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채륜(蔡倫): 궁중투쟁에 희생된 위대한 과학자

중은우시 2019. 5. 21. 22:07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1960년대 중국우정(郵政)은 중국고대과학자우표세트를 발행한다. 그 중에는 제지술을 발명한 채륜이 있었다. 웃기는 일은 채륜의 출생년의 "기원(公元)" 뒤에 "전(前)"자를 추가해 놓은 것이다. 그렇게 되니 채륜의 출생연도가 수백년은 앞당겨지게 된다. 우표도안이 여러 단계의 검토를 거쳤음에도 이 잘못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표 샘플이 나왔을 때 비로소 발견된다.


보완방법은 인판의 '전'자를 하나하나 지우는 것이었다. 수정한 이후에 엄격한 검사를 거치지 않다보니, 그중 1장의 '전'자를 없애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100장짜리 전지에서 1장은 '전'자가 붙은 잘못된 우표가 나타나게 되었다.



판매했을 때 일부 운좋은 우표수집가가 발견했고, 우정당국은 즉시 조치를 취하여 일부를 회수한다. 그러나 모조리 회수해서 소각할 수 없었다. 더욱 기이한 일이 발생하는데, 1983년 우표수집업무를 회복시켰을 때, 천전우표공사는 현지 우정국에서 넘겨준 우표를 받아서 이를 수집용우표로 판매한다. 그 결과 이 진귀한 '채륜'오타우표가 다시 26매 유출된 것이다.


이 사건은 우표수집가들 사이에 큰 사건이었다. 의외로 이 우표를 얻은 수집가들은 '대박'을 건진 셈이다. 이 '채륜'오타우표는 이로 인하여 신중국 10대진귀한 우표중 하나가 된다. 최근 들어 경매에서 속속 신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채륜은 자가 경중(敬仲)이고, 호남 침주(郴州) 사람이다. 한명제 영평말년에 입궁하고, 장화2년에 태후에게 공을 세워 중상시(中常侍)로 승진한다. 채륜은 다시 구경(九卿)의 높은 직위로 상방령(尙方令)을 겸직한다. 그는 이전 사람들의 제지경험을 종합하여, 제지공법을 혁신하여, 마침내 "채후지(蔡侯紙)"를 발명한다. 조정에 보고한 후, 한화제는 그의 제지법을 널리 보급하도록 명을 내린다. 건광원년, 즉 121년, 권력투쟁으로 자살하여 생을 마친다.


제지술은 중국4대발명품중 으뜸으로 불린다. 세계문명의 진보에 큰 공헌을 하였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세계인류역사의 진보에 영향을 미친 100녕의 인물>에서 그는 7위에 오른다. 중국의 명인들 중에서는 공자 바로 다음가는 순서였다. 진시황보다는 훨씬 앞섰다. 다만, 우리의 현재 역사교육에서, 채륜에 대하여 제지술 이외에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채륜은 환관이다. 중국 수천년의 환관들 중에서, 긍정적 에너지로 보면, 그의 명성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이 아마도 정화하서양의 정화일 것이다. 정화는 마지막 원정에서 죽음을 맞고, 남경으로 돌아와 묻힌다. 그러나 채륜은 아주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는 어두운 궁중투쟁에 참여했고, 온갖 머리를 짜내다가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채륜은 보통농민집안에서 태어난다. 어려서부터 부친대를 따라서 농사를 짓는다.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싶어서 15살때 그는 태감이 된다. 그는 총명하고 영리하며 글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좋아한다. 소황문에서 계속 승진하여 지위가 비교적 높은 황문시랑이 된다. 바로 이 기간동안 그는 후궁에서 권력을 독단하고 있던 정궁황후 두황후(竇皇后)의 심복이 된다.


두황후는 아들이 없었다. 황후의 지위가 안정적이지 못했다. 송귀인(宋貴人)의 아들이 한장제에 의하여 태자로 세워진다. 두황후는 나중에 궁내 1인자의 지위를 송귀인에게 빼앗길까 우려하여, 채륜을 시켜 송귀인이 "협사미도(挾邪媚道)"를 써서 황상을 저주한다고 모함한다. '무고(巫蠱)'사건을 기획한 것이다.


이 사건에서 채륜이 주심문관(主審問官)이 된다. 채륜은 송귀인자매를 혹독하게 고문하여 마침내 그녀들이 죄를 인정하도록 만든다. 채륜은 황상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송귀인자매를 교형(絞刑)에 처하도록 건의한다. 결국 송귀인자매는 원한을 품고 감옥안에서 독약을 먹어 자진한다.


이어서 두황후는 양귀인(梁貴人)을 협박하여 아직 강보에 쌓인 유조(劉肇)를 빼앗아 자신의 아들로 삼는다. 그리고 황제엑 유조를 태자로 세우게 청한다. 이 일에서 채륜이 큰 공을 세운다. 특히 두황후를 도와 눈엣가시였던 송귀인을 제거해준다. 이로 인하여 채륜은 관직과 작위가 빠르게 올라간다.


한장제가 죽고, 두황후의 10살된 양자 유조가 즉위한다. 그가 한화제이다. 두태후는 수렴청정을 한다. 채륜은 공로로 인하여 중상시에 발탁되고, 어린 황제의 좌우에서 시립하며 국가의 기밀대사에 참여한다. 급여는 이천석이 되고, 지위는 구경과 같아진다. 중국역사상 환관이 국정에 간여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여러 해 이후, 송귀인의 손자인 한안제가 즉위한다. 이때부터 채륜의 죄행을 추궁하기 시작한다. 채륜은 일찌기 그의 조모를 죽였다. 비록 주모자인 두황후는 이미 죽었지만, 이 빚은 누군가 갚아야 한다. 채륜은 자신의 죽을 날이 멀지 않았음을 깨닫고,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자결한다.


이상의 사료는 정사 <후한서>에 나온다. <후한서>의 대부분 원시사료는 동한의 궁중사서 <동관한기(東觀漢記)>이다. 그중 채륜전은 채륜이 죽은 때로부터 겨우 30년이 지났을 뿐이다. 작자는 채륜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래서 <동관한기>에 기술된 내용은 진실하고 믿을만하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채륜의 인품은 문제가 많았다. 다만, 환관으로서, 반드시 뒷배경이 되어줄 사람을 구해야 전도가 있다. 혹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면, 만일 두황후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더라면, 어떤 결과가 되었을 까. 함부로 억측을 할 수는 없지만, 어찌되었건, 채륜이 한 일처리는 너무 지나친 점이 있다


채륜은 조정에서 한동안 좋은 시절을 보내며 자신의 인생에서 최절정기를 맞는다. 그가 상방령을 맡고 있을 때, 서한 이래 마질섬유로 종이를 만들던 경험을 종합하여, 제지술을 개선한다. 나무껍질, 삼, 찢어진 베, 낡은 어망을 원료로 하여 종이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조정에 보고한 후 민간에 보급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종이를 "채후지"라고 불렀다.


제조술 이외에, 그는 세상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다. 그것은 바로 강도(鋼刀)제조법을 개선한 것이다. 그는 친히 공방에서 기술조사를 실시하고, 장인들이 여러 해동안 축적한 경험을 종합하고, 자신의 총명과 혁신을 더하여 이 시기 야금기술을 질적으로 발전시킨다. 그의 검주조공법에 따라 만들어진 검을 훗날 '상방검(尙方劍)'이라고 일컬어지게 된 유래이다..채륜은 수공업공법의 발전에 공헌을 하여 사학자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그는 중국고대과학자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제지술은 인류문명발전에 크나큰 공헌을 했다. 채륜의 이름은 제지술의 전파와 더불어 전세계에 알려진다. 중화민족의 세계문며에 대한 아주 고귀한 공헌이고 세계의 과학문화의 전파와 교류를 크게 촉진시키며, 세계역사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현재 어떤 사람은 채륜의 제지술에 이의를 제기한다. 주로 공로를 모조리 그의 것으로 돌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이전 사람들의 경험을 종합하고 개선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채륜이 궁중투쟁에서 벌인 후안무치한 행동을 크게 과장하는데, 이는 사실 편파적인 견해이다.


부인할 수 없는 점은 채륜이 분명 이전 사람들의 제지기술의 기초 위에서, 이전의 원료와 공법을 개혁하여, '채후지'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나관중이 역대 화본, 희곡과 설사의 기초 위에서, 소설 <삼국연의>를 쓴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공로는 나관중에게 돌려야지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돌릴 수가 없다.


사서에서 소개하는 채륜은 주로 궁중투쟁과 관련된다. 그의 주요업적인 제지술은 겨우 스무자에 불과하다. 중국은 역대이래로 장인을 무시했고, 과학기술에 대하여 경시한다. 그래서 만일 이 사서를 보면 채륜에 대한 이미지는 이전에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 차이가 크다.


백양(柏楊)선생은 채륜을 아주 멸시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인은 영원히 종이없이 지낼 수는 있지만. 이처럼 양심이라고는 저버린 부랄을 깐 혹리는 필요가 없다." 그 말도 나름대로 이치에 맞지만, 그는 사서에 나온 채륜의 나쁜 행동만 본 것이다. 그래서 지나치게 폄하한 것이다. 그의 전제는 설사 채륜이 없더라도 장륜이 있을 것이고, 인류는 종이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다만 시간적으로 좀 늦어질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분명히 과격한 것이다. 비록 채륜에게 부득이한 점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지만, 후궁은 바다처럼 깊은 곳이다. 환관으로서 분명히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조금만 부주의하면 암산을 당한다. 심지어 구족을 멸하게 될 수도 있다. 채륜이 두황후의 위세하에 그녀의 심복이 된 것은 아마도 부득이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채륜의 제지술에 대하여 등황후에게 잘보이려고 했다고 말한다. 그는 민중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 이런 말은 토론할 가치도 없다. 그의 초심이 어떠했든지간에, 객관적으로 가져온 문명진보를 촉진한 효과를 말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채륜의 악행은 그의 시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다만 역사의 긴 강물로 보자면 그것은 그저 창해일속이다. 역대왕조에 얼마나 많은 간신소인이 있었던가.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거의 영향이 없고, 무시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러나 제지술은 다른 과학성과와 함께 후대에 많은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쓰고 있는 것이다. 문화예술등 여러 방면에서도 극히 중요한 작용을 했다. 사람들은 그 이익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채륜에게는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이미지가 부여될 수있다.


채륜의 일생은 폭죽과 같다. 찰라간의 화려함을 남기고, 모든 것은 몰락과 정적으로 돌아갔다. 채륜은 과학자로서 속고 속이는 정치투쟁에 가담했고, 정치투쟁의 희생양이 된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것이고, 더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 우리가 역사의 장막을 통해서 채륜의 배후에 자랑스럽지 못한 부분을 볼 수 있지만, 그래도 기억해야 한다. 채륜은 단지 태감일 뿐이고, 그의 원래 직무 이외에 제지술을 발전시켰고, 인류와 세계에 큰 공헌을 했다. 우리는 거의 도덕적 오점에는 조금 관용을 베풀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