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상관씨(上官氏): 6살에 황후, 15살에 태후, 40살에 태황태후가 된 여인

중은우시 2023. 1. 10. 15:58

글: 역사상적괴점(歷史上的拐點)

 

상관씨는 명문집안 출신으로 할아버지는 상관걸(上官桀)이고, 외할아버지는 대장군 겸 대사마 곽광(霍光)이다. 곽광은 곽거병(霍去病)의 동생으로 조정의 대권을 완전히 장악했던 인물이다. 그와 상관걸은 모두 한무제때의 중신으로, 한무제의 탁고를 받아 나이어린 한소제(漢昭帝)를 보좌했다. 이런 할아버지를 두었으니 상관씨의 일생은 당연히 평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딸을 궁으로 보내기 위해, 상관씨의 부친인 상관안(上官安)은 한소제를 어릴 때부터 길러준 한소제의 유일한 누나인 악읍장공주(鄂邑長公主)를 찾아가서, 과부로 지내는 장공주의 애인 "정외인(丁外人)"의 관직과 작위를 올려주는 것을 조건으로 악읍장공주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상관씨를 한소제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하는데 성공한다.

 

입궁할 때 상관씨는 겨우 5살이었다. 먼저 한소제의 첩여(婕妤)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皇后)로 책봉된다. 한나라때 가장 나이어린 황후이다. 이때 황제의 나이도 겨우 12살이었다. 그녀가 빛의 속도로 승진하자, 황궁에서 일생을 보내면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많은 여인들은 그녀를 선망해 마지 않았다. 누가 알았으랴. 이런 상관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나긴 고독한 일생이었다. 그녀는 한번 또 한번의 피바람이 자신의 가족을 석권하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다.

 

상관걸과 상관안의 야심은 상관씨가 황후가 되는 정도로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정외인의 도움을 받아 상관씨가 순조롭게 황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상관걸 부자는 정외인이 제후에 봉해지도록 하여 보답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되어야 정외인은 장공주와 순조롭게 결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직하고 모든 일에 예법을 따지는 곽광은 그것을 거부한다. 공로가 없는 자는 제후에 봉해질 수 없다는 이유를 댄 것이다. 분노한 상관걸 부자와 악읍장공주는 이에 서로 결탁하여, 곽광을 암살하고 유불릉(劉弗陵, 한소제)을 폐위시켜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고자 모의하게 된다.  

 

부친과 할아버지가 이런 음모를 꾸미는 줄 상관씨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그녀에게 의견을 물어본 적도 없고,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비참한 것은 상관걸 부자의 모반계획은 시작하기도 전에 들통나 버린다는 것이다. 곽광은 과감한 결정을 내려, 상관걸부자, 상홍양(桑弘羊), 정외인 일당을 모조리 붙잡아 법에 따라 처형한다. 악읍장공주는 사태가 들통난 것을 보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곽광은 명을 내려 이들 가족 전원을 죽여버리게 한다. 그 뜻은 자신의 손으로 사위의 일가를 멸문시켜 버린 것이다. 오로지 딱 한명 외손녀인 황후 상관씨는 남겨둔다.

 

부친의 가족이 외할아버지에 의해 모조리 멸문당한다. 당시 겨우 8살이던 상관씨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모친의 가족(곽씨)의 권력쟁취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이때 조정의 대권은 곽광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외손녀가 하루빨리 태자를 낳도록 하기 위해서 곽광등은 한소제에게 건의하여, 황후를 제외하고는 다른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음으로써 용체의 건강을 유지하도록 건의한다. 이렇게 해서 상관황후 이외의 다른 어느 후궁도 한소제를 모시지 못하게 된다. 후사를 낳을 기회는 오로지 상관황후가 독점하게 된다. 그러나 사주에 아들이 어뵤었던 상관씨는 한소제를 위하여 아들이나 딸을 전혀 낳아주지 못한다. 한편으로 아마 그녀가 너무 어려서이고, 다른 한편으로 한소제의 명이 길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소제는 2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상관씨는 15살의 나이에 과부가 된다.

 

한소제의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곽광과 대신들은 한무제의 손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황제에 앉힌다. 상관씨는 황태후가 된다. 웃기는 점이라면 황제인 유하는 겨우 27일간 황제로 있다가 과도한 무능으로 폐위되어 버리고, 다시 한무제의 증손자이자 폐태자 유거(劉據)의 장손인 유순(劉詢)이 황제에 오른다. 그가 바로 한선제(漢宣帝)이다.

 

상관씨는 한선제보다 나이가 겨우 3살이 많았지만, 배분으로 따지면 유순의 할머니가 된다. 단지 유순은 이미 한소제의 양자로 입적시킴에 따라, 상관씨는 여전히 황태후로 있게 된다. 상관씨는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다. 황후이건 태후이건 그녀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겁난은 명분상 천하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 되었다고 하여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모친가족(곽씨)가 멸문당하는 것도 목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외할아버지 곽광에게서 비롯된다.

 

한선제는 곽광이 세웠기 때문에, 즉위초기에 모든 정무를 집행할 때 곽광의 말을 들었다. 유독 황후를 세우는 일에 대하여 한선제는 전혀 양보하지 않는다. 자신의 조강지처 허평군(許平君)을 황후로 세우겠다고 고집을 세운다. 그녀와 허평군은 어려울 시절을 함께 보냈기 때문에 두 사람간의 감정이 남달랐다. 그러나, 곽광 부부의 뜻은 자신의 딸인 곽성군(霍成君)을 황후에 앉히는 것이었다. 한선제가 허씨를 고집하자, 곽광의 부인은 의사와 결탁하여, 회임한 허황후를 암살해버린다. 곽광은 사후에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한선제에게 이 사건에 대하여 추궁하지 말도록 요구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화근이 심어지게 되는 것이다.

 

곽성군은 원하는대로 황후에 오른다. 다만 한선제는 조강지처의 죽음을 항상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리고 곽광의 권력농단에 대하여 불만이 갈수록 커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기원전68년 곽광이 병사한다. 그때도 한선제는 곽광을 후하게 장례지내도록 명하여 곽씨집안의 체면을 세워준다. 그러나 그가 친정(親政)을 시작한 후부터 곽씨가족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시작한다. 차례차례 곽씨일가의 군권을 박탈하고, 외곽세력까지 모조리 제거한다. 시기가 무르익자, 곽씨가족의 뿌리까지 뽑아버린다. 곽광은 권력투쟁의 고수였지만, 그의 자손은 그와 같은 재능이 없었다. 황제의 분노 앞에, 그리고 곽광부인이 허평군을 독살한 일이 들통나 버리자, 결국 멸문지화의 액운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곽성군도 자진하고, 상관씨는 이로 인하여 모계일족까지 사라지게 된다.

 

유일하게 운이 좋았던 점이라면, 한선제는 상관씨에게까지 화를 미치게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를 계속 장락궁(長樂宮)에 머무르게 해주었고, 그녀의 지위도 박탈하지 않았다. 기원전48년, 한선제의 장남 유석(劉奭)이 한원제(漢元帝)로 즉위한다. 나이 겨우 40살의 상관씨는 다시 태황태후(太皇太后)로 승격된다. 비록 그녀는 한원제와 겨우 10여살 차이밖에 없었지만, 배분으로는 할머니인 것이다. 한원제 건소2년, 상관씨가 세상을 떠난다. 향년 52세이고, 한소제와 함께 평릉에 합장된다. 

 

상관씨의 일생을 살펴보면 6살에 황후에 오르고, 15살에 황태후가 되고, 40살에 태황태후에 오른다. 반평생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권력다툼에 끼어 있었고, 15살에 남편이 죽은 후부터 과부로 지내며, 친아들이나 친딸이 없어 처지가 처량했다. 그러나 상관씨는 평생 영화부귀를 누렸고, 수종정침(壽終正寢)했으니, 곽성군, 진아교(陳阿嬌, 한무제의 황후), 위자부(衛子夫, 역시 한무제의 황후)등 동시대의 여성들보다는 상당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