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전록(柳傳錄)
관우의 "항한불항조(降漢不降曹)"는 그를 충의의 화신으로 만들어 주었다. 동시대의 청주황건군(靑州黃巾軍)은 관우와는 반대되는 결정을 내린다: "항조불항한(降曹不降漢)"
동한 말기에 전국적인 황건적의 난이 발발한다. 관군의 잔혹한 진압으로, 대다수는 실패한다. 중평5년(188년), 청주, 서주 일대에서 다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다. 주군을 연파하고, 장리를 주살했다. 많은 관료와 지주는 도망쳐야 했다. 반군은 최종적으로 청주에 집결하였고, 인원수는 백만에 달한다. 이렇게 하여 세력이 큰 청주황건군이 된다.
청주황건군은 청주지역을 몇년간 경영하며, '차전차경(且戰且耕)"(전투도 하고 농사도 짓는)의 정책을 쓰며, 실력이 급증한다. 그후 다시 유격전을 펼치며 청주, 연주, 기수의 3주를 돌아다닌다. 청주자사(靑州刺史) 초화(焦和)는 혼용무능하여, 그저 매일 여러 신들에게 기도만 했고, 하늘이 도와주기만을 기다렸다. 전투준비는 하지 않았고, 황건적이 도착하자, 바로 도망친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 황건군은 즉시 청주(지금의 임치)를 점령하고, 계속 동진한다. 북해(유방의 수광, 기대)로 가서 북해국을 공격한다.
공융(孔融)과 장요(張饒)는 20만을 이끌고 황건군과 대치하나, 연전연패한다. 할 수 없이 주허현(지금의 유방 임구 동남쪽)으로 물러나서 지키면서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린다. 얼마 후, 황건군의 두령인 관해(管亥)가 황건군을 이끌고 다시 공격한다. 공융은 도창(지금의 유방 창읍)으로 도망가타 관해에게 겹겹이 포위된다. 전투는 치열했다. 공융이 급보를 보내자, 평원상 유비가 도우러 온다. 유비의 부장 관우는 관해를 참살하고, 북해의 포위망을 풀어준다. 공융은 이렇게 잠시 숨을 돌리게 된다.
청주황건군은 감히 북해를 공격하지 못하고, 30만의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간다. 태산군(지금의 태안시 대악구 범진)을 공격한다. 태산에서 유주자사 공손찬의 돌연한 습격을 받아, 물자를 모조리 잃어버린다. 할 수 없이 연주로 진격하여, 연주자사 유대를 죽인다. 청주황건군은 비록 인원수가 많고, 전투에 용맹하였지만, 이때는 심각한 곤란에 처하게 된다; 공손찬과의 전투에서 물자를 다 잃었고, 후방의 보급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량의 가족을 데리고 다녀 움직이기에 불편했다. 바로 이 때, 청주 환건군은 다시 강력한 적수 조조를 만나게 된다.
조조가 이끄는 부대는 비록 인원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훈련이 잘 되어 있었고, 전투력이 강했다. 그는 청주황건군이 행동이 불편하고, 보급이 곤란하다는 약점을 파악하고, 정면충돌을 회피하면서, 경기병으로 기습하는 전술을 써서 황건군을 괴롭힌다. 이런 상황하에서 황건군은 한편으로 청주방면으로 퇴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조조와 협상한다. 조조와 함게 한나라조정에 항거하고자 한 것이다. 청주환건군은 조오에게 서신을 보내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예전에 조조가 제남상(濟南相)을 지낼 때 유씨한실의 신단을 허물었는데, 이런 방식은 황건군이 신봉하는 "중황태일(中黃太一)"의 사상과 같다. 그래서 조조도 태평도를 믿는 사람인 줄 오인했었다. 그래서 천진하게 조조도 '동도(同道)"라고 여겨서 조조를 설득하여 황건군과 힘을 합쳐 한나라조정을 무너뜨리지고 한 것이다.
조조는 치세의 능신이고 난세의 간웅이다. 천하대란의 대세에서, 그의 사상은 다중적이다. 유교사상, 법가사상 내지 권모술수를 모두 지니고 있다. 초기의 도교사상은 이 걸출한 정치가, 군사가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하여 노련한 조조는 장계취계로 '동도'관계를 이용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곤경에 빠진 청주황건군을 유인하여 복속시키고자 한다.
이렇게 하여 쌍방은 한편으로 교전하며, 다른 한편으로 협상했다. 수개월간의 과정을 거쳐, 이 강대한 청주농민무장세력은 마침내 조조의 소위 '관대'한 조건하에 휘하로 들어간다. '관대'한 조건은 "항조불항한(降曹不降漢)" 즉 조조에 투항하는 것이지 한나라조정에 투항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청주병은 오로지 조조에게만 충성하고, 청주군은 독립편제를 유지하며, 가족을 적절히 안치한다는 등의 내용이 들어 있다. 재편된 청주황건군은 30만에 이른다. 여기에 가솔을 합치면 100만에 이른다. 조조는 거기에서 정예병 10만을 뽑아, "청주병"이라 칭하고, 그가 천하를 쟁패하는 주력부대로 삼는다. 동시에 그는 청주황건군의 '전투와 농경을 함께 하는' 방식을 본받아, 황건군의 근 100만에 이르는가족들 및 그들이 가진 농기구를 가지고 둔전을 설치하여, 생산하도록 한다. 이렇게 하여 군대전투의 후방공급기지를 만든다.
조조는 이때부터 명성을 날로 덜친다. 승전보를 조정에 보내자 조정은 조조를 진동장군에 임명한다. 조조는 이 10여만 청주병을 바탕으로 하여, 현명한 인재들을 맞이하고, 널리 영재를 모집한다. 이때부터 조조의 수하에는 문으로는 모신, 무로는 전장이 있어 산동을 차지한다. 그러면서 야심이 날로 팽창한다. 이때부터 '능신'에서 '간웅'으로의 변신을 시작한다. 야심만만한 그는 천하통일의 전쟁을 시작한다. 청주병을 조직한 때로부터 관도지전까지 8년간 전쟁을 끊이지 않았다. 청주병은 시종 중요한 역할을 한다. 먼저 복양에서 결사전을 벌여, 여포를 대파하며 산동의 기반을 공고히 한다; 이어서 다시 병력을 허창으로 이동시켜, 한헌제를 조종하고, '협천자이령제후(挾天子以令諸侯)"의 유리한 지위를 차지한다. 이때부터 서주를 취하고, 원술을 멸하며,관도지전의 승리를 거두고, 원소를 격패시키고, 형주로 내려가고, 유표의 항복을 받아낸다. 10여년의 노력으로 중국북부를 자신의 통치하에 둔다.
청주병은 조직부터 조조의 죽음까지 30년간, 정예부대는 시종 단독편제를 유지했다. 그리고 특수한 대우를 받는다. 그 병력의 보충은 반드시 원래의 황건군의 둔호 중에서 해결했다. 그리하여, 청주병은 직업병과 세습병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나중에 조조의 군대가 확대되면서, 중군, 외군, 주군군(州郡軍)의 세 유형으로 나뉘는데, 청주병은 중군에 속한다. 도성이 허창에 주둔하고, 조조의 숙위를 책임지며, 조조를 따라 출정한다. 그들은 조조의 근위부대였다. 자조 가장 관건적인 전투에 투입되었다.
청주병은 조조의 명령만 들었다. 다른 사람의 명령은 듣지 않았다. 220년, 조조가 병사한다. 청주병은 조조와의 약정기한이 끝났다고 여기고, 스스로 갑옷을 벗고 밭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는다. 이때 조정의 여러 신하들은 이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사정을 아는 가규(賈逵)는 그들이 밭으로 돌아가는 것을 인정한다. 긜고 소재지방정부에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통지한다. 조위정권은 무력을 사용하여 진압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각지에 통지를 보내어 고향으로 돌아간 청주병들을 환대하도록 지시한다. 청주병의 최후는모두 청주등지의 고향으로 되돌아가고, 조위정권에 의하여 적절히 안치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청주병의 편제는 30년간 시종 흐트러지지 않았다. 일정한 독립성을 유지한다. 조조는 남북으로 전쟁을 벌이면서, 여러번 패전한다. 청주병은 그래도 흩어지지 않았고, 혼란을 틈타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조조집단에서 어떤 사람은 청주병에 대하여 안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조는 청주병에 대하여 관용과 후대를 계속한다. 조조는 청주병을 신임했고, 청주병도 조조를 신임했다. 장수들이 구름처럼 많은 조조의 집단에서, 청주병출신은 한 명도 없다. 청주병은 조조를 따라 20여년간 전투를 벌이는데, 이 10여만명중에서 장수의 재능을 지닌 사람이 없었단 말인가? 역사서에 기록할만한 가치를 지닌 공신이 없었단 말인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는 청주병이 '항조불항한'으로 '동도'인 조조를 위하여 힘을 보태준 것이며, 한왕조의 군대라고 인정하지도 않았고, 한왕조의 장수라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완전히 조조의 '사병(私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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