)이 많다. 결론적으로, 가경부터 동치연간의 천지회내에는 비교적 도교요소가 많았다. 주로 관우숭배, 팔선신앙과 회장내에 도교기물을 놓아두는 것등이 있다.

옹정연간에는 이성결배특징을 지닌 비밀회당(秘密會黨)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부모회(父母會), 자룡회(子龍會)등이다. 천지회의 창립과 거의 같은 시기에 비밀종교의 분지(分支)들도 "회(會)"라고 칭하게 된다. 예를 들면, 건륭초기 계족산대승교가 동쪽으로 전파되어 강소에 이르렀을 때, 요승 시제(時濟)는 이름을 "삼관회(三官會)"로 바꾼다. 약 건륭33년이후에는 다시 어떤 지방에서 처음으로 "용화회(龍華會)"가 나타난다. 그리하여 천지회가 "회"라고 칭한 것는 반드시 이성결배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천지회의 창립에 앞서서 비밀종교가 이미 성행하고 있었다. 천지회는 많은 비밀종교요소를 흡수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 오반교: "오본", "개구불리본", "천지"라는 회명, 오자상을 장방으로 모시는 것.

앞에서 천지회의 '오본'은 오반교(청련교의 전신)에서 왔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오반교의 '천지인신성'의 오반이 '천진인신신(수)"의 오본으로 바뀌고, 다시 '천지'와 '개구불리본'이라는 암호가 파생되었다. 가경16년이전에, 천지회는 이미 청련교의 십조 오자상(가명 오천상)을 장방으로 모셨다.

천지회는 창립초기 오반교의 영향을 깊이 받는다. 나중에 오반교가 청련교로 바뀌어가는데, 천지회도 비밀회당으로 바뀐다. 그러므로, 천지회와 청련교는 실제 동원이류(同源異流, 기원은 같고 유파는 다름)이다.

(2) 마조주기의(馬朝柱起義): 천운연호(天運年號), 주이이성, 사천기회(四川起會), 화상전회(和尙傳會), 사십팔점(四十八點)

건륭12년(1747년)부터 기주(蘄州)에 적을 두고, 강남 곽산(霍山)으로 이주하여 거주한 마조주(馬朝柱)는 백운암(白雲庵)의 승려 정수(正修)와 의거를 논의했다. 그들은 "서양출유유주(西洋出有幼主), 명주홍금(名朱洪錦, 혹은 朱洪竹), 계명후예(系明後裔)"(서양에 어린 주인이 나타나니 이름은 주홍금이고, 명나라의 후예이다) "동이개화재서양(同李開化在西洋)"(이개화와 함께 서양에 있다) "서양불일기사(西洋不日起事), 흥복명조(興復明朝)"(서양에서 곧 거사를 해서 명나라를 회복시킬 것이다)를 구호로 하여 삽혈결맹(揷血結盟)하고 부적을 삼키는 형식으로 군중을 조직했다. "매번 배맹(拜盟)할 때마다, 쌍도를 꺼내 위에 놓고 제도(祭刀)라고 하면서, 절을 한 후, 계혈주(鷄血酒)를 마시고, 다시 부적태운 물(符水)을 마셨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변발하는 바깥둘레로 머리카락을 길러 표시로 삼았다." 마조주는 또한 "태조군령(太祖軍令)"이라는 동인(銅印)을 하나 새기고, "통장산하(統掌山下), 보안사직(普安社稷), 즉수천명(即受天命), 복록영창(福祿永昌)"등의 글자를 새긴 도장, '역사(逆詞)' 찰부(札符)등을 만들었다. 밀모과정에서, 마조주는 전후로 화상 여러 명을 모으고, 건륭17년(1755년)에 거사를 하나, 곧 실패로 끝난다. 마조주는 도망쳐서 강남 파양호(鄱陽湖)등지에 숨어 지내고, 그후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가경19년(1814년) 구월, 강서 숭의현 종체강(鍾體剛)등이 천지회 결배(結拜)할 때, '조사마조주신위(祖師馬朝柱神位)'를 세운다. 가경16년, 청나라정부는 광서(廣西) 동란주(東蘭州)에서 천지회의 중요인물 요대고(姚大羔)가 전한 회부를 발견하는데, 거기에도 마조주의 이름이 있다. ...마조주가 채택한 삽혈결맹으로 무리를 모으는 조직형식, 천지회가 떠받드는 정신적지도자 즉 명나라의 후예 주홍죽 유주와 이개화의 명의로 군중을 모으는것, '반청복명'의 찰부, 역사와 영기를 만들어 퍼트리는 것, 천운(天運)연호를 사용하는 것, 그리고 특수한 변발방식을 연락신호로 삼는 것등 천지회색채가 뚜렷했다. 그리하여 어떤 지방의 천지회조직은 마조주를 조사로 모시고, 천지회 회부에 그의 이름을 형제간에 문답하고 연락하는 암호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보면, 마조주는 천지회내의 사람이고, 그가 이끈 반청투쟁도 천지회의거에 속한다고 인정할 수 있다.

마조주는 개략 강희51년(1711년)을 전후하여 태어났다. 그는 일부 군중들 사이에서 신격화되어 "과거와 미래를 아는 이인(異人)"으로 인식되었다. "마조주는 법술이 뛰어나고 재주가 아주 좋다." "그는 차천산(遮天傘), 장천선(掌天扇)으로 등운가무(騰雲駕霧, 구름위로 올라가고 안개를 부림)할 수 있다." 20세때, 꿈에 신이 나타나 그에게 말하기를 '만산구룡동(萬山九龍洞)'으로 가서 병서(兵書), 보검(寶劍)을 취하라고 한다. 그는 의거를 준비할 때, 심지어 유주 주홍금, 이개화등이 "사천 아미산 서양채(西洋寨)에 있다"는 여론을 만들어 퍼트리기도 했다. 이상의 마조주기의에 관한 기록을 엄연, 진표의 진술과 대조해보면, 엄연이 말한 만제희가 천지회를 만들어 전파하기 전에 천지회의 수령 마구룡(馬九龍)이 있었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마조주인 것이다.

마조주가 먼저 의거를 일으켰고, 그 다음에 창립된 천지회는 마조주가 의거를 일으킬 때의 몇가지 신조(信條)를 차용하게 되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천운연호. 학자 조세유(趙世瑜)의 고증에 따르면, 천운연호를 가장 먼저 쓴 것은 명나라말기이다. 마조주는 백련교의 거사를 이용하여, 내린 조서에 천운연호를 사용한다. 이는 반청표기의 최초의 실제사례가 된다. 가경19년(1814년) 남안부(南安府) 숭의현(崇義縣)의 종체강사건, 도광8년(1828년) 간주(贛州) 황백복(黃百福)사건에서도 천운연호가 사용되었다. 엄연이 진술한 마구룡 이야기는 마조주의 의거와 여러가지가 들어맞는다. 그래서 임상문의 의거때 천운연호를 사용한 것은 그의 스승 엄연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것이다.

둘째, 주이이성 및 사천기회. 마조주가 받드는 주홍금, 이개화는 엄연의 진술서에 나오는 '주이이성'이다. 천지회는 다시 '주이이성'의 기초 위에서 이성결배의 삼성 유관장(劉關張)을 본받아 공통의 성 홍(洪)을 추가하여, 이주홍(李朱洪)의 삼성이 된다.

옹정부터 건륭초기까지, 광동, 광서, 호북등의 성에서는 이매(李梅)를 우두머리로 하는 의거에서도 '주이이성'이 나타난다. 사건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리고 말하기를 교지(交趾)에 이구규(李九葵)가 육십만 병마를 모집하여 시월에 광서에 도착하여 연호귀화(年號歸化)의 찰부는 이구규에게 받아 왔다고 한다. 또한 진술하기를 한 사람이 있는데 생진팔자가 모두 임인(壬寅)이며 금년에 8살로 현재 교지, 산서, 섬서, 복건, 광서 각성에 모두 찰부가 있다고 한다. 또한 진술하기를 대만의 주일귀(朱一貴)의 아들 주삼태자(朱三太子)가 교지 소서천(小西天)에서 이미 나왔으며 무산(巫山)에 수십만명이 있다고 했다." 이곳의 주삼태자와 이구규는 동일인으로 보인다. 또한, "이씨성의 왕이 서쪽에서 오고 연호를 나평(羅平)이라고 한다는 망언을 했다." 진보기는 학자 가육현(柯毓賢)의 고증을 인용하여, 나평신앙은 <오공경(五公經)>에서 왔고 명교(明敎)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오공경>은 명청시기 비밀종교내에서 많이 사용했다. 예를 들면, 명청교체기에 복건 민현등지에 무위교(无爲敎)가 많이 활동했는데, <용성기문(榕城紀聞)>에 따르면, "(순치)을미12년, 무위교가 흥하다. <오공경>이 있고, 도참변란의 일을 얘기하는데 따르는 자가 많다." 그리고, 건륭연간, 관청은 나교전파사건의 오모주(吳慕周)의 집에서 소장하고 있던 경서(經書)중에 '사교역경(邪敎逆經)'인 <오공존경(五公尊經)>초본 1본, <호도방문(護道榜文)> 초본 1본, <홍로접속(紅爐接續)>초본 1본을 찾아내는데, 그 안에는 '계역어구(悸逆語句)'가 많았다. 오모주사건은 건륭46년 강서에서 발생한다. 그의 이름은 확실히 오삼계(吳三桂)와 그의 국호 "주(周)"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마조주의거에서 오승운(吳承雲)은 오삼계의 자손을 사칭했는데 수법이 비슷하다. 그래서, 이매의 의거와 마조주의 의거에서 모두 '주이이성'을 사용했는데 후자는 아마도 전자의 신조를 계승한 관계에 있을 것이다. 근원은 역시 비밀종교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엄연은 마조주 의거이야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천지회내의 '주이이성'은 마조주의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주홍금과 이개화가 아미산 서양채에서 거사한다는 것이 와전되어 엄연의 진술에서는 '이성,주성이 의거를 일으킨 것은 전해듣기로 사천이다."가 된다. 건륭58년(1793년) 범칠부자(范七簿子)에 나오는 "반청복명(反淸復明), 진인출재사천변(眞人出在四川邊)" 그리고 요본회부에 나오는 "군왕방재사천변(君王房在四川邊)"도 있다. 비록 마조주, 승려 정수가 제창한 비밀종교파벌은 몰랐지만, 이개화가 아미산 서양채에 있다는 신조는 개략 계족산대승교 장보태(張保太)의 재전제자(再傳弟子) 유기(劉奇)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사천 유기사건의 기록에 "이개화는 황제이다"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셋째, 화상전회와 사십팔점. 천지회내에는 "화상전회"의 전설이 비교적 많다. 마조주의거도 그 중의 하나이다. 엄연은 천지회의 근원을 진술할 때 이렇게 말한다: "이 천지회는 듣기로 주성, 이성이 일으켰고, 사천에서 전해졌다. 연도는 이미 오래되었다. 마구룡이라는 사람이 화상 48명을 모아서, 구견음병법술(驅遣陰兵法術)을 써서 분투전교(分投傳敎)했다. 나중에 48인중 죽은 사람이 있어서 수를 다 채우지 못하게 되고, 겨우 13명이 사방에서 회를 만든다. 광동에서 회를 만든 사람이 만화상(萬和尙)이고, 속명은 도희(塗喜)이다." 진표의 진술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주정원, 도원(桃元) 및 마구룡화상은 제희가 법을 전할 때 그저 그들이 모두 멀리 있는 성에 법술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실은 진위를 알지 못한다."

마조주의거가 처음 발생한 곳은 기황사십팔채(蘄黃四十八寀)의 기좌(旗座)인 나전천당채(羅田天堂寨)이다. 회부에는 왕왕 "사십팔점"이라는 말이 나온다. 예를 들어, 요본회부내에는 만운룡(萬雲龍) 묘비에 십육자 즉 "수식장림사(首識長林寺), 개산제일지(開山第一枝), 달종공묘향답(達宗公墓向答)을 새기고, 사십팔점(四十八點)을 표기로 삼았다." 즉 16글자의 모든 글자에 삼점수(三點水)를 새겼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48점수가 된다. 이는 염연이 진술한 "사십팔개화상전교"와 서로 일치한다. 그리고 "사십팔"이라는 수는 마조주가 소재하던 '기황사십팔채'에서 온 것이라 할 것이다.

천지회 가담자들과 회부내에는 화상을 많이 언급한다. 예를 들어, 홍이(방)화상 만제희, 우두머리 홍리도화상 혹은 홍삼방화상, 엄연의 진술에 나오는 "분투전교(分投傳敎)"한 화상 48인, 그리고, 회부에 나오는 소람사오조(五祖). 만제희 및 마조주의거의 승려 정수, 장보태의 제자 시제화상등은 실제로 존재한 전회화상(傳會和尙)들이다. 건륭제때 율법에 이렇게 규정한다. 승려는 48세이상이 되어야 제자 1명을 거두어 승려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만제희 화상은 제자를 여럿 거둔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속가제자였다. 그들은 확실히 정통적인 불교승려가 아니다. 이들 화상은 모두 민간에서 염불흘재하고 삼귀오계하는 사람을 부르는 말이지, 건륭연간에 도첩을 받은 화상은 아닌 것이다.

(3) 황천교(黃天敎): 삼각부(三角符), "참태홍화(參太洪化)", 복송(復宋)

건륭28년(1763년) 방관승(方觀承)은 하북 황천교 벽운사(碧雲寺)에서 '역사(逆詞)'를 발견하고, 삼각부 3장을 압수한다. 그중에는 "대왕주상(大王朱相), 주왕복조(朱王復照), 일월천하(日月天下)"등의 글자가 있었다; 그리고 "선천칙찰(先天敕札)" 1장도 있었는데, 그 안에는 "주초전어주가(走肖傳於朱家), 주가전어목자(朱家傳於木子)"(주초는 조(趙)를 목자는 이(李)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등의 말이 있었다. 여기에서 "대왕주상"등 12글자의 원래 글자는 위에 우(雨)자가 붙어 있고, 아래에는 산(山)자가 붙어 있다. 3장의 삼각부에 대응하는 것은 12글자이다. 즉 1개의 삼각부는 4글자이다. 가경13년(1808년) 광서 천지회사건에 우(雨)자를 위에 붙이고, 옆에 삼점수()를 붙인 "참태홍화(參太洪化)" 네 글자가 나온다; 가경17년(1812년) 운남 천지회사건에서 역시 우(雨)자를 위에 붙이고, 옆에 삼점수()를 붙인 "참태홍화(參太洪化)" 네 글자가 나온다. 도광28년(1848년) 전림본회부내에도 우(雨)자를 위에 붙이고, 여페 삼점수()를 붙인 "참태홍화(參太洪化)" 네 글자가 나온다. 함풍동치연간의 월중회부의 회장진설도의 정중앙에 하나의 삼각부가 그려져 있는데, 부의 아래에 '참태홍화"네 글자가 쓰여 있다. 원래 글자는 우(雨)자를 위에 붙이고, 옆에 삼점수()가 붙어 있다. 확실히 천지회의 삼각부와 "참태홍화" 네글자는 황천교와 관련이 있다. "참태홍화"의 의미에 대하여 호주생(胡珠生)은 '참태"는 "주삼태자(朱三太子, 參은 三과 같은 의미로 쓰임)"를 가리키고, '홍화'는 연호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진보기는 만제희가 천지교를 창립할 때, 처음에는 명확한 반청구호가 없었고, 한때 '복송(復宋)'을 구호로 내세웠따. 다만, 송나라는 당시와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고, 호소력이 크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복송"을 "복명"으로 고친 것이다. 그리고, "노무(盧茂)는 무리들을 혹하게 하지 못할까 우려하여, 조량명(趙良明)이라는 이름을 만들고 송황실의 후예라 했다." 건륭54년 오라나의 상소문에는 "조명덕의 본명은 조송(趙宋)이고, 28년에 진표를 스승으로 모신다. 그가 데려가서 제희를 만나고 이름을 고치며 천지회에 가입한다." 조명량이든, 원래 이름이 조송인 조명덕이건 성명에서 모두 '복송'과 '복명'의 뜻이 들어 있다. 이는 '황천교'의 '선천칙찰'중의 '주초전어주가'와 서로 이어진다.

황천교의 갈래로는 원돈교, 나조대승교(羅祖大乘敎)와 원돈교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원돈대승교가 있다. 황천교와 나교가 다시 결합하여 처주(處州)의 무위교(无爲敎)가 되고, 나중에는 요문교(姚門敎)가 된다. 원돈대승교와 오자상의 요문교가 결합하여 대승교로 개칭한다.

강서 오자상은 황천교의 중요계승자이다. 그래서 천지홰내의 황천교신조는 개략 오자상과 관련이 있다고 할 것이다.

(4) 팔괘교(八卦敎): '합동(合同)', 벽련교(白蓮敎): 도자(桃字)와 북숭아형도부(圖符)

유평(劉平)은 합동이 비밀종교내의 사람이 하늘로 올라가 무생노모(無生老母)를 만났다는 증빙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베(布), 종이(紙)등으로 만들었다. 어떤 경우는 내용을 숙지한 후에 태워버리고, 어떤 경우는 비밀리에 보존한다. 어떤 종교지도자는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 위해, 고의로 은어합동을 조작한다. 건륭연간, 수원교(收元敎) 계통의 영화회(榮華會), 수연회(收緣會)내에서 광범위하게 이런 내용의 영문합동(靈文合同)이 유행한 바 있다: "십문유도일구전(十門有道一口傳), 십인공사일자담(十人共事一子擔), 십구합통서강월(十口合同西江月), 개궁사전도장안(開弓射箭到長安). 이 네구절의 시를 '십자합동(十字合同)'이라고 부른다. 이는 암암리에 주(周), 이(李), 호(胡), 장(張)이 네 가지 성씨를 가리킨다. 어떤 종교는 <용화경>, <황극금단구련정신귀진환향보권(皇極金丹九蓮正信皈眞還鄕寶卷)>의 내용을 가지고 "합동암호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건륭가경연간 섬서, 감숙일대의 초초회(悄悄會)의 교주인 왕화주(王化周), 기전필(祁全必)은 전도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인상좌(二人上坐), 중인궤청(衆人跪聽), 균어흑야멸등(均於黑夜滅燈), 구수삼자합동(口授三字合同), 일계악수위수합동(一系握手爲手合同), 일계신설권설위구합동(一系伸舌卷舌爲口合同), 일계지심위심합동(一系一心爲心合同), 범소불상식지인(凡素不相識之人), 견차합동암호(見此合同暗號), 즉시동회(即是同會)"

유평의 글에 나오는 수원교는 건륭50년경 팔괘교로 개명한다. 합동은 일종의 증빙이다. 쓴 후에는 불사르거나 혹은 비밀리에 보존한다. "십자합동"은 탁자미어(拆字謎語)로 구성되어 있고, '삼자합동'은 수결, 신설, 권설등 암호를 포함하고 있다. 이 세 가지 합동의 공통점은 은밀하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주도의 가신(家信)과 호지(號紙)에 또 다른 합동이 있는데, '복명합동(服明合同)이다. '홍(洪)'자 북숭아형도부, 삼권(三圈)과 삼점(三點)이 포함된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확실히 천지회는 비록 비밀종교의 '합동'이라는 말을 차용하였지만, 그 형식은 특수한 복숭아형도부로 바꾸었다. 천지회내에 대량으로 나타나는 도자나 복숭아형도부 특히 진술에 나오는 우두머리 이구도는 백련교 이구도(이개화의 이명)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6. 초기천지회와 비밀종교, 이성결배조직의 모호한 한계

천지회의 성격문제에 관하여, 학계는 통상적으로 천지회는 이성결배조직이 발전한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장길발(莊吉發)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천지회는 바로 이성결배조직 및 지방성계투(械鬪)의 규모가 확대된 것이다." 그러나, 장길발의 제자인 양문요(楊文耀)는 석사논문에서, 천지회의 성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천지회의 성격에 있어서, 하나의 극히 곤란한 문제는 도성장(陶成章) 이래로 회당(會黨)의 성격규정에서 이성결배조직이 발전해서 이루어진 단체라는 것이 이미 정설이 되어, 뒤흔들기 어렵다는 것이다.

.....처음에, 청고종은 천지회를 비밀종교로 취급했다. 건륭52년(1787년) 이월 초육일, 청고종은 민절총독 이시요(李侍堯)등에게 다음과 같은 명을 내린다: "짐이 세종헌황제의 실록을 살펴보다가, 이전에 강서에 사교를 전파한 사건이 있었고, 일찌기 순무 배솔탁(裴率度)에게 조사하도록 명했었다....다만 강서성은 복건, 광동과 인접해있고, 현재 복건성, 대만은 임상문이 무리를 모아 일으킨 사건이 있는데 천지회사교의 명목으로 선동 혹세하고 결탁하여 큰 사건이 되었다. 현재 양광의 독신들이 올린 상소를 보니 광동동부에도 그 교에 가입한 자가 있다. 강서와 복건성은 접해 있으니, 아마 이런 사교가 돌고돌아 전파되어 서로 전해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북쪽 성에는 팔괘교, 대승교등의 교가 있고, 남쪽 성에는 첨제(添弟), 변전(邊錢)등 회가 있다.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뿌리는 어쨌든 백련교이다" 역시 천지회와 비밀종교를 하나로 묶어서 얘기하고 있다.....결당하는데 대하여는 이미 법률조항이 있다. 만일 천지회와 비밀종교에 비슷한 점이 없었다면, 황제와 대신들이 이렇게 둘을 혼동하며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길발 스승은 비밀종교는 교의신앙에 의지하여 스승과 제자간에 전수되어, 종적으로 종속된 관계에 있고; 비밀회당의 구성원은 가족혈연제를 모방한 형제관계로, 서로 형제로 칭하며, 맹세규장으로 서로를 구속하는 횡적으로 산만한 관계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전파방식을 보면, 회,교 간의 구별은 천지회에는 완전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제희부터 시작하여, 천지회의 전회방식은 비밀종교와 같이 스승제자간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양문요의 기본관점은 바로 천지회와 비밀종교가 어떤 때는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만일 천지회가 <삼국연의>의 도원삼결의를 모방하였다면, 회중들은 이성결배시 스승을 모실 필요가 없다. <수호전>, <설당>, <대만외기>의 이성결배가 모두 그러하다. 명말 목건의 "만성집단(萬姓集團)", 강희연간 요계성의 고시에 언급된 장주사당(漳州社黨), 옹정연간의 부모회(父母會)등은 진실로 존재하는 이성결배조직이고, 역시 스승을 모시는 내용은 없다. 그래서, 천지회내에 스승제자간에 전하는 형식은 비밀종교를 계승한 것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건륭26년(1761년) 초창기때, 회중은 제희화상을 스승으로 모셨다. 건륭32년(1767년), 제희의 제자인 노무가 사람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낟. "모두 10명이, 신에게 절하고 결맹을 맺었다. 노무는 지혜와 담량이 커서, 함께 노무를 대가로 추대하고, 하철(何哲)을 제이(第二), 임함(林咸)을 제삼(第三)으로 하며, 나머지는 나이순서로 형과 동생을 나누었다. 함께 향회주(香灰酒)를 마시고 마음을 같이 했다." 만일, 천지화창립초기에 스승제자방식으로 전했다면, 노무의 이번 결맹에는 스승을 모시는 내용이 없다. 그러므로 이는 천지회결배가 아니고, 전형적인 이성결배라 할 수 있다. 노무의거때 참가자는 300명에 달하는데, 천지회라는 명목을 내세웠다는 내용은 없다. 원인은 분명 노무가 그의 천지회신분을 널리 알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철, 임함등 10명이 천지회에 가입했는지 여부에 대하여도 확실한 기록이 없다.

건륭35년(1770년), 채오강(蔡烏强)의 진술에 따르면, "이아민(李阿閩)이 소인에게 와서 비밀리에 소인에게 말하기를, 평화현에 주씨성의 사람이 있는데, 재산이 많으니, 나에게 평화로 가서 그와 배파(拜把)를 맺자고 했다.....이아민이 다시 소인의 점포에 와서 말하기를 그 주씨성의 사람이 대사를 도모하고 있으니 그를 가입시켜, 먼저 마을의 부잣집을 털고, 다시 거사하자.....이아민은 원래 그 주씨성의 사람이 명나라황실의 후예라고 했다." 여기의 '배파'는 이성결배를 말한다. 다만 채오강은 평화현으로 가서 주진흥과 결의형제를 맺지는 않았다. 그의 수하들은 그저 '가입'했다고 했지, '배파'했다고 하지는 않았다. 건륭47년(1782년) 진표는 전회할 생각을 갖고 그의 숙부인 진곡(陳曲) 및 이적(李摘), 엄연등을 가입시킨다. 진표가 새로 가입한 숙부와 형제로 서로 칭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번 결회는 여전히 스승제자간의 전회이고, 입회는 그저 천지회에 가입했다는 의미이지, 이성결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할 것이다.

건륭53년(1788년) 월동5안중에 이성결배가 존재하는지는 아직 더 검토해봐야 한다. 5개의 사건을 심리종결한 후, 양광총독 손사의는 이렇게 상소를 올린다: "사건을 조사해보니 복건성의 사람들이 결회수당(結會樹黨)하여, 남모르게 서로를 알아보며, 향민들을 괴롭히고, 힘이 없는 자들을 능욕했다. 인원수의 다과를 불문하고, 모두 흉악곤도(凶惡棍徒)의 규정에 따라, 변방으로 보내어 충군(充軍)하도록 하겠다." 이 상소문을 보면 손사의는 이 사건을 '결회수당'의 건으로 보았다. 이성결의형제를 맺는 건으로 보지 않았다. 건륭32년(1767년) 대청률을 대거 수정할 때, 삽혈결맹, 분표결배형제는 '결회수당'과 구별하였고, 결회수당은 처벌이 비교적 경했다. 대청률에서는 삽혈결맹, 분표결배형제의 경우에는 교수형에 처하고, 만일 결회수당한 경우에는 흉악곤도의 처벌에 따라 운남, 귀주, 광동, 광서, 극변의 변방으로 충군시킨다.

첫번째 사건에서 임공유(林功裕)는 육월 이십사일, 임삼장이 소인을 자신의 서재로 불러, 탁자위에 향로를 두고, 검 두 자루를 교차하여 땅에 박고, 소인으로 하여금 검아래를 지나가게 했다. 그리고 만일 맹세를 어기게 되면 도검아래 죽는다고 맹세하게 했다." 임공유의 진술에는 "형제결배를 하여 모두 홍(洪)이라는 성을 썼다."는 내용도 있다. 그러므로 첫번째 사건에서의 천지회는 이성결배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나머지 네 사건은 형제결배에 관한 진술이 없다. 그리고 손사의의 상소에도 이성결배는 언급되지 않았다. 더더구나 죄가 극히 엄중한 분표결배(焚表結拜)는 나타나지 않는다.

가경4년, 5년, 10년의 천지회사건에서 민절관원은 여전히 "좌도이단이 인민을 선동하고 혹세하는 경우 우두머리는 교수형에 처한다. 사교사건내의 사람으로 유배를 보낼 범인은 흑룡강으로 보내어 색륜, 달호이에 노예가 되게 한다." 사건중 여전히 이성결배에 관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임상문의 천지회에는 이성결배의 특징이 있다. 대만의 임상문의거를 전후하여, 제희의 재전제자인 엄연은 임상문등에게 이렇게 말한다: "무릇 이 회에 가입하려면 반드시 향안(香案)을 놓고, 도검의 아래에서 맹세해야 한다. 만일 일이 생기면, 같은 교의 사람들은 모두 힘을 내서 공동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엄연은 다시 이렇게 진술한다. "무릇 회를 전할 때는 조용한 곳에 향안을 설치하고, 도검을 놓고, 칼아래를 지나각 하면서 회내의 구호를 전하고 형제를 맺는다. 부모처자에게도 말해서는 안되며 첩(帖)이나 부(簿)를 작성하지 않는다." 임상문은 "자주 장주, 천주(泉州) 두 곳에서 천지회를 두고 여러 사람을 모집하여, 결맹을 맺고 환난때 서로 도왔다는 말을 들었다." 임상기의거의 수령인 장정(蔣挺)은 이렇게 진술한다: "우리들은 비록 관직을 받았지만, 크고 작고를 가리지 않고 모두 임상문을 대가로 불렀다. 그를 만났을 때, 그에게 무릎꿇고 절을 하지 않는다." 복강안의 상소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임상문은 무리가 날로 많아지는 것을 보고, 맹주라 자칭하고, 순천이라는 연호를 만든다. 적당들 내에서는 임상문을 대가라고 부르고 서로 형제로 칭한다."임상문의거이후 압수된 천지회맹서서사(盟書誓詞)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지금 광동성 봉화정 고계암, 마계묘의 명주(明主)가 전종(傳宗)하여, 오늘 밤 삽혈배맹(歃血拜盟)하여 동포형제로 맺어지며 영원히 두 마음을 품지 않겠다...원래 성이 다른 사람들이어서 같은 부친에게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의리는 친형제보다 더하다. 마치 관중,포숙의 충과 같고, 유비, 관우, 장비의 의와 같다." 이 서사의 봉화정 고계암, 결의형제라는 문구는 임상문이 가입한 천지회내에 이성결배가 존재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임상문의거때, 건륭53년(1787년) 장마구(張媽求)가 장포(漳浦)에서 결회(結會)하여 호응할 때, "순천장군(順天將軍)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도장을 찍었다"는 내용이 있고, 이성결배의 내용은 들어있지 않다. 나중에 모반죄로 처벌받는다. 의거가 실패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건륭55년(1790년) 대만에서 사지(謝志) 장표(張標)의 천지회부흥사건이 발생한다. 임상문의거에 참여한 바 있는 진신(陳信)이 결회의 형식으로 전수했다. 장표의 진술에 따르면, "진신은 우리 집에 잠시 거주했다. 나는 그가 옷 속에 천지회서장 1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고, 나는 그에게 천지회는 어떻게 맺어지는지 물어보았다. 그가 말하기를 향안을 설치하고, 신의 앞에서 닭을 잡아 삽혈참도하고 하늘에 맹세를 해야 한다고 했다. 한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모두가 도와주어야 한다. 만일 어기면 칼아래 죽을 것이다. 그렇게 맹세가 끝나면, 서장을 신앞에서 불스르고, 혈주를 마신다. 회내의 사람들이 서로 만날 때면, 왼손 세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켜 암호로 삼았다. 이들 무리는 "닭을 잡아 피를 마셨다." 맹세한 후에는 서장을 불살랐다. 그리고 그후에 '장표를 대가로 모신다'. 이 사건이 종결된 후, 관리는 이렇게 보고했다: "법에 따르면 이성삽혈결맹, 분표결배형제로 20인이상이면 우두머리는 교살하고, 따른 자들은 운남, 귀주, 광동, 광서, 극변으로 충군시킨다." 이를 보면 이 사건에서는 결회와 이성결배가 하나의 의식으로 완성되었다. 붙잡히지 않고 도주한 황강주(黃江珠)는 건륭56년 복건 용계에서 천지회를 결성하고, 역시 붙잡히지 않고 도주한 진소로는 건륭57년 천주에서 '천지회(靝𪒉會)'를 만든다. 역시 붙잡히지 않고 도주한 진광애(陳光愛)는 건륭60년(1795년) 대만 봉산에서 천지회를 결성한다. 진광애사건에서 "시기가 되면 진광애등은 입회한 자들을 오산의 뒤에 있는 궁벽진 곳으로 데려가 향안을 설치하고, 향촉제물을 배열하고 각 입회자들은 모두 진광애를 대가로 부르고, 하늘에 맹세하고, 삽혈음주후 흩어진다." 역시 붙잡히지 않고 도주한 진주전(陳周全)은 진소로의거에 참가했다 실패한 후, 건륭60년 대만 창화에서 천지회를 전하고 의거를 일으킨다. 건륭51년 임상문의거이후, 관청문서에는 이성결배를 선명한 특징으로 하는 천지회조직이 대량으로 나타난다. 그후 천지회는 점차 영향이 거대한 비밀회당으로 바뀌어간다.

7. 결론

천지회는 창회초기에 약간의 비밀종교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1) 천지회는 같은 시기 오반교의 신조를 흡수하였다. 다만 '오반'을 '오본'으로 바꾸었고, '개구불리본'이라는 구결을 만든다. 오반교는 도광시기 청련교로 발전하며 오자상을 '십조'로 모신다. 천지회는 오자상을 홍장방 오천성으로 모신다.'천지'라는 두 글자는 오본중 천본과 지본에서 따온 것이다. 천지회와 청련교의 관계는 동원이류이다.

(2) 홍이방화상과 홍이화상, 홍태세는 모두 만제희를 가리킨다. 그는 천지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만제희는 전통적인 불교승려가가 아니다. 개략 어떤 비밀종교를 신봉했던 것같다.

(3) 백련교의 "이구도(이개화의 가명)"신조는 천지회내에서 도자(桃字)와 북숭아형도부로 바뀌었다. 팔괘교의 '십자합동'에 기하여, 이주도는 복숭아형도부를 가진 복명합동도식을 만든다. 이주도는 15,6세때 만제희를 따라 천지회를 개창했고, 회내에서 '홍삼방화상'으로 불렸다.

(4) 천지회는 마조주가 신봉하던 비밀종교의 여러 신조를 계승했다. 예를 들어, '주이이성', '화상전회' '천운연호'등이 그것이다. 천지회의 삼각부와 우자두의 '삼태홍화"네 글자는 황천교에서 왔다.

현재로서는 초기 천지회가 비밀종교내의 경권(經卷) 혹은 미륵(彌勒), 무생노모(無生老母) 신앙을 계승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고, 송경(誦經)했는지, 삼귀오계, 흘재를 지켰는지도 알 수 없다. 천지회는 건륭26년 창립된 후 2,30년동안 교의가 불분명하고, 이성결배의 특징이 불분명한 비밀조직이었다. 임상문의거때, 천지회는 이미 이성결배특징이 명확했다. 의거실패후, 도주한 자들이 사방에서 천지회를 전하면서, 입회와 이성결배가 하나의 의식에서 완성되는 사례가 아주 많다. 비밀종교의 특징이 점점 약해지면서, 천지회는 가경이후 이성결배의 특징이 선명한 비밀회당으로 바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