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372Degree
조조는 모두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를 숭상하는 사람들은 그가 북방을 평정하고, 법도를 세웠으며, 공훈이 혁혁하다고 본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가 겉으로는 한나라 승상이지만 실제로는 한나라의 도적이며 ,간사하고 교활하며 권력을 농단했다고 본다.
사람들이 "천 명의 마음 속에는 천 명의 햄릿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보면, 조조에 대한 생각도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조조는 중국역사상 가장 논쟁이 많은 인물중 하나이다.
오늘 우리는 서로 다른 시대에 조조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위진남북조에서 당,송까지. 조조에 대한 여론은 호평일색이었다.
오늘날 조조에 관한 이야기와 평가는 서로 다른 사서에서 나온다. 그러나 가장 권위있는 출처는 바로 진수의 <삼국지>이다. 후세의 조조의 평생사적에 관한 기록과 평가는 기본적으로 모두 서진의 사학가인 진수가 쌓은 것이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후세인들을 위헤 긍정적인 이미지의 조조를 썼다. 이 조조는 재능이 있는 자는 기용하고, 지혜와 모략이 많으며, 남정북전하며 공적이 탁월했다. 후세인의 눈에, 진수는 기본적으로 팬과 같은 마음으로 풍운을 질타한 인물인 조조를 숭배하는 마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기록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조조의 빛나는 일면과 함께 조조의 남들이 잘 모르는 어두운 일면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렇게 묘사할 수 있다: 동한 말기의 황실이 쇠약해 지면서, 동탁 이래의 호걸들이 나타나면서 주와 군을 넘는 실력을 가진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당시 얼마나 많은 야심가들이 야망을 불태우며, 별도로 황제를 세우고자 했는가? 그러나 조조는 끝까지 그렇게 하는 것에 반대했다.
마지막에 조조는 대권을 손에 쥐고, '입조불추(入朝不趨), 검리상전(劍履上殿)"(조정에 들어서면서 종종걸음으로 걷지 않고, 검을 차고 대전에 오르다)했고, '위공' '위왕'에 봉해졌고, 수하들이 모두 그에게 황제를 칭해도 된다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황제를 칭하지는 않았다.
부인할 수 없는 점은 ,조조가 이미 황제를 칭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시종 한왕조를 없애고 스스로 새왕조를 세우지 않았다. 일생동안 '신하'로 남은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힘들고 고귀한 일인가.
이와 동시에 진수는 책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조조에게는 비응주구(飛鷹走狗), 숙부기만같은 류의 일을 저지른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우에는 슬쩍 언급만 하고 지나갔다. 아마도 당시의 시국의 제한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고금이래로 어느 사학가도 진수를 낮게 평가하지 않는다. 진수의 조조에 대한 평가는 간접적으로 당나라사람들의 조조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이어서 우리는 당나라사람들은 어떻게 조조를 보았는지 보도록 하자.
기실 한 왕조의 제왕의 가치관은 왕왕 그 왕조의 역사상 어느 인물에 대한 견해를 결정하고, 본왕조의 역사관과 가치취향도 결정한다. 정관19년, 머리가 하얗게 된 이세민은 고구려를 정벌하러 나선다. 도중에 업성을 지나는데, 특별히 글을 써서 조조를 기념한다.
그중에는 비록 약간의 풍량화(風凉話)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조조를 떠받드는 것이다. 제왕까지도 그를 좋아했다. 이것은 대당의 조조에 대한 평가를 보여준다.
당나라의 명사 이흔(李欣)은 친구 유방평(劉方平)을 업성으로 보낼 때, 손을 잡으며 부탁한다: 반드시 서릉으로 가서 나 대신 조조를 보고, 향불을 올려달라. 이를 보면 조조는 당나라때 아주 환영받았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2 북송의 정강지난 이후, 조구가 건립한 남송정권은 서남에 웅크리고 있던 촉한정권과 난형난제의 동질감을 느낀 듯하다.
조조를 대하는 생각은 시대마다 다르다. 천천히 변화가 발생하는데, 주로 변하게 된 계기는 정강지난이다.
만일 송나라가 촉의 후대라고 본다면, 금나라는 위의 우수한 학생이다. 조조는 한나라 신하의 신분으로 황제를 통제했고, 북방이 웅거했다. 금나라 사람들은 북방 오랑캐의 지위로 북방을 차지하고 송나라 황제들을 붙잡아 갔다.
이는 당시 남송정권이 자신의 금나라에 대한 불만을 조조에게 옮기는 이유가 된다. 조조는 이로 인하여 당나라이전의 구세영웅에서 남송이후에는 기세간주(欺世奸主)로 평가된다. 이것은 정통관념이 중간에서 장난을 친 때문이다. 소위 정통관념이라는 것은 절대로 당시 통치자들의 치국이폐를 기준으로 하지 않았다.
남송의 민간에서는 정부의 관념의 영향을 받아, 촉한정권을 동정하게 된다. 이때 남송의 관리들이나 백성들의 마음은 묘하게 일치했다. 한편으로 조조를 요마화하는 운동이 부지불식간에 번개되고, 모두 속속 이 패주의 흑역사를 파내기 시작한다. 거기에 기름을 더하고 초를 더해 조조를 악인으로 만들게 된다.
이때부터 남송이 민간에서는 조조를 좋아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진다. 소동파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회의 선비들은 유비가 패배한 것을 얘기하면 듣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조조가 진 것을 얘기하면, 듣는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조조가 완전히 간적으로 된 후, 사람들은 모두 그를 공격했다. 이전 사람들이 조조에 대하여 쓸 때면 대부분 "태조께서는 어쩌고 저쩌고..."라고 하였는데, 송나라의 이학대사 주희가 조조에 대하여 쓸 때는 "조(操)가 어쩌고 저쩌고.."라고 하였다. 그를 보면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일대효웅의 이름ㅇ르 그냥 불렀다. 삼국시대 오나라사람들이 그의 아명인 아만(阿瞞)을 직접 불렀던 것처럼.
3. 원명청의 시기에는 문학이 거의 남송사회의 조조에 대한 견해를 계승한다.
남송조정의 영향으로, 원말명초의 소설가 나관중은 <삼국연의>를 쓰는데, 기본적으로 남송의 정부 및 민간의 조조에 대한 이미지를 계승한다. "간신'은 자연히 나관중의 발명이 아니다. 그가 글을 쓰기 전에, 사회에서 인정된 조조는 바로 그러했다.
다만 나관중은 글을 너무나 교묘하게 잘 썼다. 이 작품이 일단 발표되어 세상을 뒤흔들자 조조를 간신화하는데 큰 작용을 하게 된다.
기실 남송의 주류견해를 승계하는 외에 도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조조를 원나라이후 나쁜 인물로 만들게 된다. 원나라통치자들은 북방에서 왔다. 그리고 새외의 소수민족이다. 그들의 통치는 단순하고 폭력적이다. 민족과 직업으로 백성의 등급을 나누었고,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진다.
이렇 조정에 대한 불만사상이 문학작품에 반영된다. 조조도 천고의 간신이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그가 북방세력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인민으로부터 욕을 먹고 미움을 받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조조는 아주 억울하다. 그러나 어디에고 호소할 곳이 없었다.
4. 근대이래, 조조에 대한 견해는 편파적이지 않고, 다방면에서 다각도로 그를 평가하게 된다.
예를 들어, 근대의 많은 문학가들은 조조에 대한 평가를 계속하여 내놓았다.
노신은 그의 명저 <위진풍도 및 문장과 약 및 술의 관계>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조는 아주 능력있는 사람이다. 최소한 영웅이다. 나는 비록 조조의 일당이아니지만, 어찌되었건 그에게 아주 탄복한다." 이는 그의 정치적 행위를 긍정하는 평가이다.
노신은 이어서 조조가 공융을 죽인 이야기를 언급한다. 노신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조조가 살아있었다면, 우리는 그에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당초 재능있는 사람을 구할 때는 불충하고 불효한 것도 신경쓰지 않았는데, 왜 불효라는 명목으로 사람을 죽였는지. 그러나 사실상 조조가 다시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그에게 감히 물어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에게 가서 물어본다면, 아마 그는 우리를 죽여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인품과 도덕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를 보면, 대문학가인 노신의 눈에도 조조는 양면적인 역사인물이다. 그의 성공한 일면과 그의 악독한 일면이 있다. 단지 후세의 사람들의 조조에 대한 견해는 이전의 구세영웅에서 나중의 기세간주로 바뀌었는데, 근본원인은 정통관념의 장난때문이다. 당시의 사회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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