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문언박(文彦博): 북송 4명의 황제 아래에서 50년간 재상을 지내다.

중은우시 2021. 9. 17. 14:12

글: 주효휘(周曉輝)

 

고대 왕조에서 제후나 재상에 오르는 인물은 기본적으로 모두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불가의 인과응보설에 따르면, 모두 복이 있는 사람들이다. 북송때 이런 명신이 있다. 일생동안 송인종, 송영종, 송신종, 송철종의 네 황제를 모시는 동안 전후로 여러번 재상을 맡았고, 재상을 맡은 기간이 50년에 이르며, 평생 불법을 독실하게 믿어, 일찌기 10만명을 모아 함께 염불한 바 있다. 그 외에, 아주 장수하여 91세에 좌화한다. 병없이 편안히 죽는다. 그의 이름은 바로 문언박이다.

 

문언박(1006-1097), 자는 관부(寬夫), 산서 분주(汾州) 개휴(介休) 사람. 그의 조상은 성이 경(敬)이다. 나중에 후진의 고조 석경당(石敬瑭)의 이름을 피휘하여 '경'에서 문(文)으로 성을 고친다. 후진이 멸망한 후에는 다시 경씨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북송이 건국되었을 때, 조광조의 조상인 송익조(宋翼祖) 조경(趙敬)을 피휘하여 다시 성을 문으로 바꾸게 된다. 

 

어렸을 때 문언박은 매우 총명했다. 지금 어린아이들에게 자주 얘기해주는 "관수취구(灌水取球)"의 고사의 주인공이 바로 그이다. 고사는 이렇게 진행된다: 하루는 어린 문언박이 몇몇 친구들과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찬 공이 오래된 나무의 수동(樹洞)에 빠진다. 친구들이 손을 뻗었지만 공에 닿지 않았다. 막대기로 안에 떨어진 공을 꺼내려 해도 되지 않았다. 모두 조급해 하고 있을 때, 문언박은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 낸다. 바로 물을 수동에 붓는 것이다. 물이 가득차자 공이 떠올랐다. 어린 나이에 이런 부력의 원리를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다니 사람들은 문언박을 괄목상대하게 되었다.

 

나이어린 문언박은 일찌기 영창(潁昌)의 사소(史炤)에게 배운 바 있다. 사소의 모친은 문언박을 보고는 그가 귀인의 상을 지녔다고 여긴다.

 

사소 모친의 생각대로, 20여세에 문언박은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다. 그후 전후로 익성현 지현, 강주통판, 감찰어사등의 직을 지내고, 송인종때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오른다. 이를 보면 그가 관리로서 실적을 잘 냈다는 것을 알 수 잇다.

 

전중시어사로 있을 때, 문언박은 자신의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 대담하게 송인종에게 간언했다. 당시 서북변방에서 매년 전쟁이 발생했는데, 군대에서 장수들이 전투에 임하여 먼저 후퇴하거나, 적군을 보고도 공격하지 않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규정대로라면 총사령관은 조정에 보고한 후 이들 장수를 처벌해야 했다. 이런 병폐를 알아차린 문언박은 송인종에게 진언한다. 전시에는 마땅히 장수들에게 스스로 진퇴를 그 자리에서 결정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장수의 권한이 제대로 행사될 수 없고, 병법을 제대로 집행할 수 없어 승리를 거둘 수 없다고 했다. 송인종은 그의 말이 옳다고 여겨 그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얼마 후, 문언박은 직사관(直史館, 관직명임)의 신분으로 하동전운부사(河東轉運副使)가 되어, 양식등의 운송을 책임지게 된다. 그때 인주(麟州, 지금의 섬서성 신목현 북쪽)로 양식을 운송하는 길은 구불구불하며 멀었다. 은성하(銀城河)의 밖에는 당나라때 양식운송을 위한 옛 도로가 있었는데,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버려져 있었다. 문언박의 부친 문계(文洎)가 전운사로 있을 때, 도로를 수리하는 것을 생각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문언박은 이 길을 수리하여 부친의 염원을 이루어준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인주성에는 대량의 식량을 준비할 수 있었다. 나중에 서하에서 공격했고, 인주를 10일간 포위했지만, 성안에 양식이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서하는 물러났다.

 

그 후, 문언박은 천장각시제(天章閣侍制), 도전운사(都轉運使)로 옮겨가고, 용도각(龍圖閣),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 진주지주(秦州知州), 익주지주(益州知州)로 연이어 승진한다. 몇년 후, 송인종을 그를 다시 조정으로 부른다. 그리고 추밀부사(樞密副使), 참지정사(參知政事)의 직을 맡긴다. 그가 승진하여 부임하자마자 패주(貝州) 왕칙(王則)의 반란을 평정한다. 이로 인하여 다시 재상으로 승진한다. 즉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가 된다.

 

재상이 된 후, 문언박은 송인종에게 장괴(張瑰), 한유(韓維), 왕안석(王安石)을 추천한다. 그들은 명리에 담백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 칭찬할만하다면서.

 

당시 사람들이 주목하는 큰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용병(冗兵, 불필요한 병력)을 감군하는 일이었다. 북송의 '용관' '용병'과 '용비'의 삼용(三冗)문제는 뿌리깊었다. 잘못 건드리면 온 나라가 흔들리는 상황이다. 처리하기가 아주 골치아픈 문제였다. 그런데 문언박은 직접 부딛친다. 그와 추밀사 방적(龐籍)은 상의흔 후 병력과 장수 합계 8만명을 감소시키는 방안을 마련한다. 이에 대하여 대신들은 감군후에 이들이 모여서 도적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했다. 송인종도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문언박은 송인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재정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병사들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만일 그들을 줄인 후에 난리를 일으킨다면 제가 목숨을 걸고 나서서 평정하겠습니다." 계획이 실행된 후에 우려했던 일은 나타나지 않았다.

 

1049년 문언박은 소문관대학사(昭文館大學士)로 승진한다. 2년후에 어사 당개(唐介)의 탄핵을 받아 관문전대학사(觀文殿大學士), 허주지주(許州知州)로 좌천되고, 다시 충무군절도사(忠武軍節度使)가 되어 영흥군(永興軍)을 지휘한다. 당개도 파직된다. 1055년 문언박은 다시 이부상서. 동중서문하평장사, 소문관대학사가 된다. 이번에는 명신 부필(富弼)과 함께 임명된 것이다. 이들이 임명되는 날, 사대부들이 조정에서 서로 축하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두 현신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어떤 지위를 가졌는지 알 수 있다.

 

1년후, 송인종은 문무백관으로부터 참배를 받을 때 돌연 병이 도진다. 그가 병석에 누워 있는 동안, 문언박과 부필은 송인종의 병이 쾌차될 때까지 흔들림없이 업무를 처리하여 조정내외의 불안요소를 제거했고 조정의 국면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다독였다. 

 

이때, 어사 오중복(吳中復)은 당개를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자고 요청한다. 송인종은 문언박에게 의견을 묻는다. 문언박은 이렇게 말했다: "당개는 어사로 있을 때, 나를 탄핵했는데, 그것은 나의 부족한 점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중 비록 항간의 소문과 같은 사실이 아닌 일도 있었고, 예전에 저는 이미 그를 질책한 바 있습니다. 지금 불러들여도 좋을 것같습니다." 송인종과 대신들은 모두 그의 인품이 고상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몇년이 흐른 후, 문언박은 하양삼성절도사(河陽三城節度使) 동평장사, 판하남부(判河南府)가 되며 노국공(潞國公)에 봉해진다. 나중에 다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된다. 그후 모친의 사망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모친상을 지킨다.

 

1063년, 송인종이 사망하고 송영종이 즉위한다. 문언종은 성덕군절도사(成德軍節度使)에 임명된다. 문언박은 여러번 상소를 올려 3년상을 다 치르고 싶다고 했고, 송영종은 동의해준다. 당초 송인종에게는 아들이 없어서, 상왕(商王)의 손자인 조서(趙曙)를 어려서부터 송인종이 자신의 슬하에서 키웄다. 그가 바로 송영종이다. 문언박과 부필등은 망설이고 있던 송인종에게 태자로 세울 것을 요청했었고, 송영종은 이로 인하여 문언박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문언박의 3년상이 끝난 후에 그를 접견하면서 그런 뜻을 전달했다. 그러나 문언박은 송영종에 대통을 이은 것은 천명때문이며 자신에게는 아무런 공이 없다고 말한다.

 

얼마 후, 문언박은 시중(侍中)으로 승진하고, 회남부로 옮겨서 영흥군을 지휘한다. 조정에서는 추밀사, 검남서천절도사로 계속하여 송영종에게 중용된다.

 

송영종은 재위4년만에 병으로 사망한다. 그리고 송신종이 즉위한다. 1069년, 송신종은 진승지(陳昇之)를 재상으로 승진시킨다. 조서에 이렇게 쓴다: "문언박은 조정의 중신이다. 진승지의 지위는 문언박의 아래로 하는 것이 짐의 현명한 인물에게 예를 다하는 뜻에 부합한다." 그러나 문언박은 이렇게 말한다: "송나라의 추밀사는 재상보다 위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전에 조이용(曹利用)이 왕증(王曾), 장지백(張知白)의 위에 있었을 뿐입니다. 비록 신이 예의에 대하여 모두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감히 조이용이 했던 바를 따라해서 조정의 예법을 어지럽힐 수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진승지보다 위의 지위에 두는 것을 사양하며 아무런 원망의 말도 하지 않았다.

 

송신종은 왕안석의 변법을 추진하고자 한다. 문언박은 그러나 왕안석이 추진하는 청묘법, 면역법등의 신정은 실제와 맞지 않는다고 보았고, 신정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한다. 문언박은 추밀부에서 9년간 일했는데, 결국 왕안석과의 정견이 맞지 않아 사직을 청하게 된다. 송신종은 그가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아서 그를 사공(司空), 하동절도사, 판하양에 임명하여 대명부로 가도록 한다. 그는 비록 조정에 남아있지 않았지만, 송신종은 여전히 그를 아주 신임했다.

 

1080년 이미 74세인 문언박은 태위(太尉)에 올라 다시 판하남이 된다. 한번은 그가 입조했을 때, 왕동로(王同老)가 송인종 지화연간에 황태자를 세웠던 일을 얘기하고 있었다. 송신종이 이에 관해서 문언박에게 물었고, 문언박은 다시 한번 말한다: 송영종은 천명으로 황제에 오른 것이며, 송인종황제는 아들의 현명함을 알고 있었고, 자성태황태후가 도와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송신종은 그를 칭찬한다: "품성이 심후하고, 자신의 선덕을 내세우지 않으니, 음덕이 병길과 같다. 실로 사직을 지킬 신하로다."

 

송신종은 문언박에게 양진절도사를 추가시키나, 그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송신종은 다시 경림원에서 연회를 베풀었고, 두번이나 환관을 보내 자신이 지은 시를 문언박에게 보낸다. 경림원은 송나라의 황가궁원이다. 황제가 거기에서 문언박을 불러서 식사를 함께 하고, 자신이 지은 시까지 그에게 보내주었다는 것은 그가 문언박에게 예를 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몇년이 흘렀고, 문언박은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사직한다. 태사(太師, 삼공중 가장 높은 관직)의 직위로 은퇴한다. 낙양에 거주하면서 낙양사람 소옹(邵雍), 정호(程顥) 형제와 가까이 지낸다.

 

1086년, 나이어린 송철종이 즉위하고, 선인태후가 수렴청정한다. 마찬가지로 변법에 반대하고 신법을 폐지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마광은 문언박을 추천한다. 그가 원로로서 다시 기용해 조정에서 보좌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 것이다. 80세의 문언박은 다시 평장군국중사로 임명되어 6일에 1번만 조회에 나오고, 1달에 2번 황궁에서 경서를 강연하도록 했다. 황제는 그에게 은혜와 예를 다했다. 그러나 그는 매년 물러나겠다고 글을 올렸고, 이렇게 5년후 다시 조정을 떠난다.

 

문언박은 4명의 황제를 모시면서 모두 50년간 재상으로 있었다. 4대제왕의 고굉지신이며, 그의 명성은 사방의 오랑캐에게까지 퍼졌다. 철종 원우연간 거란의 사신 야율영창(耶律永昌), 유소(劉霄)가 오고 소식(蘇軾)이 접대대신이 된다. 그들은 송철종을 배알한 후, 전문의 밖에 문언박에 서 있는 것을 본다. 그러자 두 사신은 물러나서 얼굴색을 바꾸면서 묻는다: "이분이 노국공이십니까?" 그러면서 문언박의 나이를 물었다. 소식이 대답하자, 사신은 말했다: "나이가 그렇게 많은데, 몸은 겉으로 보기에 건강하십니다." 소식이 말했다: "사신은 그의 용모만 보셨지, 그가 말하는 것은 보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각종 사정을 정리해서 말하면, 아주 조리있어서 젊은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는 고금의 학문에 모두 능통하여 전문가조차도 따르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신은 마음 속으로 존경심을 품고 말했다: "문언박은 정말 천하의 이인(異人)입니다." 문언박은 낙양으로 돌아간 후, 서강(西羌)이 수령 온계심(溫溪心)은 명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변방의 관리를 통하여 명마를 문언박에게 바치고 싶다고 말한다. 철종은 특별히 조서를 내려 이를 윤허했다. 이를 보면 문언박은 외국인들에게도 큰 존경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문언박은 계속 고위직에 있었지만, 사람을 대할 때는 겸손하고, 덕을 쌓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일찌기 부필, 사마광등 13명과 함께 백거이의 구로회를 본받아 시를 지으면서 같이 어울려 놀았다. 그리고 나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장유를 정하고, 직위의 고하로 따지지 않았다. 그는 대당을 지어서 거기에 13명의 화상을 걸어놓고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라고 이름붙였다. 많은 사람들이 선망해 마지 않았다.

 

문언박이 명리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생 불법을 신봉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는 은퇴후에는 더더욱 수행에 매진한다. 아침저녁을 불문하고 길가거나 멈추거나 앉아있거나 누워있거나 전혀 태만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발원한 바 있다: 원아상정진(願我常精進), 근수일체선(勤修一體善), 원아료심종(願我了心宗), 광도제함식(廣度諸含識)". 그는 일찌기 정엄법사(淨嚴法師)와 개봉에서 10만명을 모아 함께 염불을 한 바도 있다. 기세가 대단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당시 누군가 이런 시를 썼다: "지군담기대여천(知君膽氣大如天), 원결서방십만연(願結西方十萬緣), 불위일신구활계(不爲一身求活計), 대가제상도두선(大家齊上渡頭船)"

 

1097년 오월, 문언박은 집에서 불호를 입으로 되뇌이며 편안하게 좌화한다. 향년 91세이다. 송휘종연간에 그의 태사 직위를 회복시키고 시호를 '충렬(忠烈)'이라 내린다. 그의 여덟명의 아들도 모두 요직을 거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