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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종교

천지회(天地會) 창립초기의 비밀종교특징 (1)

by 중은우시 2024. 7. 12.

글: 맹효봉(孟曉峰), 홍콩이공대학

  1. 서론

청나라초기, 청나라조정은 이성결배(異姓結拜, 성이 다른 사람들이 의형제를 맺는 것)가 정권에 위해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순치제 말기 "무릇 피를 내서 맹세를 하고, 문서를 불지르며 결의형제를 맺는자는 법에 따라 처벌한다."고 반포하고, 건륭제말기에는 "반역미수죄(謀逆未行)" 심지어 "모반죄의 경우 수괴인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는 사례에 따라 일률적으로 참형에 처한다."라고 하여 처벌이 갈수록 강화되었다. 복건(福建)은 이성결배가 극히 성행하였다. 강희19년(1680년) 복건총독(福建總督) 요계성(姚啓聖)은 사당(社黨)을 맺는 것을 금지하는 고시를 반포한다. 그 안에는 이런 말이 있다: "최근 듣기로 복건성의 각 지역에서 흉악한 자들이 자칭 대가(大哥, 큰형님)라고 하면서, 피를 뽑아 신에게 맹세하며 결의형제를 맺는다고 한다. 혹은 무리가 백여명에 이르고, 혹은 삼백, 오백명에 이른다고 한다." "만일 대가를 창립하고, 피를 뽑아 맹세하며, 무리를 지어 해를 끼치는 경우, 소문이 들리거나, 고발을 해오면 주범과 종범을 가리지 않고 일률적으로 엄히 처벌한다. 새로운 법률에 따라 사형에 처한다. 부모형제나 친구들이 이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으면 중죄로 처벌한다." 건륭53년(1788년), 복강안(福康安), 악휘(鄂輝)는 이렇게 상소를 올린다: "대만의 백성들은 사납고, 풍속도 거칠다. 강도짓을 많이 하고, 회와 맹을 만드는 것이 특히 악습이다." 광동 동쪽의 민풍도 대체로 비슷했다.

청나라초기에서 청나라중엽에 이르기까지, 비밀종교는 북에서 남으로, 서에서 동으로 널리 퍼진다. 건륭초기, 원돈교(圓頓敎), 계족산대승교(鷄足山大乘敎), 나교(羅敎)등이 강서(江西)에 함꼐 모여 서로 섞여서 통칭하여 "재교(齎敎)"라고 불렀다. 신도들이 많은 경우 삼귀오계(三皈五戒), 흘재염불(吃齎念佛)을 신봉하므로 민간, 심지어 관청에서도 교파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다만 이성결배가 비밀리에 성행하던 복건, 광동지역에서 비밀종교는 선교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천지회의 창립은 이렇나 선교방식의 변경과 관련이 있다. 본문에서는 건륭, 가경연간 천지회 가담자들의 진술, 회부(會簿)와 관청문서에 근거하여, 창립초기 비밀종교적 특징이 있었는지 여부를 분석해보기로 한다.

2. 홍이방(洪二房)의 신분분석

"홍이화상(洪二和尙)"은 건륭말기 청나라조정이 천지회의 기원을 추적조사할 때, 천지회 가담자 행의(行義), 진표(陳彪)등이 진술한 천지회의 창립인이다. 건륭54년(1789년), 민절총독(閩浙總督) 우라나(伍拉納), 복건순무(福建巡撫) 서사(徐肆)는 보고서를 올려 천지회는 복건(福建) 장포(漳浦)의 승려 제희(提喜), 즉 "홍이화상"이 건륭26년(1761년)에 창립하였다고 하였다. 건륭54년(1761년) 건륭은 복강안에게 영을 내려 이렇게 지시한다: "천지회는 조사를 해본 결과 홍이화상이 창립했다. 지금 행의의 진술에 따르면 그의 부친 제희가 바로 홍이화상이다. 즉 제희가 이 사건의 주범이라는 것이 의문의 여지 없다." 가경11년부터 16년(1806-1811)에 이르기까지, 강서의 주달빈(周達濱), 노성해(盧盛海), 종고재(鍾高才)와 요필영(姚必英)등이 삼점회(三點會)를 결성할 때, "이전에 회를 전해준 만대가(萬大哥) 즉 홍이화상의 위패를 세웠다." 이렇게 여전히 홍이화상 만제희를 받들어 모셨다.

채소경(蔡少卿), 진보기(秦寶琦)등은 여러 관방기록에 근거하여, "홍이화상"은 천지회의 창시자 만제희라고 보았다. 만제희는 개략 강희58,59년(1719-1720)에 태어나서 건륭44년(1751년)에 복건 장포현 고당촌(高塘村, 지금의 운소현 동하향에 속함)에서 사망했고, 속명은 정개(鄭開)이고, 승명은 제희(提喜)이며, 도희(塗喜)라고도 한다. 형제는 3명으로 그는 둘째이다. 중년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홍이화상"이라고 불린다. 처음에는 인전사(寅錢寺)에서 거처하다가, 나중에 고계촌의 관음정(觀音亭) 주지가 된다. 천지회의 <회부>에 있는 <서로서(西魯序)>에서 복건 운소 고계에 거주하는 '시조'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홍이화상 만제희를 가리키는 것이다. 진보기가 인용한 <회부>는 즉 함풍, 동치연간 월중회부초본(粵中會簿抄本)이다. 이 회부의 <소주패(素珠牌)>의 그림 옆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비룡갑인년(飛龍甲寅年), 칠월이십오일(七月二十五日), 축시생(丑時生). 기수불리삼(起手不離三), 개구불리본(開口不離本), 본성홍(本姓洪), 홍화정시야(洪花亭是也). 시조거주복건운소(始祖居住福建雲霄), 고계(高溪), 홍태세(洪太歲)." 운소, 고계, 홍화정등은 모두 만제희가 건륭26년에 천지회를 창립한 장소이다. 그리하여 진보기는 이곳의 시조를 만제희라고 추측했다. 소주본은 불경을 낭송할 때 쓰는 염주이다. 그래서 이 그림의 곁에 있는 홍태세는 당연히 화상이다. 그래서 이렇게 추정해볼 수 있다. 홍태세는 시조 홍이화상 만제희의 화명(化名)이라고.

천지회 가담자는 또한 "홍이방화상(洪二房和尙)"에 대하여도 진술한다. 임상문(林爽文)의 반란에 참가한 바 있는 양영(楊詠), 양헌(楊軒) 두 가담자는 이렇게 말했다: "소인들이 엄연(嚴煙)이 천지회의 기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은 바로는 , 광동에 홍(洪)씨성을 가진 화상이 있는데 홍이방이다. 그가 한 주(朱)씨성의 사람과 같이 만든 것이다. 홍이방화상은 후계봉화정(後溪鳳花亭)에 거주하는데, 어느 부 어느 현에 있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다시 천지회의 근원에 대하여 진술하기를, 광동동부에서 기원했고, 화상 홍이방 및 주씨성의 사람이 만들었다." 임상문에게 회를 전해준 엄연은 이렇게 진술했다: "천지회를 만든 주씨성의 사람은 주정원(朱鼎元)이다. 전도를 도운 이(李)씨성의 사람도 있는데 이름은 실로 모르겠다. 이들 두 사람이 홍(洪)자 암호를 전해서 그래서 홍이방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시 진술하기를, "천지회에서 말하는 홍이방화상은 실제 있는 사람이 아니다. 주이이성(朱李二姓, 주,이의 두 성씨인물) 및 만화상을 총칭하는 말이다."

건륭제는 천지회의 기원을 "홍이화상"이라고 인정하고, "홍이방화상"의 존재는 부정했다. 실제로, "홍이화상"은 만제희가 출가전에 집안의 둘째이기 때문에, "홍이방회상"이라고 한 것이고, 그 뜻은 "홍이방"이 단순히 창회자의 한명이라는 것이다. 만일 건륭제가 엄격히 명을 내려 "홍이방화상"의 신분을 캐냈더라면, 분명 각성의 주,이씨 성의 인물과 '홍장방(洪長房)' 및 홍삼방, 홍사방등도 조사해야했을 것이다. 그러면 여러 관리들은 대응에 피곤했을 것이고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도 에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여러 관리들은 만제희의 속가집안에서 둘째라는 우연을 이용하여, '홍이회상'이 바로 만제희이고 유일한 천지회창립인이라고 결론을 내려 급하게 건륭제에게 보고한 것이다. 그리하여 더 이상 주이이성과 홍이방은 더 이상 조사하지 않았다.

월중회부의 또 다른 기록에 는 후오방(後五房)이 나와 있다: 오천성(吳天成), 홍대세(洪大歲, 洪太歲), 이식제(李識弟), 도필달(桃必達), 임영소(林永昭). 가경16년(1811년) 요대고본회부(姚大羔本會簿)의 <수선성(水先成)> 시에는 이런 말이 있다. "열회내오방(列會內五房), 의차위(依次爲) 장방오천성(長房吳天成), 이방홍대세(二房洪大歲), 삼방이색지(三房李色地), 사방도필달(四房桃必達), 오방임영초(五房林永招)" 회부 <금낭전(錦囊傳)>에는 홍태세가 서열2위로 나와 있다. 회부에는 많은 경우 "홍태세"를 홍이방으로 적었다. 다시 위에서 인용한 관방문건과 진술서에 나오는 창시자정보를 보면, 이렇게 추정할 수 있다. "홍이화상"과 "홍이방화상", "홍태세"는 모두 천지회의 시조 만제희를 가리킨다고.

3. 홍삼방의 신분분석

천지회내에 "홍이방"이라는 칭호가 존재했다는 것은 은연중에 창립자가 1명만이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건륭말기 천지회의 여러 가담자의 진술서에는 '주이이성, 주홍죽(朱洪竹), 주홍덕(朱洪德), 주정원, 홍삼방화상(洪三房和尙)등의 창회인물이 등장한다. 그외에 일부 가담자는 "도(桃)"를 이름으로 하는 중요인물을 진술한다. 예를 들어, 홍리도(洪李桃), 이구도(李九桃, 李九陶) 혹은 주구도(朱九桃)등등. 이들 주, 이, 홍씨성 혹은 성명에 "도"자가 붙은 인물은 붙잡히지 않았다. 건륭말기의 천지회인물인 "이주도(李胄桃)"는 이도(李桃), 이아도(李阿桃)라고도 했다. 그는 주이이성중 이씨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이름에 '도'가 들어 있다. 천지회내의 '도'와 관련된 정보와 건륭말기 '소신안(捎信案)'의 세부냉ㅇ을 살펴보면, 이주도의 진실한 신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 "도"자와 복숭아도형부호

건륭말기 천지교 가담자들의 진술에는 "도(桃)"자가 많았다. 혹은 성, 혹은 이름, 혹은 중요한 은어로 쓰였다. 건륭52년(1787년) 가담자 임공유(林功裕)의 진술에 따르면, 그의 사매(師妹) 임삼장(林三長)이 말하기를 천지회 창립때, "주홍덕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선도(仙桃)를 먹고 잉태하여 낳았다고 한다. 나이는 약 15,6세였다." 뇌아력(賴阿力)의 진술에 따르면, "본회의 두목으로 홍이도가 있는데, 나이는 사십여세이다. 속가는 장포현 용수(榕樹) 아래에 있고, 장주 용계현 동문밖의 복련사(福連謝)에서 화상으로 있다. 그 자신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 임아준(林阿俊)은 이렇게 진술했다: "양아보(梁阿步)가 나를 끌어들여 입회시킬 때, 말하기를 두목은 이구도(李九陶_이며, 평화현(平和縣) 소계향(小溪鄕)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외에 홍리도는 화상인데, 원적주소는 역시 뇌아은(賴兒恩)이 진술한 것과 일치한다." 건륭57년(1792년) 복건 동안현(同安縣) 사람인 진소로(陳蘇老)와 소엽(蕭葉)등이 별도로 천지회(靝𪒉會, 天地會)를 결성할 때, 진소로는 이렇게 말했다: "듣기로 광동 석성현(石城縣) 고계사(高溪寺)에도 천지회가 있다고 한다. 그 우두머리는 홍삼방이다. 성은 주(朱)이고 이름은 홍죽(洪竹)이며, 구도(九桃)라고도 한다. 올해 사월에, 본성 심청(深靑)지방에서 두 명의 장발대수화상(長髮大袖和尙)을 만났는데, 길에서 얘기를 나눌 때 말해서 그렇게 들은 것이다. 그 화상의 사투리는 광동사람이었다. 그러나, 홍삼방이 주구도라는 것은 소인이 알지 못하는 말이다." "진강(晋江)등 현의 비도(匪徒)들이 다시 사람을 모으고 있는데, 홍삼방을 얘기하고 성은 주이고 이름은 홍죽이라 한다. 또한 구도라고도 한다. 광동 석성현 고계사에서 천지회를 세웠다."

천지회내에서는 자주 "이도(李桃)"라는 두 글자를 많이 썼다. 임상문의 스승인 엄연은 이렇게 진술했다: "진표가 일찌기 나에게 두 마디의 말을 전했다. 삼성결만리도홍(三姓結萬李桃紅), 구룡생천이주홍(九龍生天李朱洪). 이것이 바로 천지회의 뿌리이다." 임공유의 또 다른 진술에는 이런 싯구가 있다: "삼천결배이도홍(三千結拜李桃紅)". 건륭56년(1792년) 곽세훈(郭世勛)은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건륭51년 시월내에, 첨청진(詹淸眞)이 사적으로 첨함휘(詹含輝)에게 말해 그를 입회시키면서, 말하기를 가장 먼저 천지회를 전한 사람은 이(李), 도(桃), 홍(紅) 삼성(三姓)이었다고 했다." 또 다른 요본회부에는 <이구저(二九底)>라는 싯구가 있는데, "결만화동이도홍(結萬和同李桃紅), 순천홍수횡류범람어천하(順天洪水橫流泛濫於天下)"이다. <사칠저(四七底)>에는 "삼성결만리도홍(三姓結萬李桃紅)"이라는 구절이 있다. 요본회부에는 또한 홍사망(洪四房)의 이름을 "도필달(桃必達)"이라고 적어놓았다.

복숭아(桃)형 도형부호는 많은 천지회문건에 나타난다. 건륭57년 진소로사건의 도인(圖印)에는 이도형(二桃形) 도형부호와 천지(靝𪒉)라는 두 글자가 곁에 쓰여 있다. 진소로사건때 붙잡히지 않고 도망친 가담자인 진주전(陳周全)은 건륭60년(1796년) 대만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 "다시 나무도장을 새겨 4각에 '수앙공제(竪仰攻濟)' 네 글자를 새기고, 가운데에는 복숭아모양으로 만들고, 복숭아의 가운데에는 작은 글씨로 '주(朱)'라고 적었다." 반란군의 고시에는 "대맹주주(大盟主朱)", "천운을묘년삼월십육일급(天運乙卯年三月十六日給)라고 적어놓았다. 가경9년(1804년)에는 한 가담자가 "천부령(天俯令)"이라는 명칭을 "천지회(天地會)"를 대체하여 썼다. 즉, "지(地)"라는 글자 대신에 "부(俯)"를 쓰고, "회(會)"자 대신에 "영(令)"자를 쓴 것이다. 나무도장의 "부(俯)"는 "지(地)"이고, "공(攻)"은 "지(地)"와 모양이 유사하다. "제(濟)"는 "기(旗)"와 발음이 유사하다. 그러므로, "수앙공제"는 결국 "수천지기(竪天地旗, 천지회의 깃발을 세우다)"라는 뜻이다. 진주전사건에서 "주"자가 포함된 복숭아도형부호, "수공앙제"라는 암호글, "대맹주주"라는 말등은 천지회의 주구도를 받들어모신다는 의미이다.

소신안의 이주도가 그린 천지회호지(號紙)와 서신내에는 모두 3개의 복숭아도형부호가 있다. 복숭아내에는 모두 "홍(洪)"자가 쓰여 있다. 그외에 가경연간 주달빈화첩(周達濱花帖), 요본회부에도 그린 방식이 비슷한 복숭아도형부호가 있다.

복숭아도형부호는 아래쪽으로 뾰족하고, 복숭아 안에는 문자(洪, 朱등)가 쓰여 있다. 윗부분의 줄기부분에는 복숭아잎을 여러개 펼쳐져 있다. 복숭아 안에는 "홍", "주"라는 글자가 있다. 그 의미는 홍 혹은 주씨성을 가진 인물이 복숭아에서 잉태되어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는 양영의 진술에 나오는 15,6세의 주홍덕이 "선도를 먹고 잉태하여 태어났다"는 말과 대체로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천지회가담자의 진술서중에 나오는 "이구도(李九桃, 李九陶)"는 또 다른 출처가 있다. 이개화(李開化, 혹은 李開花)의 가명이라는 것이다. 옹정5년(1727년) 산서백련교(山西白蓮敎)사건의 관리가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적빈여(翟斌如)는 평소에 풍수와 점복을 익혀서 헛된 말로 사람들은 홀렸다; 주삼(周三), 장봉금(張鳳錦)등과 함께 섬서(陝西) 반도(潘道)사람으로 이름이 봉지(鳳池)인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반도사람은 이개화(李開化), 즉 이구도(李九桃)를 보좌하여 섬서에서 거사하고자 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요본회부 <예고시(翳鼓詩)>에는 "금년이백도정홍(今年李白桃正紅), 화개결자조야우(花開結子遭夜雨)". '반문방옥(盤問房屋)" 문답사에는 "좌변도(左邊桃), 우변리(右邊李), 도리개화복명시(桃李開化復明時)"라는 구절이 있다. 이 두곳은 도리(桃李)를 나란히 언급할 뿐아니라, "이개화"라는 이름까지 나온다. 월중회부내에는 "도리검(桃李劍)"이라는 제목의 신화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거기에도 '도리검'이 나온다.

천지회내에 "도"를 포함한 정보는 특히 천지회내의 "이개화" 및 "이구도"에 대한 것은 모두 민간의 '이개화'전설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는 선명한 반청(反淸)색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 첨청진사건의 "이주도(李胄桃)" 수수께끼.

건륭53년(1788년) <양광총독 손사의(孫士毅)의 천지회 허아협(許阿協)등 사건정황에 대한 주절(奏折)>에서 손사의는 월동오안(粵東五案, 광동동부의 5개 사건)을 상세히 보고했다. 그중 네번째 사건에는 9명의 가담자가 있는데, "첨청진, 여번타(呂番他), 여아길(呂阿吉), 여연(呂煙), 여서(呂敍), 이철(李掇)의 6명은 조안(詔安)사람 여하(呂河)가 끌어들였다. 여하의 스승은 허아협 사건내에서 임공유에게 전한 임삼장이다. 그리고 이미 입회했지만 아직 결의형제를 맺지 않은 자로는 이아피(李阿被), 이아도(李阿桃), 여아만(呂兒滿)의 3명이 있다." 첨정진등 6인은 "흉악곤도(凶惡棍徒)의 사례에 따라 이리(伊犁, 신강의 지방)로 유배보낸다" "급히 체포되느라 아직 결의형제를 맺지는 않았지만, 이미 입회한 자들도 같이 처리한다."

건륭56년(1791년) 첨청진과 이주도(즉 월동오안의 이아도)는 다시 사건에 연루된다. 즉 "첨청진이 신강의 유배지에서 유조괴(劉照魁)에게 부탁하여 비밀서신을 보낸 사건"이다. 여기에서는 간략히 "소신안"으로 칭하겠다. 섬서순무 진승은(秦承恩)은 이렇게 보고했다: "요평현(饒平縣) 천지회사건내의 범인 첨청진이 고향으로 서신을 보내겠다고 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첨청진은 종이 2장을 주면서 광동으로 가서 그의 가족에게 보여주면 반드시 크게 후사할 것이라고 했다. 그 범인은 이익을 꾀하여 가지고 갔다....첨청진은 카슈미르에서 알게 되었다. (유조괴는) 천지회에 가입한 사실이 없다. 그가 받은 종이는 첨청진의 말을 그대로 믿어 고향으로 가져다주면 크게 보답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종이에 쓰인 글자는 글을 모르기 떄문에 첨청진등에게 사실인지 물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유조괴는 나중에 이주도를 만나, "역시 그의 가족에게 보내는 서신을 함께 휴대했다." "유지괴의 진술에 따르면 종이는 두 개이다. 실은 첨청진이 준 것이고, 필적을 대조하면, 이도가 가족에게 부친 서신과 같다. 이도의 서신도 첨청진이 준 것인지의 여부에 대하여는 현재 캬슈미르로 공문을 보내어 확인중이다." 호지(號紙)는 이주도가 쓴 것이고, 첨청진이 말한 "종이안의 암호는 광동의 각곳에서는 모두 안다. 광동인들은 천지회에 가입한 사람이 아주 많다." 나중에 유조괴가 섬서 위남에서 체포되어, 소신안 사건이 발각되었다.

이주도가 첨청진에게 준 2장의 천지회호지는 위에 "결만부명리도홍순천(結萬扶明李桃洪順天)" "순천복명합동(順川服明合同)" 혹은 "순천복명합화동(順天服明合和同)"이라는 글자가 있다. 그 서신에는 또 다른 복숭아도형부호를 가진 "복명합동(服明合同)이 있다.

소신안의 이주도에게는 특수한 점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첫째, 이주도가 쓴 호지문자에는 '이도(李桃)'가 포함되어 있고, 복숭아형도형부호도 있다. 그 성명은 엄연이 진술한 천지회의 근원을 읊은 시 "삼성결만이도홍(三姓結萬李桃紅)"에 들어 있다.

둘째, 이주도가 쓴 호지와 가신을 팔괴교(八卦敎) 유조괴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휴대하여 전하게 했다. 첨청진이 처음에 서신을 부탁했을 때, 유조괴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첨청진은 이주도가 쓴 호지를 유지괴에게 보여주었고, 광동에 도착하면 크게 후사할 것이라고 말하자, 유조괴가 동의했다. 유조괴는 다시 이주도를 만나 서신을 부탁받는다. 이번에는 유조괴도 바로 응락한다. 유조괴는 섬서 위남 사람이고, 북으로는 신강까지, 남으로는 운남, 광서, 광동까지 가고, 동으로는 산동까지 가서 견식이 넓고 돈도 많았다. 또한 동진장교(東震掌敎) 왕자중(王子重)의 중요한 부탁을 받아 팔괘교의 부흥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단순히 첨청진, 이주도가 나중에 돈을 줄 것이라는 말만 믿고 유조괴가 목숨을 걸고 서신을 휴대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이주도의 신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호지, 서신도 중요한 신물이다.

셋째, 이주도가 진술하기를 자신은 글도 알지 못하고, 유조괴를 만난 적도 없다고 했다. 소신안이 발발한 후, 신강의 카슈미르대신 명량(明亮)은 이렇게 보고한다. "이아도 즉 이도는 진술하여 말하기를 자신은 문자를 모른다고 했다. 도시로 나가 차를 살 때, 첨청진을 만났고, 산동에서 온 사람이 광동으로 친척을 만나러 가는데, 나에게 가족들에게 보낼 서신이 없는지 물어보아서, 나는 첨청진에게 대신 써서 부쳐달라고 했다. 서신의 내용은 읽어보지 못했고, 유조괴를 만난 적도 없다." 이 진술은 확실히 첨청진이나 유조괴의 진술과 모순된다. 비록 믿기 힘들지만, 이주도는 서신과의 연루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를 보면 이주도는 교활한 측면이 있다.

넷째, 이주도는 "홍리도(洪李桃), "이구도(李九桃)"와 이름이 아주 비슷한데도 엄히 조사받지 않았다. 건륭53년에 건륭제는 명을 내려, "손사의가 조사해낸 홍, 주 두 개성의 승려는 모두 범인이 아니다. 그러나 내지에 남겨둘 수는 없다. 앞으로 이리로 유배를 보내 노예로 삼으라. 이를 통해 뿌리를 뽑고 백성을 선동하는 일을 막도록 하라." 여기에서 홍,주 두 성의 승려라 함은 홍랑(洪郞), 홍과(洪科), 주립숭(朱立嵩)의 세 사람이다. 이미 무고하다고 밝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뿌리를 뽑아야" 하기 때문에 이리로 유배를 보낸 것이다. 월동오안에서 홍리도와 이구도가 우두머리라는 진술은 이미 나왔다. 이주도는 이미 천지회에 가입이 허용되었고, 위의 우두머리들과 이름이 같다. 이런 상황이라면 앞의 세 승려보다는 훨씬 엄중한 사건이다. 더더욱 '뿌리를 뽑고, 백성을 선동하는 일을 막아야' 하는 일에 속한다. 그러네 캬수미르로 유배보냈다. 손사의가 이주도를 가볍게 처벌한 것은 통상적인 사건들의 경우와 부합하지 않는다.

(3) 이주도의 신분분석

이주도의 두 장의 호지내용은 대체로 비슷하다. 월동오안의 요평현 허아협의 진술을 보면, "순천행도합화동(順天行道合和同)"있다는 말이 있다. 이 문구는 바로 호지의 "순천복명합화동"과 부합한다. 호지의 두개의 복숭아모양의 필획과도 일치한다. 이는 자주 연습한 후에 그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주도의 서신에는 또 다른 천지회의 빙기(凭記)인 "복명합동"이 있다. 역시 복숭아모양과 원 세개, 점 세개가 있다. 이를 통해 추단해볼 수 있다. 이 세 곳의 복숭아도형은 모두 이름이 '복명합동'이라는 합동형식이다. 팔괘교에는 유명한 '십자합동(十字合同)'이 있다. 그리고 팔괘교의 왕자중은 이때 이주도와 같은 유배지인 캬슈미르에 있었따. 개략 이주도는 왕자중과 이미 연락한 것같다. 팔괘교의 신조를 받아들이 ㄴ후, 천지회내의 "합화동"을 "합동"이라는 두 글자로 바꾸고, "복명합동"을 그린 것이다.

호지의 "결만부명이도홍순천"이전의 일곱글자는 엄연이 진술한 천지회의 근원이라는 "삼성결만리도홍"에 대응된다. 복숭아도형의 내부에는 "홍(洪)"자가 있어, 이는 분명히 "홍"이 복숭아에서 잉태되어 태어났다는 것을 가리킨다. 즉, 이주도가 직접 쓴 그의 성명의 근원문자를 직접 북숭아도형에 그렸고, 분명하게 그가 천지회를 잉태하여 태어나게 한 '홍'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만일 이주도가 '이미 입회했지만 아직 결의형제를 맺지 않은" 지위였다면 이미 입회한 첨청진(감생의 아들)은 이주도가 "이도홍"이라는 호지와 복숭아도형부호를 쓰는 것을 봤다면 아마 참월(儳越)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정반대로 첨청진은 목숨을 걸고 이 호지를 보존했다. 만일 이주도가 천지회의 창시자로 자처하고, 첨청진도 이주도를 창시자중 하나로 보았다고 한다면, 호지의 특별한 점은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우라나는 이렇게 상소를 올렸다: "엄연이 진술한 바에 따르면, '삼성결만리도홍, 구룡승천주리홍(九龍昇天朱李洪)"이라는 싯구는 진표(陳彪)의 입으로 전해졌다. 거기에 언급된 이름은 마땅히 그에게 물어봐야 한다....주리도는 단지 이소민(李少敏) 한 사람만 만났고, 주정원, 도원(桃元) 및 마구룡(馬九龍)화상은 만제의가 법을 전할 때 그들이 모두 먼 성에 법술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는데, 실로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른다고 했다." 우라나는 싯구에 숨겨놓은 이름을 이소민, 주정원, 도원, 마구룡등이라고 해석했다. 이소민이 확실한 범인인 것외에 주, 도, 마는 멀리 있는 성의 사람이어서 붙잡아 넣을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실제로 '이도' 혹은 '이도홍'이 싯구에 숨겨놓은 이름일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그리고 진술중 우두머리인 홍리도 혹은 이구도 그리고 사건당사자인 이주도가 가장 근원시에서 말하는 '이도'에 근접하는 인물이라 할 것이다.

건륭53년의 진술에 따르면, '홍리도'의 나이가 개략 40여세라고 했는데, 건륭56년의 이주도의 부친 이석(李錫)과 장인 여찬(呂瓚)은 모두 사망했다. 이를 통해 추측해보면, 이주도의 당시 나이는 개략 40-50세라고 할 수 있다. 진술에 나오는대로 건륭26년에 15,6세의 주씨성의 소년이 천지회를 창립했다면, 그 소년이 근 30년후에는 홍리도 혹은 이주도의 나이와 대체로 비슷할 것이다.

명나라때의 인물인 왕사성(王士性) 은 하남(河南)의 승속(僧俗)의 한계가 혼동되어 있다는 점과 비밀종교결과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주(中州)의 승려는 지금까지 도첩(度牒)을 받지 않는다. 오늘 머리를 깍고 중이 되고, 내일 머리를 기르고 속세로 돌아온다. 이렇게 자유자재로 오간다. 그래서 백련교가 흥성하면, 수천수백의 무리가 거기에 가입하고, 관청이 조사해서 확인할 수가 없다. 도둑들도 삭발을 하고 비구가 되고, 사건이 잠잠해지면 다시 속세로 돌아온다. 승려복장을 하고 있더라도 술과 고기를 먹지 않는 자는 백명에 한명도 없다." 즉, 홍리도는 아마도 "오늘 머리를 깍고 중이 되고, 내일 머리를 기르고 속세로 돌아오는" 사람일 것이다. 월동오안의 이주도는 속가의 '민간' 신분으로 붙잡혔다. 같은 사건의 다른 사람들이 감히 사실대로 진술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홍리도(혹은 이구도)라는 신분을 숨길 수가 있었다.

주진흥(朱振興)이라는 이름은 건륭54년(1789년)의 우라나의 상소에 나온다. 건륭35년 복건순무 온복(溫福)이 상소에 나오는 "평화현사람 주씨성(平和縣人朱姓)"과 동일인이다. 사건당사자 채마강(蔡馬强)은 이렇게 진술한 바 있다. 그는 일찌기 조안에서 평화로 가서 주진흥과 결의형제를 맺고 싶었다. 이를 보면, 평화현에 확실히 주진흥이라는 가명을 쓰는 사람이 있었고, 당시 이아민(李阿敏, 李少敏)외에 여러 붙잡힌 자들이 그의 진실한 신분과 성명을 몰랐다. 필자의 추측으로, 건륭33년 만제희는 본명이 조송(趙宋)인 조명덕(趙明德)을 이용하여 복송(復宋)하려는 계획이 실패한 후, 전략을 바꾸어, 비밀종교인 "주리이성"을 들고 나와 사람을 끌어모아 거사를 하려 했던 것이다. 이아민은 이미 건륭27년 만제희를 스승으로 모시고 천지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평화현의 부유한 '주진흥'을 끌어들여 공동으로 거사를 하려 했다. 이는 '주리이성'에 부합한다. 그후 복건순무 최응계(崔應階)는 이렇게 상소를 올렸다: "(이아민)이 주씨성을 날조하였고, 실제로 그런 사람은 없었다. 평화현에서 붙잡아 온 두 명의 주진흥은 모두 분수를 지키고 살아가는 양민이었다." 평화현 주진흥은 체포되지 않았다. 이를 보면 주씨성이 원래 그의 본성이 아니고, 그 자는 아마도 건륭53년의 평화현 이구도일 것이다.

천지회관련자들이 창시자로 진술한 "주리이성", '천지회는 광동에서 나왔다', 홍이방화상과 주씨성이 함께 세웠다, 홍삼방화상, '천지회는 장포 평화에서 나왔다.', 주홍죽 혹은 주홍덕, 주정원등이 창시자이다, 15,6세의 소년이 천지회를 세웠다, 우두머리는 홍리도 혹은 이구도이다. 그리고 진소로가 진술한 홍삼방이 바로 주홍죽, 주구도이다 등등. 이런 류의 진술들은 서로 엇갈리기는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즉, 건륭26년때 만제희가 15,6세의 소년을 이끌고 만들었다. 그 소년은 나중에 "홍삼방"으로 칭해진다. 홍삼방은 이씨이다. 전해지기로는 복건성 평화현 사람이다. 나이가 어려서 만제희의 지시를 따랐기 때문에, 자주 "주리이성"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민간전설 혹은 비밀종교의 신조를 덧붙였다. 그의 진실한 이름은 분명하지 않고, 자주 가명을 사용했다. 주로 주, 이 혹은 홍을 성으로 쓰고, 도(桃)를 이름으로 썼다. 건륭53년이전에 홍삼방은 '이구도'의 신분으로 평화현에서 비밀이에 천지회를 전파했다. 나중에는 광동 요평현에서 체포된다. 그리고, '이아도'라는 이름으로 첨청진과 같은 사건에 연루되어 캬슈미르로 유배된다. 그리고 이름을 이주도로 바꾼다. 그리고 유언비어를 펴트려 "주구도가 광동에서 거사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이주도, 주정원, 주홍덕, 이아도, 주구도, 이구도, 심지어 홍리도와 이소민(이아민)사건의 주진흥까지도 모두 홍삼방의 가명일 가능성이 있다.

이주도의 홍삼방 신분이 끝까지 폭로되지 않은 원인을 살펴보면, 한편으로, 천지회내부의 회규가 엄명하여, 회중들은 맹세를 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이를 밝히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설사 손사의등이 이주도가 우두머리이고 심지어 창시자의 한명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감히 반항의식이 큰 천지회와 대항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를 죽이면 변란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당시 복건과 광동에서 동시에 천지회의 기원을 조사하고 있었는데, 손사의는 이미 광동은 천지회의 기원지가 아니라고 보고한 바 있다. 만일 심문을 엄히 한 후, 이아도가 창시자라는 신분이 밝혀진다면, 천지회가 광동에서 이미 삼십년간 성행했다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광동을 책임지고 있던 손사의등의 잘못이 될 것이니, 관직에서 파면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4. 홍장방(洪長房) - 가명 오천성(吳天成)의 오자상(吳子祥)

앞에서는 홍이방, 홍삼방은 확실히 존재한 사람이라는 것을 논증했다. 상리대로라면, 그 위에 마땅히 홍장방이 있어야 한다. 요본회부는 '오천상'을 장방이라고 하였다. 월중회부의 '홍문당상역대종친(洪門堂上歷代宗親)'에 첨부된 '후오조(後五祖)'의 으뜸은 오천성이다. 그리고 오방당은 차례로 청련당(靑蓮堂), 홍순당(洪順堂), 가후당(家後堂), 참태당(參太堂), 굉화당(宏化堂, 弘化堂)이다. 오천성은 '청련당'에 속한다. 시열격회부(施列格會簿)의 다섯 마판(馬販)도 '오천성'이 으뜸이다. 가경11년(1806년) 유매점(劉梅占)이 가지고 있던 홍시화첩(紅市花帖)에는 만제희대가(萬提喜大哥)의 이름 앞에 "오천성, 이색제(李色弟), 방대홍(方大洪), 장원통(張元通), 임영초(林永招)의 오방대가(五房大哥)"의 이름이 적혀 있다. 가경12년(1807년) 천지회가담자 안초(顔招)의 진술에 따르면, "광동 석성현 정산(丁山) 자락에 홍계승(洪啓勝), 채덕충(蔡德忠), 방대홍, 오천성, 오덕제(吳德帝), 이색개(李色開)가 여러 명을 끌어모아 모반을 꾀했다." 전림본회부(田林本會簿)는 오천성을 '삼방(三房)'으로 적고 있다. 이런 정보를 종합하면 '오천성'은 가경제이후 천지회내에서 전설상의 시조중 한명이다. 여러번 장방으로 언급되고, 아마도 '청련'과 관련이 있을 걳이다.

건륭말기 천지회가담자 엄연의 진술에 따르면, "천지회의 목적은 인생이 천지를 근본으로 한다(人生以天地爲本)는 것으로 하늘과 땅을 공경한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진표는 만제희의 중요한 제자이다. 그래서 엄연이 받은 진표가 전한 정보는 믿을만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잘못 전해졌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엄연과 관련된 천지회 맹사(盟詞)와 양영의 진술에 나오는 "후계묘(後溪廟), 봉화정(鳳化亭)"은 원래 천지회의 창립장소인 "고계묘(高溪廟)", "홍화정(洪化亭, 紅花亭)"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소위 "인생은 천지를 근본으로 한다"는 말은 진표의 원문이 아닐 것이다. 한나라때 동중서(董仲舒)는 <춘추번로.입원신<>에서 '본(本)'자를 이렇게 해석했다: "무엇이 본인가? 가로되 천,지,인이 만물의 본이다." 천지인은 바로 '오본'중의 앞의 세가지이다. 요본회부에 기록된 표포(票布)에 나오는 다섯 글자 "본천지인신(本天地人神)의 의미는 천지인외에 신도 역시 '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신(人神)'과 '인성(人生)'은 발음이 비슷하다. 그래서 '인생은 천지를 근본으로 한다"는 말에 대응되는 것은 마땅히 '본천지인신'일 것이다.

요본회부에는 7수의 시가 실려 있다. 시의 이름은 각각 천본(天本), 지본(地本), 인본(人本), 신본(神本), 신본(身本), 조본(祖本), 홍본(洪本)이다. 그리고, "천,지,인,신,조가 오본이다"라고 하였다. 조본시와 홍본시의 앞의 5수의 시는 내용이 중복된다. 다시 전림본과 월중회부를 살펴보면 "천지인신수(天地人神手)"라는 5수의 시가 있다. 그러므로 천지회내에서는 '본'을 이름으로 하는 시가 다섯수 있었을 것이고, 각각 '천지인신신(혹은 천지인신수)'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다. 신(身) 혹은 수(手)는 '천지인신'과 나란히 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신은 분명 다른 출처가 있을 것이다.

천지회의 초창기인 건륭중후기에 오자상(吳子祥)은 강서(江西)에서 대승교(大乘敎, 五盤敎라고도 함)를 전파했다. 오자상은 건륭48년(1783년)에 대승대계경(大乘大戒經)을 쓰고 및 재단(齎單)을 만들었다. 그리고 과일을 담아 신에게 바치는 것을 "재반(齎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천, 지, 인, 신, 성(聖)의 5등명색을 세우고, 금목수화토의 오행생상의 의미를 담았다. 그러나, '오반'이라는 이름은 오자상이 처음 만든 것이 아니다. 건륭21년(1756년) 계족산대승교내에도 '오반'이 있었다. 동서남북중이라고 칭했다. 명나라말기에 간행된 <불설황극결과보권(佛說皇極結果寶卷)>에는 '피안'을 등급에 따라 "운반(雲盤)", "성반(聖盤)", "천반(天盤)", "인반(人盤)", "지반(地盤)"이라고 불렀다. 역시 "오반(五盤)"이다.

다른 "오반"과 비교하면, 오자상이 전한 "오반"은 시간과 지역적으로 천지회와 가장 근접하다. 그래서 오본(五本) - 천지인신신(수)은 오반교의 '천지인신성' 오반에서 온 것이라고 할 것이다. 다만, "성(聖)"이 "신(身)" 혹은 "수(手)"로 바뀌었다. 오자상의 제자인 이능괴(李凌魁)는 가경6년(1801년), "<은본경(恩本經)내에 음양(陰陽)어구가 있는 것을 기억하고, 양반(陽盤), 음반(陰盤)을 따로 두었다. 천지회라는 의미를 속으로 담고 있었다." 이능괴는 오반교 출신이므로 오반은 '천지인신성'을 가리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소위 '양반'과 '음반'이라는 것은 오반중의 앞의 두 가지 '천반'과 '지반'을 가리킨다고 할 것이지, <은본경>의 음양어구에서 따온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건륭53년(1788년) 복강안의 상소문에는 이런 말이 있다: "신등이 대만에 도착한 후, 여러번 천지회의 근원에 대하여 범인들에게 물어보았으나, 단지 담배를 피우거나, 식사를 차거나 ,차를 마실 때 세 손가락만 쓰고, 설화불리본(說話不離本)이라는 암호등에 대하여는 얘기했지만, 그 상세한 점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는 천지회가담자가 처음으로 천지회내에 "개구불리본(開口不離本)"암호에 대해 진술한 것이다. 그리고 엄연, 임상문 일맥의 천지회에서 나왔다. 즉, 건륭말기 관리들이 알고 있는 천지회의 근원과 본자 암호는 모두 엄연이 전한 것이고, 나아가 엄연은 천지회의 기원에 관한 많은 비밀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엄연이 전달한 '개구불리본'은 '인생이천지위본'을 보면 '천지(天地)'가 '본(本)'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즉 '천지인신신(수)의 오본 중에서 앞의 두 가지인 것이다.

오자상등이 제창한 오반교는 "삼귀오계를 봉행하고, 채식을 하며, 구절현공(九節玄功)을 수련하며, 전교자들은 <예본(禮本)>을 신자들에게 보여주는 종교이다." 예본은 <개시진경(開示眞經)> 혹은 <경신례본(敬神禮本)>이라고도 불리는 것이다. 또 다른 오자상이 쓴 <은본>이 있다. "오본"과 "오반"은 근원이 같다. 그래서 천지회내에서 '개구불리본'이라고 하는 것은 '예본(禮本)' 혹은 '은본(恩本)'을 벗어나서는 안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만일 초기의 천지회가 오반교를 본받았다면, 사람들은 반드시 오자상을 기념해야 했다. 홍이방은 만제희화상이다. 홍삼방 이주도도 '홍리도'화상의 신분으로 천지회를 확장했다. 그래서 홍장방인 '오천성'도 마땅히 화상이어야 했다. 오자상은 삼귀오계, 채식을 했다. 삼귀(三皈)는 불법승을 봉행하는 것이다. 민중의 세속관념으로 보면, 오자상은 승려와 같다. 세사람은 나란히 오방에 오른다. 이는 홍장방의 활동연대가 건륭중후기이고 명망이 만제희보다 낮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오자상은 강서에서 원돈대승교, 요문교(姚門敎, 羅敎), 황천교(黃天敎)등을 종합하여 <은본>, <대승>, <대계>를 썼고, 후세 청련교(靑蓮敎)에서 십조(十祖)로 모셔진다. 오자상은 강희연간에 태어났고, 약 건륭49년에 사망한다. 만제희의 활동시기와 아주 가깝다. 그리고 홍장방이 속한 천지회내의 청련당을 보아도 장방이 청련교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가경11년 강서천지회 오문춘(吳文春)등이 모임을 가질 때 소장한 부록(符籙)을 보면 내용이 회내암호를 위주로 한다. 그러나, "황정신(黃廷臣), 오자상선자호(吳子祥善字號)"가 있다. 이를 보면 오자상은 천지회내에서 특수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필자의 생각에, 천지회는 오반교(청련교의 전신)를 받아들이고, 오자상이 받든 오반 '천지인신성'을 오본 천지인신성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전파때, '성'자가 음이 가까운 '신' 혹은 '수'로 바뀌었다. 오본은 다시 천지회의 '천지'라는 회명을 만들어냈다. 천지회는 오반교의 개구송(開口訟)인 <예본> 혹은 <은본>의 특징을 가졌고, 이를 '개구불리본'이라는 암호가 되었다. 현재의 천지회가담자의 진술, 관방자료등 사료를 분석해보면, '홍장방'은 천지회의 창시자는 아니고, 천지회내에서 장방 '오천성'으로 받들어지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