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문사(朝文社)
한혜제 유영이 재위하던 기간동안 비록 명목상으로 황제였지만, 사실상 권력자는 모친인 여후(呂后)였다. 유영이 사망한 후, 전소제(前少帝) 유공(劉恭), 후소제(後少帝) 유홍(劉弘)이 전후로 즉위한다. 비록 이들 둘은 허수아비라고 하기에도 부족하지만, 어쨌든 황제에 오르긴 한다.
사료에 따르면, "밤에, 각각 사람을 나누어 양왕(梁王), 회양왕(淮陽王), 상산왕(常山王)과 소제(少帝)를 자택에서 주살했다."
바꾸어 말하면, 유영의 6명 아들 중에서, 2명은 황제에 올랐다. 전소제 유공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은 모두 반여집단(反呂集團)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마지막에는 반여집단의 진평(陳平), 주발(周勃)등의 옹립하에,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恒)이 즉위한다. 그렇다면, 왜 유영의 남은 네 아들에게 황위를 계승하게 하지 않고, 유항으로 하여금 황위를 계승하게 하였을까?
1. 유영의 아들들은 여후의 낙인이 찍혀 있었기 때문에, 참초제근(斬草除根)해야 했다.
한혜제 유영은 원래 괜찮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에게 온화하게 대하며, 인효(仁孝)하고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여후는 아들은 자신의 도구로 생각한다. 척부인에게 보복하기 위하여, 여후는 유영으로 하여금 인체(人彘)의 참상을 보게 한다. 이런 거대한 자극에 유영은 근 1년간 병석에 눕는다. 유영은 우울증에 빠진다. 모종의 심리적인 질병을 앓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후가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유영은 기본적으로 모친에 의해 망가졌다. 그로 인하여 기원전188년 유영은 사망한다. 나이 겨우 23살때였다. 그후에 여후는 한왕조의 실질적인 최고권력자가 된다. 그녀는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을 뿐아나라, 여씨자제들로 하여금 한왕조의 강산을 이어받게 하려 했다.
전소제 유공은 여후에 의하여 쫓겨나고 죽임을 당한다. 후소제 유홍은 여록(呂祿)의 딸을 취했다. 진평, 주발등이 보기에 유영의 이들 아들들은 모두 이미 여후의 낙인이 찍혀 있다. 일거에 모든 일을 해결해버리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참초제근이다. 모조리 죽여버리는 것이다.
그외에 유영의 6명의 아들은 아마도 모두 유영의 친아들은 아닐 것이다. 유영은 몸이 좋지 못했다. 황후 장언(張嫣)을 취했지만, 부부간의 실질은 없었다. 여후는 중간에서 장난을 쳐서 아이를 찾아 장언의 아들이라고 거짓말한다. 그가 바로 유공이다. 구체적으로 이 아이가 유영의 소생인지 아닌지 우리는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정변집단은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황위를 넘겨줄 수 없었다.
여후는 '차복생자(借腹生子, 남의 배를 빌려 아이를 낳다)'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회양왕 유강(劉疆), 상산왕 유불의(劉不疑), 유홍(劉弘), 유조(劉朝), 유무(劉武)는 아마도 유영의 친아들이 아닐 수 있다. 그래서, 진평, 주발등은 논길을 다른 쪽으로 돌려서 비로소 유항을 찾아낸 것이다.
2. 유항은 정치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배경이 없었다.
유항의 모친인 박희(薄姬)는 원래 사생아이다. 그후 이리저리 전전하다가 위왕표(魏王豹)의 왕궁에 들어가, 위왕의 비빈이 된다. 초한상쟁때, 위왕표는 유방을 배신하고, 항우와 힘을 합친다. 그후 한군에 패배하면서 유방의 포로가 되었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위왕표가 죽고나서, 한왕(유방)이 직실(織室)에 들어갔다가, 박희가 예쁜 것을 보고 후궁으로 들인다. 그러나 1년여가 지나도록 임금과 잠자리를 갖지 못한다. 박희가 어렸을 때, 관부인(管夫人), 조자아(趙子兒)와 서로 좋아해서 이렇게 약속한다: 먼저 귀하게 되면 서로 잊지 말자. 그런데 관부인, 조자아는 먼저 한왕과 잠자리를 가진다."
위왕표의 여러 비빈들 중에서 박희는 자색이 뛰어났고, 그후 유방에 의해 후궁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유방의 후궁에는 미인이 너무 많았다. 박희는 그다지 중시되지 않는다. 다행히 박희에게는 두 명의 좋은 친구가 있었다. 바로 관부인과 조자아이다. 관부인과 조자아는 유방의 총애를 받았고, 박희와의 이전 일을 얘기한다. 그제서야 유방은 박희를 생각해냈고, 측은지심이 들어 박희와 잠자리를 하게 된다. 이 한번으로 박희는 임신을 한다.
봉건왕조때 황제의 후궁은 가려삼천이고, 많은 여인들은 황제를 만나지도 못하면서 후궁에서 늙어죽는다. 만일 황자를 낳지 못하면, 도저히 두각을 나타낼 수가 없다. 다행히 박희는 대왕(代王) 즉 유항을 낳는다.
유방은 척부인든 총애하는 비빈이 있었고, 박희는 거의 버려져 있는 상황이다. 여후가 권력을 잡은 후, 유방의 이전 비빈들을 모조리 연금시킨다. 오랫동안 박희는 정치중심에서 벗어나 있었고, 유방은 만난 적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여후는 박희는 괴롭히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를 멀리 대(代)의 땅으로 쫓아보낸 것이다.
유항은 이런 환경하에서 자랐다. 양호한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 영화부귀를 누렸다고 할 수도 없다. 다만 박희는 심계가 있는 여인이다. 아들을 어른으로 잘 길렀을 뿐아니라, 동량지재로 길러냈다.
박희와 유항의 이런 경력때문에, 정변집단은 유항이라말로 적당한 후보자라고 여기게 된다. 진평, 주발은 대권을 장악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한황실에 충성스러웠다.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하면 유항이 비교적 황제가 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외에 유항은 무슨 배경이랄 것이 없다. 여러 해동안 정치중심에서도 떨어져 있었다. 만일 문제가 생기면 쉽게 통제할 수 있다. 이것도 아마 그를 선택하게 된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3. 유항은 현명성달(賢明聖達)했고, 명군(明君)의 모습이 있었다.
당시 유방의 아들 중에서, 유항과 회남왕(淮南王)만이 남았다. 유항이 나이가 더 많았다. 진평, 주발등은 즉시 유항을 고려범위에 넣는다. 좋은 황제가 되려면 덕과 재를 겸비해야 한다. 마침 유항은 이런 기본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지금 고제(高帝, 유방)의 아들 중 회남왕과 대왕이 있습니다. 대왕은 나이도 더 많고, 현성인효(賢聖仁孝)한 것으로 천하에 명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대신은 천하의 마음으로 대왕을 맞이해서 황제로 세우고자 합니다. 대왕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런 어부지리는 역사에서 자주 보인다. 당고종 이치는 바로 그 전형적인 대표이다. 태자 이승건과 위왕 이태가 서로 치열하게 싸우다보니, 이세민은 현무문사변이 재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쌍방을 모두 버리고, 이치를 후계자로 세우게 된다.
이세민이 보기에 이치에게 무슨 큰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부득이하게 그렇게 한 것이다. 이를 보면 어떤 때는 성공하려면 노력만으로 안된다. 좋은 운이 따라야 한다.
유항의 운은 아주 좋았다. 그는 여씨와 한황실의 다툼에 끼어들지 않았을 뿐아니라, 대의 땅을 잘 경영했다. 여러 방면에서 흠잡을 곳이 없었다.
황위를 눈앞에 두고, 유항은 아주 신중해진다. 한왕조는 건립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주발, 진평등에 대하여도 잘 몰랐다. 여후는 일찌기 마음대로 황제를 세웠다가, 마음대로 황제를 죽였다. 만일 진평, 주발도 그렇게 한다면, 그는 도마위에 올라간 물고기꼴이 되는 것이 아닌가.
유항은 이리저리 고민하고 주변사람들의 의견도 듣는다. 그리고 나서, 먼저 외삼촌 박소(薄昭)를 경성으로 보내 소식을 알아보게 한다. 주발등은 그에게 왜 유항을 옹립하려 하는지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한다. 그후에 유항은 비로소 도성을 향해 출발한다.
유항은 문경지치(文景之治)의 개창자이다. 그의 재위기간동안 사람을 잘 썼고, 잔혹한 형벌은 폐지한다. 휴양생식(休養生息)하여 서한의 경제는 크게 발전한다. 유항의 여정도치(勵精圖治)로 서한의 국력은 크게 증가한다. 그래서 나중의 한무제때 웅위를 떨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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