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형주(荊州)의 상황에 대한 판단은 제갈량과 방통중 누가 정확했을까?

중은우시 2019. 5. 23. 00:10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제갈량의 융중대에서는 형주에 대하여, "북거한면(北據漢沔), 이진남해(利盡南海)"라고 하면서, 그 땅의 주인인 유표는 지킬 능력이 없어, 하늘이 유비에게 준 자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방통은 이렇게 말한다: "형주황잔(荊州荒殘)". 이미 이곳을 차지한다고 하여 정족지세를 만들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누군가 이를 근거로 방통이 형주를 더욱 정확하게 보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형주는 도대체 부유한 땅인가 아니면 황량한 땅인가? 혹은 방통과 제갈량중 누구의 말이 더 맞았을까?


한 사람이 한 말이 정확한지 여부를 따지려면, 반드시 당시의 언어환경과 결합해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한 말을 명확히 하려면, 반드시 그 말을 했을 때 형주당시의 상황이 어떤지를 봐야 한다. 제갈량이 유비를 본 것은 건안12년(207년)이다. 당시의 형주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초평원년(190년) 유표는 형주자사에 임명된다. 그는 현지 호족의 지지를 받으며, 금방 형주7군을 장악한다. 그는 동탁토벌에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평3년 동탁이 피살될 때까지 그는 여전히 동탁의 부장이 장악하고 있던 조정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이 형주는 상대적으로 비교적 안전했다. 그래서 많은 민중과 저명한 인사들이 형주로 피난을 온다. 그중에 비교적 유명한 사람으로는 왕찬(王粲), 배잠(裴潛)등이 있다. 제갈량도 그 중의 한 명이다. 위개(衛凱)의 말을 빌리자면, 관중 한곳에서만 "인민이 형주로 유입된 경우가 10만여가이다." 이를 보면 형주가 얼마나 흥성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건안원년(196년)부터 유표가 통치하는 형주는 전후로 다음과 같은 전쟁을 벌인다: 북부에서 장수(張繡)와 양성(穰城)전투, 강남에서 내부인 장선(張羨)의 장사(長沙)전투, 남부에서 교주의 변방마찰, 그리고 동남부에서 황조(黃祖)와 손씨정권의 방어작전등. 이들 전투는 모두 형주의 중심지역에서 진행된 것은 아니고, 규모에서도 아주 크지는 않았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환경의 형주가 얼마나 부유했을지는 충분히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제갈량은 유비에게 "천지소이자(天之所以資)" 하늘이 준 자산이라고 한 것이다. 같은 시기에 형주와 제갈량이 말한 또 다른 익주를 제외하면, 천하는 기본적으로 모두 잔결지지(殘缺之地)이다. 군대가 이리저리 오가고, 얼마나 많은 전투와 죽음이 있었는지 모른다. 제갈량이 말한 이것은 하늘이 유비에게 준 자산이라고 한 것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다시 방통이 말한 때의 형주를 보자.


건안12년(207년), 조조는 유표를 정벌하고, 유표는 죽는다. 그의 아들 유종(劉琮)은 투항한다. 유비는 유종이 투항한 것을 모르고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조는 이미 완성(宛城)에 도착했다. 유비는 창졸간에 당하다보니 할 수 없이 남으로 도망친다. 도망치면서 사람들을 데리고 가고 당양(當陽)에 이른다. 이주하는 인구가 이미 십여만명을 달한다. 조조는 유비가 강릉성을 점거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친히 부대를 이끌고 빠르게 추격한다. 하룻밤낮만에 유비를 따라잡는다. 전투를 한판 벌이고, 유비는 전멸한다. 할 수 없이 수십기를 이끌고 도주한다.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군대는 전선이 불에 탔을 뿐아니라, 군대도 전염병에 걸렸다. 되돌아가는 과정에서 서로 앞을 다투다가 쓰러지고 짓밟혔다. 그리하여 군대는 사상자가 아주 많이 나온다. 주유는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고, 그가 이릉의 포위를 풀고 난 후에 강릉성은 외로운 성이 되어 버린다. 성을 지키고 있던 조인을 불러내기 위하여, 조조는 전후로 여러 부대를 파견한다. 이들 부대는 후방에서 전방으로 가는 것처럼 간단하지가 않았다. 그들은 관우의 강력한 저지를 받는다. 1년여의 쟁탈전을 거쳐, 조인이 마침내 철수하고, 강릉성은 주유가 점령한다. 주유는 남군태수가 되었다. 유비는 원래 공안(公安)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지방이 너무 적다는 것을 핑계로 손권에게 형주를 빌리겠다고 청하여 손권의 동의를 받는다. 이렇게 하여 주유가 죽은 후, 유비는 형주의 남군 및 강남4군을 차지한다. 이때, 형주는 실제로 갈기갈기 찢겼다. 강하(江夏)는 동오가 점령하고, 북부의 남양(南陽)은 조조가 가졌다.


한 곳이 외부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면, 더 많은 것은 인력과 물력의 소모이다. 그러나 내부의 전투는 다르다. 마찬가지로 소모되면서, 생산에 큰 파괴를 가져온다. 인원상황도 마찬가지이다. 군인중 사상자가 나올 뿐아니라, 많은 백성들도 사망한다. 위에서 유비가 당양 장판파에서 실패한 예에서 유비가 이끄는 군대만 전멸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많은 사상자를 낸다. 설사 백성들의 사상자는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이주하고 다시 이주했다. 이것은 생산에 대한 파괴이다. 그래서, 두 차례의 전투를 거치면서, 이미 형주는 갈기갈기 찢겼다. 이제는 피폐한 땅이 된 것이다. 방통이 말한 바는 정확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유비는 형주가 이미 파괴된 것을 몰랐을까? 기실, 방통이건 제갈량이건, 그들이 형주를 얘기한 것은 모두 유비를 설득하기 위함이다. 유비에게 취사선택을 물은 것이다. 제갈량이 유비에게 말한 것은 형주는 부유하고, 주인이 지킬 수 없으니, 기회를 봐서 차지하라는 것이고, 이를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방통이 말한 것은 형주는 이미 파괴되었으니, 이곳에 의지해서 정족지세를 만들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러니 익주를 취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 되었고, 시급하게 진행해야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제갈량과 방통의 형주에 대한 견해는 모두 틀리지 않았다. 원인은 여건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부환경은 계속 변화하고, 사람의 인식도 외부사물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