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야율대석(耶律大石): 서요(西遼)의 개국황제

중은우시 2021. 12. 27. 23:23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요나라는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것은 주로 <양가장>등 일련의 희극때문일 것이고, 이들 희극의 결론은 당연히 마지막에는 항상 중화왕조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실제상 요태후(遼太后) 소연연(蕭燕燕)을 우두머리로 하는 요나라는 송나라를 마구 두들겨 팼다. 송태종 조광의가 엉덩이에 화살을 맞고서 나귀수레를 훔쳐타고 낭패해서 도망치게 만들었을 뿐아니라, 양가장중의 주인공인 양노령공을 생포한다. "전연지맹(澶淵之盟)"이후 송나라는 매년 요나라에 공물을 바쳤고, 그제서야 쌍방은 전쟁을 멈춘다.

 

이때가 요나라의 전성기이고, 영토는 '폭원말리(幅員萬里)"라 칭했다. 아쉽게도 그 이후의 요나라황제는 계속 그 전보다 못하게 되어 요흥종(遼興宗)이 즉위한 후 요나라의 국세는 날이갈수록 쇠락했다. 결국은 나중에 굴기한 금나라의 공격에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天祚帝)가 포로로 잡히고, 200여년간 지속된 요왕조는 멸망하고만다.

 

요나라가 멸망한 후, 북송왕조의 운명도 마찬가지로 비참했다. 금나라군대는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병력을 남하시킨다. '정강지난(靖康之難)'으로 북송은 참혹하게 멸망한다. 강왕(康王) 조구(趙構)는 남으로 도망쳐서 황제를 칭하고, 남쪽의 한구석을 차지한 남송을 건립한다. 그리고 송왕조의 목숨을 한세기반동안 연장시킨다.

 

조구가 남쪽으로 도망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요나라가 멸망할 때 또 한 인물이 형제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도망친다. 사막을 가로건너서 서역과 중앙아시아지역에 도착해서 나라를 세운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서요(西遼)라 부른다. 역시 백년간 지속된다. 그는 바로 역사에서 거의 잊혀져버린 인물 야율대석이다.

 

도진사적지불이(渡盡砂磧志不移)

유장벽안예서수(猶將碧眼睨西陲)

거란유묵무인식(契丹遺墨無人識)

일루화음입파사(一縷華音入波斯)

 

서요왕조의 개국황제이지만, 사서에 그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이것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국역사는 일관되게 정통왕조를 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남북조시기에는 동진을 위주로 기록했고, 북쪽의 국가들은 그저 대충 언급하고 지나갔다. 단지 북위만 대표로 골라서 썼는데, 그것도 천도하여 한화되는 것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북주의 주무제 우문옹같은 웅주에 대하여도 거의 써주지 않았고, 마치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적은 문자들만 남겨놓았다.

 

야율대석이 건립한 서요는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중국인들의 눈은 송,금같의 격렬한 다툼에 집중되어 있다보니, 아무도 이 만리 먼 곳의 풍운변환에 신경쓰지 않은 것도 이해는 간다.

 

다만, 거란인에 있어서, 서요는 그들 마음 속의 '남송'이고, 서요의 개국황제 야율대석은 바로 그들의 마음 속의 '조구'이다. 요나라를 재건했고, 거란의 혈맥이 이어지도록 만든 영웅인 것이다.

 

야율대석은 자가 중덕(重德)이고 요태조 야율아보기의 8대손이다. 요나라의 진사(進士)로 천조제가 멸망할 때, 부하를 이끌고 서쪽으로 간다. 사막을 건너면서 잔여인원을 거두고, 다른 민족의 부락우두머리들도 끌어들여 중앙아시아지역에 서요제국을 건립한다. 그리고 십만의 중앙아시아연합군을 격ㅌ퇴하고 통치를 확립한다. 그는 죽은 후 서요덕종(西遼德宗)으로 불린다.

 

같은 시기의 인물인데다가 마찬가지로 금나라에 패배하였기때문에, 야율대석을 아는 사람은 모두 그를 조구와 비교하기를 즐겼다. 어떤 사람은 그가 조구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조구만 못했다고 말한다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다만 절대다수는 그의 능력이 송고종 조구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인정한다.

 

그가 조구만 못하다고 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 모두 금나라사람들에게 쫓겨서 사방으로 도망쳤는데, 한가지 다른 점이라면 야율대석은 고국을 벗어나 서역으로 도망쳐서 목숨을 이어간 것이고, 조구는 어쨌든 고국의 절반의 땅은 지켜냈다는 것이다. 비록 갖은 수모를 겪기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완안구(完顔構, 완안은 금나라황제의 성)라고 놀림받았지만, 어쨌든 그는 "난풍훈득유인취(暖風熏得遊人醉)"의 좋은 시절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야율대석은 낯선 땅으로 가서 영토를 빼앗아 나라의 목숨을 이어간 것이다. 이는 군사능력이나 외교능력에서 혹은 생존능력이나 경제능력에서 모두 조구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야율대석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다. 그는 29살때 요나라에서 유일한 거란족 진사로 전시(殿試)에서 제1명(第一名)으로 한림이 된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임아대석(林牙大石)이라 불렀는데, '임아'는 한림학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의 문학적 재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가 나라를 세운 후, 무력을 기반으로 하면서 글로 나라를 발전시킨다. 그리하여 대학자 야율초재(耶律楚材)는 이렇게 찬탄했다: "(야율)대석은 문교(文敎)를 숭상하여, 서역인들이 아직도 그리워한다" 그리고 그에게 정복당한 무슬림사학자도 이렇게 칭찬했다: "공정하면서도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전투력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요나라가 비바람에 흔들릴 때, 송,금의 협공을 받는 상황하에서 여러번 군대를 이끌고 강적을 물리쳤다. 특히 요나라의 남경, 즉 유주성에서 두번이나 송군을 격파한다. 한 성의 수비군만을 이끌고 십만송군을 물리친 것이다. 중흥사장(中興四將)중 한명으로 불리는 유광세(劉光世)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서쪽으로 간 일은 더더욱 대단하다. 겨우 수백의 철기를 이끌고 사막을 건너 방대한 강산을 개척한다. 카트만전투에서는 중앙아시아연합군을 격퇴시킨다. 그리하여 오만한 이슬람교도들이 처음으로 이슬람을 믿지 않는 정권에 신복(臣服)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무공이 개세적이라고 하지 않고 문무를 모두 겸비했다고 말하더라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고 할 것이다.

 

양송교체기에 진사들은 많았다. 그러나 야율대석처럼 말을 타고 적을 물리친 사람은 그 혼자뿐이다. 억지로 끌어들인다면 간신으로 분류되는 장돈(章惇)과 가사도(賈似道) 정도가 조금 따라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대부분은 문언박(文彦博)처럼 붓이나 놀리는 문신이었다.

 

야율대석이 건립한 서요왕조는 강역이 대체로 지금의 신장과 중앙아시아지역이다. 서역은 장건이 '착공(鑿空)'한 후 반초, 부개자(傅介子)등 여러 영웅의 노력으로 대한왕조의 세력이 마침내 서역으로 확대되고, 서역도호부가 건립되어 중앙정부의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확립시켰다.

 

다만, 동한의 난세와 양진을 거치면서 당나라에 이르러 곽흔(郭昕)의 '백발구자(白髮龜玆)"로 장렬하게 끝난다. 이 지역은 일찌감치 중원정부의 지배를 벗어난다. 그리고 야율대석이 비로소 다시 품에 안는다. 그래서 최소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는 중국문화가 한, 당을 계승한 후, 중앙아시아에서 맞이한 세번째 전성기이다. 그래서 중대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만일 이를 '부흥'의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억지스러울 것이다. 다만 오늘날 신장이 중화판도에서 가장 큰 성임을 보면 야율대석이 신장을 점령한 의미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왜냐하면 '거란이 바로 중국'이기 때문이다. 거란민족은 일찌감치 한민족에 동화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말하더라도 중화민족의 강역이니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서역외에 오늘날 중앙아시아의 여러 '스탄'국들, 이백의 출생지라고 알려진 쇄엽성(碎葉城)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강역이 넓어서 지배지역은 동으로는 고창(高昌), 서로는 카스피해(里海)에 이르렀다. 직할영지를 제외하고 많은 부용국(附庸國)도 있었다. 예를 들어 회흘칸국(回鶻汗國)도 있고, 나중에 몽골인들과 혈전을 벌였던 호라즘(花剌子模)도 있다. 이들은 모두 서요에 신복했던 부용국들이다.

 

후요흥대석(後遼興大石)

서역통구자(西域統龜玆)

만리위성진(萬里威聲震)

백년명교수(百年名敎垂)

 

서요는 칠주십팔부(七州十八部)가 있다고 말해진다. 그리고 원래 요나라의 각종 제도를 승계했다. 예를 들어, "관직을 남면관, 북면관으로 나누고, 국제로 거란을 다스리고, 한제로 한인을 대한다"는 것등이다. 경제적으로 유목민족에서 정착한 농경민족으로 바뀐다. 전체적으로 서요는 한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야율대석은 서역에 '광복구물'의 근거지를 세우는 것을 최우선목표로 삼았다.

 

복국은 당연히 야율대석의 꿈이었다. 그가 낭패하게 서쪽으로 도망친후 사막 덕분에 금나라군대의 추격을 피할 수 있었다. 나중에 금나라에서 수만의 병력을 본어 서요를 평정하려고 했을 때도 천리사막앞에서 속수무책이었고, 할 수없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퇴각하게 된다.

 

그래서, '성야소하(成也蕭何) 패야소하(敗也蕭何)'였다 서요가 세력을 키운 후에 야율대석은 7만을 보내어 동으로 금을 공격한다. 그러나 '만리나 가야 해서 성과를 얻지 못했다. 소와 말이 많이 죽어 할 수 없이 병력을 철수시켜야 했다.' 역시 망망사막때문에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

 

이때 야율대석은 비로소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고국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왔다는 것을. 동쪽으로 정벌에 나서 복국하는 것은 그가 실현할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할 수 없이 서쪽에서 발전시켜 서역의 땅을 잘 다스리는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가련하게도 그는 복국의 뜻을 품었으나 결국은 명나라말기의 이정국(李定國)과 마찬가지로 그저 하늘을 올려다 보며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역사의 각도에서 보자면, 일생동안 전투를 해온 야율대석은 중화민족의 가장 걸출한 역사인물중 하나라 할 만하다. 그는 어려운 환경하에서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중앙아시아에 강력이 넓은 다민족의 신왕조를 건립했다. 이렇게 백세에 이름을 남긴 인물을 지금은 사람들에게 잊혀져 버렸다. 역시 자고영웅다적막(自古英雄多寂寞)이라는 말이 들어맞는다.

 

그는 거란민족을 위하여 자신의 영토를 개척했고, 비장한 사시를 썼다. 그의 노력으로 그의 민족은 새로운 방향으로 가지와 잎을 펼칠 수 있었다. 비록 현재 중국에 거란이라는 민족이 존재하지 않지만, 서역, 신장에서는 야율대석의 철혈오전(鐵血鏖戰)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고, 그의 매력을 만질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요나라의 마지막 불꽃을 거기에서 피웠다.

 

고독한 대석, 영웅은 이미 갔으나 위업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