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 처가의 집안배경

중은우시 2021. 11. 3. 22:50

글: 문방장거(文房掌柜)

 

제갈량의 혼사에 관하여는 그가 명사인 황승언(黃承彦)의 "황두흑부(黃頭黑膚, 머리카락은 누렇고 피부는 검다)"의 추녀를 취한 것으로 후세에 널리 알려져 있다. 제갈량은 원래 산동(山東)사람이다. 나중에 융중(隆中)으로 이주해 온다. 융중에서 머무는 10년동안 제갈량은 보통의 청소년에서 시무를 아는 준걸로 성장한다. 외지에 와서 사는 사람으로서, 그는 어떻게 청년파의 우두머리로 떠오를 수 있었을까? 제갈량 본인의 총명과 재지를 제외하고고 그가 양양으로 온 후에 건립한 인맥관계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원인은 현지의 호족세력 및 권력집안들과 혼인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당시 유표(劉表)가 통치하는 양양일대의 주요 호족세력으로는 방(龐), 채(蔡), 황(黃), 괴(蒯), 마(馬), 습(習), 양(楊)등의 집안이 있었다. 이들은 다시 재야파(방, 황, 마, 습, 양)과 유표의 조정에서 일하는 재조파(주로 괴, 채)로 나뉜다.

 

제갈량은 양파와 모두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첫째, 제갈량의 큰누나는 괴기(蒯琪)에게 시집을 간다. 작은 누나는 방씨집안의 방산민(龐山民)에게 시집을 간다. 그리하여 제갈량은 괴씨, 방씨집안과 인척관계를 맺게 돈다. 그리고 방씨집안의 방림(龐林)이 습씨집안의 딸과 결혼하게 되면서 습씨집안과도 관계를 맺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두 가지 이익이 생긴다. 하나는 양양에 자리잡는데 유리했다는 것이다. 남으로부터 무시를 당하지 않고, 어느 정도의 정치적 역량을 갖출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둘은 그가 좋은 스승과 친구들을 얻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학업에서 성취를 이루고, 정치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둘째, 유표의 후처와 황승언의 처는 친자매간이다. 그래서 제갈량이 황승언의 딸과 결혼하게 되면 유표는 제갈량의 이모부가 되는 것이다. 이런 관계는 제갈량으로 하여금 양양에서 생존하고 발전하는데 가장 큰 뒷배경을 얻게 만들어 주었다. 또한 그는 상층통치계급으로부터 정보를 얻기도 쉬웠다. 그가 형세를 분석하고, 천하대사를 이해하는데 독보적인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다.

 

위에서 말한 두 가지 관계 중에서 제갈량이 황승언의 딸을 처로 맞이한 것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이런 남다른 대단한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제갈량은 분명 여러가지 고려를 했을 것이다.

1. 황승언은 현지의 명사이다. 황씨집안과 결혼하게 되면 황승언으로부터 여러 가르침과 지원을 획득할 수 있어, 제갈량이 사업에서 성공하는데 아주 유리해진다.

2. 황씨는 유표의 후처인 채씨, 그리고 채모(蔡瑁)의 외조카딸이다. 황씨와 결혼하면 통치자 유표, 호족 채모와 밀접한 인척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이 나중에 조정에 들어가서 관리로 일하는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3. 황씨는 비록 외모가 아름답지 못하지만 재능은 뛰어났다(용모에 대하여는 논쟁이 있다). 그녀를 취한다면 현모양처를 얻는 것이고, 이후의 사업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이렇게 장점이 세 가지나 되고 단점은 한 가지이니, 그가 황씨를 취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봉건사회에서 삼처사첩을 두는 것도 아주 정상적이니, 처가 아름답지 못하면, 아름다운 첩을 들이면 되는 일이다. 제갈량이 나중에 첩을 두지 않았는가? 만일 황씨가 유표, 채씨와 친척관계가 아니었고, 명사 황승언의 딸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예뻤다고 하더라도 제갈량이 처로 취했을 것같지는 않다. 이를 보면, 제갈량이 황씨를 취한 것은 신분에 맞는 혼인이었고, 제갈량과 황씨의 신분으로 인해 정해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이해관계를 따진 결혼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갈량이 생활하던 삼국시대는 귀족계급내부의 혼인문제에서 제갈량의 선택은 칭찬할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한하게 미화할만한 혼인관은 아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