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봉간적역사(指縫間的歷史)
서초패왕 항우를 이기고 서한왕조를 건립한 후, 한고조 유방과 여후는 이성왕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분봉을 받은 8명의 이성왕(연왕 2명)중 7명은 피살되거자 제거된다. 단지 장사왕 오예만이 화를 면하고 선종하였다.
오예는 왜 운좋게 한고조의 독수를 피할 수 있었을까? 주로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약소한 장사왕은 한왕조의 중앙정부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예는 공로로 장사왕에 봉해지는데, 서한 초기에 장사국은 만황지지(蠻荒之地)에 위치하고 있고, 인구가 적었다. 인구는 개략 2만5천호가량이었다. 호당 5명의 인구로 계산하더라도 개랴 10만명가량이다. 장사국은 '문경지치(文景之治)'이후 인구가 12만호에 달하니, 개략 60만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넓고 인구는 적으며, 경제가 낙후한 장사국은 병력이건 전량이건 모두 중앙정부에 대항하기에는 부족했다. 당시에 한나라 중앙정부가 직접 통제하던 군대의 수량만 하더라도 장사국 전체 인구의 몇 배는 되었을 것이다.
서한 초기, 한고조는 일찌기 30만대군을 결집시켜 흉노를 토벌하려 한 적이 있다. 이 부대는 중앙정부늬 모든 병마가 아니었다. 한고조는 분명 수도 장안과 각지에 일정한 위수부대를 남겨두었을 것이다. 이들 부대의 인원수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최소 수만명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중앙정부는 병력방면에서 장사국에 대하여 압도적인 우세를 지니고 있었다. 약소한 장사국은 중앙정부에 위협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한고조와 여후는 오예가 불신지심(不臣之心)을 품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놔둔 것이다.
둘째, 장사왕 오예는 뛰어난 정치적 지혜가 있었다.
오예는 한고조와 여후가 이성왕을 제거하는 행동을 본 후, 신속히 자신의 봉지와 대부분의 군대를 한고조의 친척에게 넘겨서 관할하게 한다. 이후로 여리박빙(如履薄氷)으로 저자세로 일처리를 진행하고, 처자식과 문학에 심취한다. 오예의 처인 모평(毛萍)은 한나라초기의 유명한 재녀(才女)이다. 전설속에서 호남민악(湖南民樂)의 창시자이다. 기원전112년, 한고조는 악부(樂府)를 설치하고, 민간의 노래와 시가를 수집했는데, 지금 남아 있는 양한시대의 민가는 40여수인데, 그중 <상야(上邪)>가 바로 모평의 작품이다.
오예와 처 모평은 시가에 심취하여 한고조는 경계심을 갖지 않았고, 아주 신임한다. 한고조는 일찌기 조서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장사왕은 충성스럽다."
셋째, 장사왕은 이용가치가 있었다.
서한앙조가 건립된 후, 주변에는 아직 신복하지 않은 오랑캐들이 있었다. 이들은 계속하여 국경을 침범하여 괴롭힌다. 예를 들어, 민월, 남월등이 그들이다. 한6년, 민월이 반란을 일으키고, 한고조는 오예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평정하게 한다. 강서남부에 도착했을 때, 오예는 병사한다. 그는 '문왕(文王)'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장사국은 한나라 중앙정부와 남뤌국의 사이에 있었다. 남월국은 여후의 통치기간동안 한나라와 반목한 후, 병력을 일으켜 한나라를 공격했다. 처음 이들의 공격을 받은 곳이 바로 장사국이다. 이 전쟁은 장사국에 아주 큰 손실을 가한다. 나아가 실력도 많이 약화된다. 여후는 처음에 수수방관했으며, 어부지리를 노렸다. 쌍방의 손실이 모두 침중하게 되었을 떄, 비로소 주조(周竈)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남월국을 공격하게 한다. 여후가 사망한 후 주조의 군대는 조정으로 불려간다.
장사국은 한나라 중앙정부에 있어서, 오랑캐를 정벌하거나 막아내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아주 큰 이용가치가 있었다. 한고조와 여후가 장사왕에게 손을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예가 죽은 후, 부부는 장사성의 서쪽에 합장된다. 한경제때에 이르러 장사왕을 세습한 사람은 오예의 5대손 오차(吳差)였다. 오차가 사망한 후, 후손이 없어서, 한경제는 자신의 여섯째 아들인 유발(劉發)을 장사왕에 책봉한다. 유발은 사서에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후손중에는 한황실을 중흥시킨 인물인 동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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