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창평군(昌平君): 진나라의 상국이며, 초나라의 마지막 왕인 그는 누구인가? (1)

중은우시 2018. 8. 3. 01:40

글: 집착적진애(執着的塵埃)


기나긴 전국의 역사에서 비록 아주 중요하지만, 거의 언급하지 않는 인물이 있다. 우리는 심지어 그의 이름도 모르고 단지 그의 봉호(封號)만 알고 있다 - 창평군.


지금까지 전해지는 역사기록에서, 창평군에 대한 기록은 기본적으로 많지 않다. 전체 <사기>에서 창평군은 단지 3번 등장한다.


이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인물이 처음 등장할 때는 이미 진나라의 재상(宰相)이다. <사기.진시황본기>의 기록에 다르면, 진왕정9년(기원전238년), 태후의 정부 노애가 반란을 일으켜, 성년관례를 치르고 있는 영정을 죽이고자 한다. 영정은 이를 알고, "상국(相國) 창평군, 창문군(昌文君)에게 명을 내려 병력을 이끌고 노애를 공격하게 한다" 창평군은 정부군의 총사령관으로 군대를 지휘하여 반군을 진압하고, 수백을 참수한다. 당연히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여기에서 우선 설명해야할 것이 있다. 상국이라는 것은 한나라때 나온 것이고, 진나라때는 상방(相邦)이라고 불렀다. 한나라대 유방(劉邦)의 이름을 피휘하기 위하여 상국이라고 부른 것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한나라때의 방식에 따라 '상방"을 '상국'이라고 고쳐쓴 것이다.


<진시황본기>의 내용에 따르면, 노애의 반란을 진압하기 전에 창평군은 이미 상국이라는 고위직에 앉아 있었다. 그리하여 같은 상국인 여불위와 분정항례(分庭抗禮)했다. 진나라조정의 첫째, 둘째가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상국이라는 칭호는 '승상(丞相)'보다 지위가 높다. 예를 들어, 여불위는 장양왕시대에는 '승상'이었다. 진왕정이 즉위한 후에 중보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기 위하여 여불위를 '상국'으로 높인 것이다. 그 외에 <사기.소상국열전>의 기록을 보면, 소하(蕭何)는 원래 승상이었는데, 한고조가 그의 공적을 표창하기 위하여, "승상 소하를 상국으로 하고, 오천호를 추가로 봉했다". 이를 보면 상국의 지위는 승상보다 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발견한 창평군도 '상국'이었다. 이를 보면 그는 진나라에서의 지위가 아주 존귀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진왕정9년이전에 미성년의 영정이 상국같은 국가의 보신을 임명할 수는 없다. 이들 중신은 기본적으로 모두 장양왕이 죽기 전에 임명한 것이다. 


이에 비추어보면, 우리는 합리적으로 이런 추론을 할 수 있다. 창평군은 여불위와 마찬가지로, 장양왕시대의 중신이고, 신임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아마도 여불위와 마찬가지로, 장양왕이 죽기 전에 탁고대신으로 임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해가 지나서 진왕정10년(기원전237년), 여불위가 파면되고 유배간 후, 창평군은 분명히 잔나라조정의 제일인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높은 직위의 대신이라면, 영정을 위하여 큰 공을 세운 인물일텐데, 창평군의 이전 경력은 역사서에서 전혀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노애의 난을 평정할 때, 창평군은 원숭이가 돌틈에서 튀어올라오듯이 나타난다. 이것은 사람들이게 돌연하다는 느낌과 의혹을 같이 안겨다 준다.


우리는 알고 있다. 사마천 부자가 <사기>의 <진본기>와 <진시황본기>를 쓸 때, 주로 근거한 것은 진나라의 관방사료라는 것을. 그렇다면 무슨 원인으로 진나라의 사관은 창평군에 관한 사적을 기록하는데 입을 다물었던 것일까?


아마도, 우리가 먼저 창평군이 <사기>에서 세번째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답안을 찾아볼 수 있을 것같다:


<사기.진시황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진왕정23년(기원전224년), 왕전이 진나라의 모든 병력을 이끌고 초를 정벌하러 나선다. 그리고 영진(백기가 영도를 점령한 후, 초나라는 수도를 진현으로 옮겼고, 여전히 '영'이라 불렀다. 당시 사람들은 이곳을 영진이라고 불렀다.) 남쪽에서 평여(위치는 지금의 하남성 평여의 이북)까지의 지역을 점령한다. 그리고 초왕 부추(負芻)를 포로로 잡는다. 진왕정은 친히 막 점령한 영진지역으로 간다. 이와 동시에 초나라의 대장 항연(項燕, 항량이 부친, 항우의 조부)은 창평군을 초왕으로 모시고, 회하이남지역에서 진군에 저항한다. 진왕정24년(기원전223년), 왕전, 몽무는 초군을 대파하고, 창평군이 죽고, 항연이 자살한다.


<진시황본기>의 내용에 따르면, 창평왕은 초나라사람에 의하여 초왕에 옹립된다. 그리고 진나라에 항거한다. 그러다가 결국 전쟁터에서 죽는다. 이렇게 보면, 창평군은 분며이 진나라의 반도이다. 아마도 체면을 중시하는 영정은 이런 반도가 그의 위대한 이미지를 깍아내릴 수 없다고 보고, 진나라의 사관은 창평군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해놓지 않았을 것이다. 부득이한 경우에만 그의 이름이 나오게 했고, 나머지 시간에는 그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게 했다.


그러나, <진시황본기>는 그래도 창평군에게 제대로 대해주었다. 최소한 그가 3번 얼굴을 드러내게 해주었다.(앞에서 첫번째와 세번째 등장은 상세히 설명했고, 두번째 등장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기>를 자세히 읽으면 발견할 수 있다. <진시황본기>이외에 관련역사를 기록한 <초세가> <백기왕전열전> <몽염열전> <육국연표>등 몇편에서는 창평군이라는 인물이 완전히 증발해 버린다.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왕전열전>과 <몽염열전>의 주인공은 왕전과 몽염이다. 그러니 창평군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이해는 된다. 그러나, <초세가>에도 창평군에 관한 아무런 기록이 없다. 이것은 좀 불가사의하다. 어쨌든 그는 며칠이더라도 초왕을 지내지 않았는가.


우리는 알고 있다. 사마씨부자가 <초세가>를 쓸 때, 잔존한 초나라사료를 참고했을 것이라는 것을. <세가>에는 여러번 초국(楚國), 초군(楚軍)을 "아(我)"라고 부른다. 확실히 이는 초국사서에서 부르는 칭호일 것이다.


다만 이처럼 많은 정도에서 초나라사서에서 온 기록인 <초세가>에서도 창평왕이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키고 초나라왕이 된 사실을 전혀 기록해놓지 않은 것은 정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난 원인은 두 가지라고 본다. 하나는 창평왕을 옹립하여 왕으로 모신 것은 일부 초나라귀족의 행위였다(<진시황본기>에서는 항연이 창평군을 옹립했다고 한다. 다만 이 설의 의문점은 적지 않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찬성하지 않는다. 뒤에서 상세히 설명하겠다). 그리고 수도 수춘(壽春, 지금의 안휘성 수현)쪽의 동의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진군이 교통을 막아서, 수춘방면에서는 아마 창평군이 칭왕한 일도 모를 수 있다. 나중에 수춘이 함락되고, 초나라가 망했으니, 자연히 초나라의 사관은 이 일을 기록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바로 수춘에서는 창평군을 옹립한 것은 반역행위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춘추필법의 정신으로 아예 기록해놓지 않은 것이다.


다만, 사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 창평군이 정말 몸을 숨기고 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의 길을 걸어가야 했다.


그렇다면, 역사에서 창평군은 도대체 어떤 인생을 겪었을까? 그의 일생은 진왕정의 통일육국의 역사와 어떤 불가분의 관계가 있을까?


창평군의 신분을 명확히 하려면 먼저 그의 상국 신분에서 시작해야 한다. 진나라는 상앙의 법을 집행했다: "공이 있는 사람에게 관직을 높여주고, 공이 없으면 비록 부유하더라도 관직은 나눠주지 않는다." 모든 고관대작은 공로가 있어야 한다. 설사 왕실종친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창평군도 반드시 국가를 위하여 공헌을 했어야 그런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것이다.


다만 공로가 있다는 것은 일면이다. 공로가 있는 사람은 많으므로. 상국이 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창평군이 왜 상국이 될 수 있었는지, 여불위와 분정항례할 수 있었는지를 알려면 추가로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어서 우리는 진왕정 초기의 진나라고위층의 실제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 그 시기에, 진나라의 고위층에서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아래의 4개파벌 혹은 세력집단일 것이다.


첫째, 여불위 및 그의 문객으로 구성된 "여불위파". 영정의 부친 장양왕의 친구로서 여불위는 장양왕의 사후에 영정의 '중보(仲父)'가 된다. 소위 '중'이라는 것은 둘째라는 것이니 중보는 '부친에 바로 다음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불위는 장양왕의 사후에 진나라 최대의 실력파가 되어서 최고의 권력을 장악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로 동방각국에서 제자들이 여불위의 문하로 들어온다. 여불위를 통하여 고관직위를 얻어낸다. 에를 들어 이사는 바로 이런 류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여불위는 한편으로 이들 문객으로 하여금 조정의 주요직위를 장악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문객으로 하여금 <여씨춘추>를 편찬하게 하여 자신의 집정에 이론적인 뒷받침을 하도록 한다.


둘째, 영정의 생모 조희. 조희의 정부인 노애, 그리고 노애의 문객으로 구성된 "조태후파"이다. 영정이 어렸을 때, 조희와 여불위는 애매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 시기는 '조태후파'와 '여불위파'가 동맹인 전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정이 자라면서, 여불위는 조희와의 관계를 끊고, 다시 노애가 개입하면서, 조희는 여불위의 반대편에 선다. 그리고 노애를 대리인으로 하여 조정에 간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희, 노애와 그의 문객을 일파로 볼 수 있다.


셋째, 왕씨, 몽씨를 대표로 하는 "군공파(軍功派)". 진나라는 군공입국한 나라이다. 민간에서 정부고위층까지 모두 군공을 최대의 영예로 알았다. 군공귀족계급은 진나라에서 특수한 존재였다. 한편으로 그들의 지위가 숭고하고, 대권을 장악한다. 다른 한편으로 진나라의 법률제도가 삼엄하므로, 고급군관은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다. 사실상, 진나라의 군대는 마치 중립을 지키는 전통이 있었던 것같다. 설사 극단적인 상황하에서라도 군대는 최고통치자의 명령이 없이는 정치분쟁에 관여하지 않았다. 전형적인 사례는 바로 진시황의 사후에 진이세와 조고, 이사의 3명이 일으킨 피비린내나는 정변에도 진나라군대는 중립을 유지한다. 착실히 장성에서 흉노를 방어한다. 몽염과 부소는 비록 삼십만대군의 총사령관이지만,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품지 않았다. 진군의 직무에 대한 충성심과 정치에 대한 불간섭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다만, "군공파"는 진왕에게 절대로 충성하고, 누구든지 진왕의 자리에 앉으면, "군공파"는 그에게 충성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정에 대한 충성심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넷째, 위의 세개 파벌세력외에, 또 하나의 세력이 있는데, 사서의 기록에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 하여 이 세력이 약하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사서에 기록된 여러 흔적들을 보면, 우리는 이 파의 역량을 무시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일파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초국에서온 외척집단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초국파(楚國派)"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영정의 부친 장양왕 이인이 진왕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여불위의 도움을 받아, 효문왕의 적처이자, 초나라공주인 화양부인(華陽夫人)을 모친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아들은 모친을 따라 귀해진다고, 화양부인은 나중에 대진의 왕후가 되고, 그가 이 아들 이인(異人, 화양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인은 당시에 이미 이름을 자초(子楚)로 바꾸었다)을 왕위 후계자로 확립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화양부인 및 그의 형제자매들(양천군(陽泉君)등)이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인(자초)는 아예 진왕이 될 기회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영정도 그저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했을 것이다. 현존하는 문헌기록을 보면, 장양왕은 비교적 인정미가 있고, 감정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장양왕이 집권하던 시기에, 그가 왕위에 오르게 도와준 '초국파'세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화양부인 본인이 계속 건재했고, 진왕정17년까지 살아 있었다. 이렇게 덕망이 높은 여인이 살아 있으니, '초국파'의 세력은 장기간 존재할 수 있었다. 이 파벌의 사람들은 중용되고 고위직에 등용되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진왕정 시기에 계속하여 존재한다. 화양부인이 죽은 후, '초국파'는 점점 제거된다. 이 점은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진왕정 통치초기에, 진나라의 조정에는 개략 4개의 큰 파벌이 있었다. "여불위파" "조태후파" "군공파"와 "초국파". 이 4개의 파벌은 역사적인 원인으로 형성되었고, 동시에 장양왕이 사망하기 전에 안배된 결과이다.


일대군주로서 아무리 인정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장양왕은 균형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가 사망하기 전에, 여불위는 상국의 신분으로 대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사후 여불위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장양왕은 반드시 다른 파벌들로 견제하게 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영정이 친정하기 전의 정국안정을 꾀했을 것이다. 그외에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사후에 조희는 국가의 최고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비록 그는 처와 여불위의 사통을 보지 못했고, 더더구나 노애의 출현은 알지도 못했지만, 아들은 어리고 모친은 한창 때이면 위험한 것은 군왕이라면 누구나 예견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미연이 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여불위와 조희 외에 그는 반드시 다른 권력균형을 유지할 집단을 찾아야 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진나라의 군대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양왕이 아무리 멍청해도 군대로 하여금 정치에 간여하도록 할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화양부인을 대표로 하는 '초국파'는 권력균형을 맞추는데 최적의 선택이다.


객관적으로 분석하면, '초국파'는 확실히 최선의 선택이다. 한편으로, 여불위는 예전에 화양부인과 그녀의 형제자매를 설득하여 자신을 왕위에 앉혔다. 여불위 자신도 일찌기 '초국파'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다. 다른 한편으로, 조희에 있어서 화양부인의 도움이 없다면, 자신가 아들은 여전히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연원으로 보더라도 '초국파'는 '여불위파' 및 '조태후파'에게 모두 은혜가 있어 말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초국파'는 처신이 조용해서 다른 두 파와의 관계를 잘 조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불위는 '여불위파'의 우두머리이고, 조희는 정권을 잡은 왕태후이니 자연히 '조태후파'를 대표한다. 그러면 '초국파'에서도 누군가 한 사람을 내세워 이들과 분정항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화양부인 자신은 나서서 정치에 간여할 수 없다. 그녀의 동생과 오빠는 확실히 능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중임을 맡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한 가지이다. 상국의 자리에 있는 창평군이다. 그는 조정에서 여불위와 대등한 권신이고, 그만이 '초국파'의 대표가 될 수있다. 장양왕이 창평군을 상국에 임명한 것은 바로 여불위의 권력을 제약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므로, 진왕정의 초기에 '여불위파', '조태후파'와 '초국파'는 문관정부의 고위층을 형성한다. '군공파'는 예전처럼 영토를 넓히고, 육국을 쳤다. 오랜 기간동안 각 파벌의 상호균형과 협력으로 진나라의 정치국면은 안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균형은 노애가 정변을 일으켜 영정을 죽이려 하므로써 깨지게 된다.


위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창평군은 진나라국내의 '초국파'이다. 그는 장양왕의 탁고대신중 하나이다. 영정의 초기에 진나라정부에서 여불위와 분정항례할 수 있는 중량급 인물이다. 다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그는 사관에 의하여 의식적으로 덮어졌고, 후인은 그저 흐릿하게 그의 흔적을 엿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창평군이 '초군파'의 우두머리라면, 자연히 그는 초나라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화양부인과 마찬가지로, 그는 왕족출신이고, 초국의 공자(公子)일 것이다.


창평군의 부모가 도대체 누구이냐의 문제에 관하여 현존하는 문헌자료는 우리에게 거의 답을 주지 못한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전여경(田餘慶) 선생은 여러해의 연구와 분석을 거쳐 창평군의 부친이 초경양왕(楚頃襄王)의 태자이며 나중의 고열왕(考烈王)이 되는 웅원(熊元)이고, 그의 모친은 이름없는 진나라 왕실여자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전여경 선생의 견해는 자연히 개략적인 설이고, 관련 검증이 더 많은 증거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서 이루어져야 한다. 어쨌든, 창평군에게는 진나라와 초나라왕실의 혈맥이 흐르고 있다. 만일 부계로 계산한다면, 그는 초왕의 지위를 차지할 자격이 충분한 왕실자제이다. 이 점이 바로 그의 비범한 인생과 비극적인 결말을 도출하게 된다.


사실상, 창평군의 운명은 극히 비범했다. 그의 그 잠정적 '부친'인 초고열왕 웅원도 평범하지 않은 일생을 살았다. 기원전276년(주난왕(周赧王)39년, 진소양왕31년, 초경양왕23년)에 연속하여 수도 영성(郢城, 지금의 호북성 형주 기남성)과 무군(巫郡), 검중군(黔中郡 개략 지금의 호남성 남부, 사천성 동남부 및 귀주성 동북부 일대)를 연이어 빼앗긴 후, 계속 기죽어 지내던 경양왕이 마침내 한번 웅기하여, 진나라에게서 장강연안의 15개 성읍을 탈취해온다. 이 전투의 위하력으로 4년후인 기원전272년, 경양왕은 진나라와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그리고 태자 웅원(혹은 熊完이라 함)을 진나라에 인질로 보낸다. 태자와 함께 진나라고 간 사람은 나중에 춘신군(春申君)이 되는 초나라의 좌도(左徒) 황헐(黃歇)이 있다.


태자 웅원은 진나라에서 꼬박 9년의 시간을 보낸다. 이 기간동안 진나라는 그에게 예의로 대했고, 웅원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인질로 샐활했다. 


9년의 시간은 짧지 않다. 웅원이 진나라에 인질로 잡혀오면서 아마도 부인은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황헐이라는 좋은 친구가 있었지만, 그의 곁에는 몇몇 여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몇명의 진나라여자를 첩으로 삼는다. 그중 한 명의 여자가 아들을 낳았고, 이 아들이 바로 나중의 창평군이라는 것이다. 기원전263년(초경양왕36년, 진소양왕44년), 웅원은 부왕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황헐의 도움으로 진나라를 벗어난다. 도망칠 때 비밀리에 떠나고 급하게 떠났기 때문에, 그는 진나라에서 얻은 첩과 아이를 모두 진나라에 남겨두고 간다.


이렇게 보면, 창평군의 생년은 분명히 기원전271년에서 기원전263년 사이가 될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웅원은 진나라로 오기 몇년전에 이미 진나라 종실여자를 처로 맞이했을 것이다. 이것은 인지상정이다.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평균치를 내보면, 창평군은 개략 기원전268년경에 출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부친이 도망칠 때 그는 이미 5살쯤 되었다.


웅원이 비록 도망쳤지만, 창평군은 진나라아세 핍박을 받지는 않았다. 확실히 진나라의 고위층에는 이들 모자를 보호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의 보호자는 필자의 생각에 분명 화양부인이었을 것이다.


화양부인과 창평군의 관계에 관하여, 사서에 기록은 없다. 다만 우리는 이렇게 추리해볼 수 있다. 화양부인은 초나라 공주이다. 개략 기원전296년(초경양왕3년, 진소양왕11년)에 태어났다. 나이로 추단해보면, 그녀는 창평군의 부친보다 몇 살이 많다. 그래도 대체로 같은 연령대라고 할 수 있다. 화양부인이 진나라로 시집온 시간은 우리가 대체로 추측해볼 수 있다:


<사기.초세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기원전285년(초경양왕14년, 진소양왕22년), "초경양왕과 진소왕이 완(宛)에서 만나고 화친을 맺었다." 진나라와 초나라의 이번 회맹은 배경이 있다. 당시 제나라가 강성하여, 진초가 화친을 맺기 1년전에 제나라는 송나라를 멸망시킨다. 그리고 이웃의 초, 위, 연등 국가를 위협했다.제나라가 강대해지는 것은 다른 나라에 당연히 나쁜 소식이다. 그래서 이어진 몇년동안 진나라와 초나라, 연나라 및 한, 조, 위의 삼국은 결맹을 맺어 제나라를 공격한다. 진초 양국의 화친은 이런 배경하에서 실현된 것이다.


진초양국 화친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개인적으로 이번 화친 항목중에 하나는 바로 초나라가 화양공주(그녀의 초나라에서의 봉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이렇게 불렀을 것이다)를 진소왕의 손자에게 시집보내는 것일 것이다. 바로 나중의 효문왕이다. 당시 화양부인은 개략 11살정도이니 즉시 시집을 간 것응 아닐 것이다. 귀족의 결혼은 골치아프다. 아마도 그때의 화친모임에서는 쌍방군주가 화친의 사항을 결정하고 그후 쌍방이 혼례를 준비하해야하고, 정식결혼은 아마도 2,3년 뒤가 될 거시다. 그때가 되면 화양은 14살가량이다. 당시 여자들은 15살정도에 결혼했고, 귀족여자들은 이 나이보다 더 일찍 결혼했다(아마도 귀족여자들은 영양도 좋고 발육이 빨라서일 것이다). 그래서 14살의 화양은 이미 시집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화양부인이 진나라에 온 시간은 개략 기원전282년가량이다. 10년후 초나라 태자 웅원이 진나라에 인질로 왔을 때, 화양부인은 이미 진나라에서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그녀는 웅원보다 몇 살이 많고 두 사람은 동병상련이었다. 화양부인은 자연히 웅원을 잘 보살펴 부었을 것이고, 게다가 화양부인은 남편과 사이가 좋았다. 아마도 그들 부부가 웅원을 적지 않게 보살펴 주었을 것이다. 나이어린 창평군은 아마도 자주 화양부인 부부를 찾아갔을 것이다. 웅원이 도망간 후 화양은 자연히 어린 창평군을 더욱 잘 보살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추측할 수 있다. 창평군은 어릴 때부너 화양부인과의 관계가 보통이 아니었다. 혹은 수 사람은 깊은 친척의 정을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진소양왕이 죽고, 효문왕이 즉위한다. 화양부인은 마침내 입지가 굳어졌다. 비록 그의 남편이 일찍 죽었지만, 이어서 왕위를 승계받은 장양왕은 그녀가 올린 사람이다. 그래서 남편이 죽었지만, 화양부인의 지위와 권세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여전히 '초국파'의 든든한 뒷배경이 되었다.


장양왕과 창평군의 어릴 적 관계에 관하여 사서에서는 마찬가지로 아무런 기록이 없다. 다만 ,장영왕이 화양부인에게 잘보이려면 자연히 화양부인이 아끼는 창평군과도 잘 지내야 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창평군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초국파' 소장파의 지도자가 된다. 장양왕이 즉위한 후 그에게 아주 잘 대히주고 신뢰했다. 그래서 창평군은 여불위와 같은 탁고대신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진나리에서 높은 지위에 있던 인물이, 왜 나중에 초나라귀족에 의하여 초왕에 옹립되고 진나라와 싸우게 되었을까?


이점에 관하여는 <진시황본기>의 창평군의 제2차등장을 얘기해야 한다.


사실상, 창평군의 이번 등장은 단지 6자이다: "창평군사어영(昌平君徙於郢)"(창평군이 영으로 옮겼다)


"사"는 유배라는 것이다. 여불위가 상국에서 파면된 후, 그와 가솔은 촉(蜀)으로 유매가라는 판결을 받았다. 여불위는 이번에 가면 암살당할 것이라 생각하여 아예 자결해 버린다.


보기에 창평군이 영으로 유배간 것은 그에게 그다지 나쁜 소식은 아니다. 그렇다면 원래 상국의 높은 지위에 있던 창평군이 왜 돌연 유배를 가게 되었을까? 그는 또 왜 하필이면 "영"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을까? 이치대로라면 창평군이 범죄를 저질러 유배를 간다면, 분명히 여불위에 대한 판결과 마찬가지로 파촉으로 유배를 갔어야 한다. 거기는 진나라때 유배가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보내지는 곳이다.보기에 창평군의 유배나 유배장소는 남다른 점이 있는 듯하다.


우리는 먼저 창평군이 왜 유배를 가게 되었을지를 분석해보기로 하자. 창평군이 유배를 간 시간은 기원전226년(진왕정21년)이다. 이전의 기원전230년(진왕정17년)에 '초국파'의 뒷배경인 화양부인이 죽었다. 당시 노애는 일찌감치 죽었고, 여불위는 자살했다. 조태후는 이미 연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228년(진왕정19년)에 죽는다. 화양부인의 사망으로, 영정이 성년이 되기 전에 조정의 권력을 잡았던 실권자들은 이미 모두 사라지고, 상응하여 진왕정의 권위는 날로 높아갔다. 천고일제라는게 그냥 허풍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왕정의 눈에 창평군이라는 상국은 아마 일찌감치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핑계만 찾으면 파면시켜버리려 했을 것이다.


이유는 그럼 무엇이었을까?


사서에 직접적인 답안은 없다. 다만 <진시황본기>에 "창평군사어영"의 앞에 한 마디 내용이 있다. "(진왕정21년) 신정반(新鄭反)" 신정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신정은 전국시대 한(韓)나라의 도성이다. 원래는 정(鄭)나라의 수도이다. 한나라는 정나라를 멸망시킨 후에 이곳으로 천도했었다. 바로 화양부인이 죽던 그 해에 진왕정은 내사(內史, 경기지구 최고행정장관) 등(騰, 사람이름임)을 파견하여 한나라를 친다. 그리고 한나라의 마지막 왕인 한안(韓安)을 포로로 잡는다. 이리하여 한나라가 멸망했다. 진왕정은 한나라이 옛땅에 영천군을 설립한다. 신정은 자연히 영천군의 관할에 들어간다.


한나라는 전국칠웅 중에서 가장 약했다. 그리고 계속하여 "사진(事秦 진나라를 모시는)" 정책을 썼다. 그리하여 진나라 연횡정책의 마전졸(馬前卒)아 되었다. 한비자가 말한대로 "한나라가 진나라를 모신지 30여년이 되었다. 밖에서는 장갑과 가림막이 되고, 안에서는 돗자리와 방석이 되었다." 한나라는 완전히 진나라에 수습되어 기를 펴지 못했었다. 그래서 내사등이 한을 멸할 때, 한나라의 저항은 격렬하지 않았고, 진나라는 가볍게 한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할 수 있다.


당초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할 때 한나라사람들은 진군에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4년후에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켰을까? 이 점에 관하여 사서에는 관련 기록이 없다. 다만 통상적인 이치로 생각해보면, 반란의 원인은 진나라가 한나라유민을 학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한안과 한나라귀족을 학대했다. 그래서 신정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나아가 이렇게 합리적인 추정을 해볼 수 있다. 신정의 반진은 한나라가 멸망한 4년후에 일어났고, 아마도 진나라는 처음에 분명히 한나라에 대한 처리가 관대했을 것이다. 한안과 기타 한나라귀족들도 예의로 대해주었다. 기실 진나라입장에서 이렇게 하는게 유리하다. 어쨌든 통일전쟁을 막 시작했고, 진나라는 관대하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다른 나라의 격렬한 반항을 피하는데 유리할 것이다. 그래야 통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왕21년 신정의 반란은 아마도 직접적인 원인이 분명 진나라가 돌연 한안과 한나라귀족에 대한 관대한 정책을 바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우리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전해지는 사서에 관련 기록이 없다. 다행히 수호지(睡虎地) 진간(秦簡)의 <편년기>에 아주 간단한 두 마디 말이 들어 있다. 바로 한왕안(韓王安)의 최후에 관한 것이다. 그뿐아니라, 간문(簡文)에서는 창평군의 행방도 언급하고 있다.


수호지 진간 <편년기>는 "희(喜)"라는 관리가 진나라 관방사서에서 베낀 몇 단의 편년사이다. <편년기>의 중대한 역사사건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믿을만하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이어서 우리는 간문에 도대체 어떻게 적었는지를 보고록 하자:


첫번째 문구는 이렇다: "이십년(廿年) 칠월 갑인, 구종(嫗終), 한왕거0산(韓王居0山)"


이 문구의 기재로 우리는 알 수 있다. 진왕정20년, 한왕안이 거주하던 곳은 "0산"이다.


이어지는 문구가 우리의 이 글에 아주 중요한 관련이 있다.


"이십일년(廿一年), 한왕사(韓王死). 창평군거기처(昌平君居其處), 유사0속(有死0屬)"


이 문구의 기록은 한왕안이 죽은 시간을 알려줄 뿐아니라, 더더욱 우리에게 한왕사가 죽은 후, 창평군을 한왕안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거주하던 장소로 옮겨거주하게 했다는 것이다. 즉 앞 문구에서 언급한 "0산"이다.


<편년기>에는 창령군이 진왕정21년때 한왕안이 생전에 거주하던 마지막 거소인 "0산"에 거주했다는 것이고, <진시황본기>에서는 "(진왕정21년) 창평군이 영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한왕이 죽고, 창평군이 그 곳에 거주했다"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한왕안이 마지막으로 거주한 장소는 창평군과 같이 모두 "영"의 땅이라는 것을. 그리고, "0산"은 분명히 "영"의 땅 안에 있는 어느 구체적인 장소라는 것을.


<진시황본기>와 <편년기>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이런 단서를 정리해낼 수 있다. 진왕정20년 한나라의 마지막 왕인 한안은 영의 땅에 있는 '0산'에 안치되고, 1년후 한나라의 옛수도인 신정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같은 해 한왕안은 영의 땅에 있는 "0산"에서 죽었다. 한왕안이 죽은 후, 창평군이 영의 땅에 있는 "0산"으로 유배를 오고 "사0속"도 같이 따라왔다.


이런 단서를 쫓아가보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왕안의 죽음과 신정의 반란은 반드시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을 것이고 바로 신정의 반란으로, 한왕안이 죽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분명 진왕에 의하여 처형된 것이다.


그리고 신정반란의 원인은 우리가 이 단서에서 약간을 알 수가 있다: <편년기>는 특별히 한왕이 진왕정20년에 영지의 "0산"에 거주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함리적인 추단으로는 이 1년이전에는 한왕안이 한나라의 옛땅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신정일 것이다. 아마도 다른 곳에서 조상을 제사를 지내고 있었을 것이다. 제사를 끊기지 않게 해야한다는 것은 당시의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왕도'의 체현이기도 하다. 진나라는 당시에 좋은 모범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서, 한나라의 종묘제사를 남겨두었을 것이다.


다만, 진왕정20년, 아마도 형가의 암살사건의 영향때문인지, 분노한 진왕정은 이전에 한나라를 우대하는 태도를 바꾸어, 한왕안을 돌연 영지로 유배보니어 감시한다. 진나라의 이런 조치는 한나라의 유민들을 격노시켰고, 결국 신정의 반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반란은 당연히 진압되었고, 한왕안은 처형된다.


그렇다면, 한왕안이 죽은 후, 진왕정은 왜 창평군은 같은 영으로 유배보냈을까?


먼저 우리가 분명히 해야할 것은 "영"이 도대체 어디를 가리키느냐는 것이다.


전국시대에 "영"이라고 불린 장소는 모두 3곳이 있다.


먼저, 오늘날의 호북성 형주의 기남성(紀南城)이다. 거기는 초나라의 원래 수도였다. 기원전278년(진소양왕29년, 초경양오아21년)에 진나라장수 백기(白起)가 영도를 점령한다. 그리고 초나라 선왕의 분묘를 불태워버린다.


다음으로 오늘의 하남성 회양(淮陽)이다. 주나라때 원래는 진(陳)국의 수도였다. 진국이 초나라에 병합된 후 초나라의 성이 된다. 초나라는 영도를 잃은 후, 진(陳)으로 천도한다. 그리고 진을 "영"으로 바꾸어 부른다. 당시 사람들은 "영진(郢陳)"이라고 불렀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안휘 수현(壽縣)이다. 고대에 수춘(壽春)이라고 불렀다. 기원전241년(진왕정6년, 초고열왕22년), 초나라는 진나라군대를 피하기 위하여 다시 수춘으로 천도한다. 그리고 수춘을 다시 영으로 개명한다.


즉, 창평군이 유방된 이 해(기원전226년), 모두 3개의 지방이 "영"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창평군이 유배된 곳이자, 한왕안이 사망한 곳인 "영"은 도대체 어디를 가리킬까?


현재 사학계의 주류의견은 창평군의 유배장소를 "영진"으로 본다. 즉 오늘날의 하남성 회양이다.


이점에 대하여 필자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첫째, 창평군이 당시에 간 것은 유배이다. 축출이 아니다. 그래서 이 유배장소인 "영"은 반드시 진나라 경내에 있어야 한다. 외국에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수춘은 먼저 배제해도 된다. 남은 것은 유배지가 "영진"이냐 "영도"이냐는 것이다.


<초세가>의 기록에 따르면, 초나라가 수춘으로 천도한 것은 산동 각국이 진왕정이 어린 것을 기회로 합종하여 진나라를 토벌하러 하다가(대장은 조나라) 실패했다. 진나라가 보복할 것이 겁나서, 초나라는 수춘으로 천도한 것이다. 다만 당시에도 영진을 아직 빼앗기지는 않았다. 그래서 제1차천도와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백기.왕전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진나라는 이신과 몽무를 보내어 초를 정벌하러 나선다. 진나라군대는 영천궁을 군대집결지로 하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초나라를 공격했다. 주요 전장은 지금의 하남성 경내의 평여에서 심구일대이다. 이 둘은 모두 영진의 남쪽에 위치한다. 이 전투에서 진나라군대는 패배하고 만다. 진군의 패배원인에 관하여, 필자는 뒤에서 상세하게 논술하겠다. 이곳에서는 잠시 지나가도록 한다.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서에 영진에서의 전투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이신의 초나라토벌은 기원전225년이다. 바로 창평군이 "영"지로 유배된 1년후이다. 창평군의 유배지를 영진으로 보는 학자들은 이신이 초를 토벌하기 전에 영진이 이미 진나라에 점령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본기>, <세가>, <열전>이나 <연표>의 어디를 보아도 영진이 진나라에 점령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이를 보면 이신이 초나라를 토벌하기 전에 영진은 아직 초나라의 수중에 있었다. 진나라가 영진을 점령한 것은 분명히 기원전224년(진왕정23년)일 것이다. 이신을 대체하여 주장이 된 왕전이 "진의 이남 평여까지 취하다(取陳以南至平輿)". 당시 왕전은 진나라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갔기 때문에, 영정이 안심하지 못하고, 직접 새로 점렴한 영진까지 시찰을 왔었다.


이상을 보면, 창평군이 유배를 간 기원전226년에 영진은 여전히 초나라 수중에 있었다. 앞에서 말한 바 있듯이 창평군은 유배를 간 것이고 외국으로 추방된 것이 아니다. 그가 어찌 초나라땅으로 유배를 간단 말인가.


그러므로, 창평군이 유배를 간 곳, 그리고 한왕안의 사망장소는 단지 한 곳일 수밖에 없다: 초나라의 옛 도성이고 당시에 이미 진나라의 남군치소가 된 강릉성(지금의 호북성 형주 기남성)일 수밖에 없다. 당시 초나라사람들은 이곳은 기영(紀郢)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한왕안은 원래 한나라 옛땅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즉 진나라가 새로 설립한 영천군 안이다. 거기서 착실하게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진왕은 형가의 암살사건으로 자극받아 분노한다. 그리하여 한왕안을 남군의 치소인 강릉성(기영)으로 보낸다. 그 결과 신정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한왕안은 처형당한다.


한왕안이 죽은 후, 창평군에게 사고가 생겨 초나라이 옛수도인 기정으로 유배를 온다.


그렇다면, 창평군은 왜 유배를 가게 되었을까? 왜 그를 한왕안이 유배되었던 동일한 곳으로 유배보냈을까? 형주로 유배간 창평군은 또 어떻게 하여 초왕으로 옹립되어 거병하게 되었을까?


먼저 첫번째 문제부터 얘기해보기로 하자: 창평군이 유배가게 된 직접 원인은 무엇일까?


앞에서 얘기했다시피, 진왕정은 기실 일찌감치 창평군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저 그를 끌어내릴 계기만 찾고 있었다. 이 계기는 어떤 학자에 따르면, 진나라 조정에서 병력을 일으켜 초나라를 정벌하는 것에 관한 논쟁으로 본다. 필자도 이 설에 동의한다. 여기에 그에 관해서 설명을 해보기로 하겠다:


기원전230년부터, 진나라는 정식으로 통일육국의 전쟁을 시작한다. 한을 집어삼키고, 위를 멸하고, 조왕 천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연나라 태자단을 핍박하여 죽인다. 기원전226년까지, 진왕의 통일전쟁은 순조로웠다. 한나라는 멸망하고, 위나라는 구차하게 연명하고 있고, 조왕은 포로로 잡혔다. 조나라공자 가(嘉)는 대군(代郡)으로 도망갔고, 연왕 희(喜)는 요동으로 도망갔고, 태자단을 죽였다.


통일전쟁이 이상하리만치 순조로웠다. 이는 진왕정으로 하여금 교만한 마음을 품게 만든다. 통일전쟁을 진행하는 것과 동시에 영정은 진나라조정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


영정의 즉위초기의 몇몇 실권자들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면서, 진나라조정은 이미 영정의 천하로 된다. 선왕이 남겨준 구신은 이제 겨우 왕전과 창평군 둘 정도만 남아서 진시황의 눈앞에 왔다갔다 하고 있다. 이는 권력욕이 강해진 진왕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영정은 이들 두 명을 내쫓을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왕전과 창평군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진나라는 전쟁으로 나라를 세웠다. 진왕정이 통일전쟁을 일단 개시하자, 진나라의 상하는 모두 전쟁을 둘러싸고 움직였다. 이런 상황하에서, 진왕정은 조정의 국면을 바꿀 필요가 있었고, 자연히 군사분야부터 손을 대게 된다.


마침 제1단계의 통일전쟁에서 왕전등 노장을 제외하고, 젊은 장수인 이신이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연라라군대를 추격하고 연왕희를 압박하여 태자단을 죽이게 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진왕정은 이를 보았고, 자연히 젊은 장수로 왕전등 노장을 대체하고 싶었다.


이어서 진왕정이 왕전, 창평군등 선왕의 노신들을 멀리하고 배척한 대체적인 과정을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의 인물대화는 기본적으로 <백기왕전열전>에서 뽑았다. 다만 사료의 기록이 적고, 모호하므로, 필자가 현존 사료에 근거하여 추측한 것도 있다.


삼진(한,위,조)과 연나라에 계속하여 병력을 보내는 동시에, 진왕정은 왕전의 아들 왕분(王賁)을 보내어 초나라에 대해 시험적인 공격을 해본다. 그 결과 가볍게 10여개의 성읍을 빼앗는다. 영정은 초나라가 비록 크지만 전력이 강하지는 않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일거에 초나라를 멸망시키는 일정을 짜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진왕의 주재하에, 초를 멸망시킬 방략에 관한 군사회의가 소집개최된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참석자는 왕전, 이신이다. 다만 필자는 분명 참석자가 이들 둘 만은 아니었을 것으로 믿는다. 다른 군정요인들도 참석했을 것이다. 창평군은 당시에 여전히 진나라의 상국이므로, 자연히 이런 중요한 회의에는 참석해서 의견을 발표했을 것이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영정은 먼저 이신에게 묻는다: "나는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싶은데, 장군은 몇명이 필요한가?"


이신은 역시 소장파의 대표다웠다. 자신만만하게 대답한다: "기껏해야 20만이면 충분합니다!"


아마도 이 숫자는 영정을 아주 기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즉시 의견을 얘기하지 않고, 이어서 다시 같은 문제를 노장 왕전에게 묻는다.


그러나 왕전이 내놓은 답안은 이신과 크게 달랐다: "60만대군이 아니면 안됩니다!"


영정은 그 말을 듣자마자 불만족스러워했다. 60만대군이면 진나라의 모든 병사를 내주어야 한다. 왕전 이 늙은이는 정말 제 정신이 아닌 듯하다. 하물며 당시의 진군은 파죽지세였고, 진왕정의 계획으로는 초나라를 멸하는 동시에 철저히 위나라도 멸망시킬 계획이었다. 진왕정은 동시에 두 곳에서 전쟁을 벌일 계획이었고, 두 국가를 멸망시킬 계획이었다. 어떻게 60만대군이나 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영정은 바로 이야기한다: "왕장군도 나이가 드니 담량이 점점 작아지는가 봅니다. 역시 이신 장군이 담량이 있습니다. 과인은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최종적으로, 진왕은 이신에게 초나라토벌의 총사령관을 맡기고, 20만진군을 통솔하게 한다.


이번 회의에 관하여 <사기>의 기록은 이 정도이다. 그러나 나머지 일부 기록에서는 우리가 회의후에 발생한 일부 사정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백기왕전열전>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왕전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병을 핑계로 빈양으로 돌아가서 노년을 보냈다" 왕전은 빈양 사람이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노장군은 진왕이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자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낙향한 것이다.


이치대로라면 이것은 단지 간단한 의견불일치인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진왕정은 그래도 흉금이 넓은 통치자인데. 그래서 확실히 이것은 왕전이 진왕정에게 불만을 표시한 것이 아니라, 그가 민감하게 진왕정이 자신을 좋게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이 떠나지 않으면 앞으로 좋지 않은 일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감한 것이다.


이상이 바로 사기의 벌초회의사건의 전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왕전은 나이가 들어서 세상물정을 잘 알았고, 싹이 나온 것를 보자 바로 행동을 취한다. 창평군은 어떠했을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상국으로서 그는 회의에 당연히 참석했을 것이고, 분명히 의견을 냈을 것이다. <진시황본기>에는 "왕전이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내용의 바로 뒤에 이어서, "신정에 반란이 일어났고, 창평군이 영으로 유배갔다."라고 적었다.


정상적인 글의 논리로 분석하면, "왕전이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과 "신정에 반란이 일어났고, 창평균이 영으로 유배갔다."는 내용을 긴밀하게 연결시켰다면, 분명히 양자간에는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창평군은 분명히 멸초군사회의에서 왕전과 유사한 견해를 제기했을 것이다. 동시에 창평군은 나이가 조금 어리므로, 태도가 왕전처럼 원만하지 않고(그 후에 그가 감히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더라도 그의 성격은 절대 연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후에도 왕전처럼 마서서 사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영정은 당시에 이미 창평군을 끌어내리겠다고 결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진왕정은 원래 창평군이 마음에 안들었다. 게다가 눈치없는 창평군이 회의에서 그의 뜻에 어긋나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러고도 진퇴를 몰랐다. 게다가 신정의 반란사건에 그는 일정한 책임이 있다. 그래서 영정의 처리의견은 "파면, 영으로 유배"였다. 그래서 한왕안이 있던 곳에 유배를 보낸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영"은 오늘의 호북 형주의 기남성일 것이다. 원래 초나라의 수도였고, 종묘사직이 남아 있는 곳이다. 당시에는 이미 진나라 남군의 치소가 되어 있었다.


영정은 왜 한왕안과 창평군을 전후로 한 곳에 유배보냈을까?


한왕안에 관해서, 일반적으로 학술계에서 그다지 설명이 없다. 어쨌든 망국지군이고, 진왕이 그를 유배보낸 목적은 분명히 그를 원래의 신하,백성들과 멀리 떨어지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이 조치가 오히려 반란을 불러올 줄을.


창평군에 관헤서, 어떤 학자는 그의 초나라공자의 신분을 이용해서, 유배됨과 동시에 남은 영향력으로 현지의 초나라 유민들을 다독거리라는 것을 본다. 그들이 신정에서처럼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필자의 생각으로 그런 견해는 성립되기 어렵다고 본다.


한왕안은 우리가 잠시 접어두고, 창평군을 얘기해보기로 하자.


창평군을 왜 형주로 유배보냈을까? 그가 원래 진왕의 뜻을 거슬리고 진퇴도 모르는데, 이런 사람에게 죄인의 몸으로 다시 그에게 초나라사람들을 다독이는 책임을 맡겼을까? 영정이 정말 그렇게 멍청한 사람일까?


다시 한왕안을 보자. 만일 단순히 한왕안을 그의 옛 신하 및 백성들과 떨어뜨리려면 아예 파촉으로 보내는게 낫지 않을까/ 왜 하필이면 영지의 "0산"이었을까?


그러므로, 비록 문헌에 증거는 없지만, 필자는 여기에서 대담하게 추측해보기로 한다. 두 사람이 전후로 형주에 유배간 것은 영정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이 안배의 목적은 바로 두 사람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다.


필자의 추측은 이렇다. 아마도 당시의 남군 혹은 형주에는 영정이 사전에 배치해놓은 인원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한왕안과 창평군을 죽일 사람이. 그리고나서 정상적인 사망으로 위장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편년기>의 기재중에서 한왕안의 사망은 그저 아무런 감정의 색채가 없이 "한왕사(韓王死)"라고 적었다. 언뜻 보기에 정상사망인지 비정상사망인지 알 수가 없다. 앞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한왕안이 신정에서의 반란사건에 연루도어 죽임을 당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편년기>의 담백한 기록만 보아서는 한왕안이 처결된 것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아마도 한나라 옛땅에서 한왕안의 죽음으로 다시 한번 소란이 일어날까 우려하여, 혹은 다른 나라들을 자극할까 우려하여, 아마도 처결은 비밀리에 행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정상적인 사망처럼 세상에 알렸을 것이다.


그러나 창평군의 경우 그는 영지로 유배갈 때, 이미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왕안의 사인을 국가고위층인 창평군이 몰랐을 리는 없다. 그외에 예전 여불위가 파면되고 유배간 후의 최후도 그는 잘 알고 있다. 여불위와 같이 파면되고 유배를 간 선왕의 탁고대신으로서, 그는 분명 불길한 예감을 가졌을 것이다. 이 점은 절대로 필자의 근거없는 추측이 아니다. 반대로 <편년기>는 당시 평창군의 대응책을 보여준다.


<편년기>의 기재에 따르면, 창평군이 유배갈 때 혼자 간 것이 아니었다. 곁에는 아마도 일부 사사(死士)가 따른 것으로 보인다. "유사0속"


이를 보면, 위험을 예건한 창평군은 이미 최후의 결전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만 이어서 발생한 일은 아마 그 자신도 생각지 못한 것일 것이다. 그는 한왕안과 마찬가지로 흐리멍청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배지의 초나라유민들에 의하여 초왕으로 옹립되고, 광명정대하게 반진의거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창평군이 영지로 유배간 배경을 분명히 알고나면 우리의 다음 임무는 바로 창평군이 반란에 가담한 경위이다. 어쨌든, 이 역사에서 일부러 가리려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창평군이 칭왕반진한 과정을 <진시황본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진왕정22년) 항연(項燕)은 창평군을 형왕(荊王)으로 모시고 회남에서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킨다. 24년, 왕전, 몽무가 형주를 공격하여, 형군을 격파하고, 창평군이 사망한다. 항연도 이어 자살했다." 설명하자면, <본기>의 "형"은 "초"를 가리킨다. 영정의 부친이 이름을 '자초(子楚)'로 했기 때문에 진나라의 사관은 피휘를 위하여 초국을 형국이라고 부른 것이다. '형'과 '초'는 모두 관목을 가리키므로 서로 대체할 수 있다.


위에서 인용한 <진시황본기>의 관련기록을 보면, 창평군이 반란을 일으키는 과정은 진나라가 초나라를 멸망시키는 전쟁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창평군의 사적을 자세히 알려면, 반드시 동시에 진나라가 초나라를 멸망시키는 전쟁의 경위도 알아야 한다.


진군의 마지막 2차례에 걸친 초나라정벌전쟁의 과정은 <본기>와 <세가>, <열전>의 기록이 상호 모순되어 많은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후인들은 각자 자신의 이해와 상상을 덧붙여 짜집기한다. 그러다보니 초나라의 마지막 3년의 역사기록은 모순과 모호함으로 가득하다.


필자의 생각으로, 이 역사기록이 모호하고 모순되는 이유는 아마도 창평군의 반란으로 인한 결과일 것이다. 창평군이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기세가 상당히 커서, 진나라측에서는 일시에 어찌해야할 지를 몰랐고, 그리하여 이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는 덮어버린 것이다. 진나라통일위업이 파죽지세였다는 빛나는 이미지를 살리기 위하여, 진나라사관은 이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모호하게 넘긴 것이다. 초나라에 있어서 창평군이 초왕에 옹립되었다는 것은 수춘과는 무관했다(이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상세히 분석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초나라사관도 이 일을 기록하지 않았다.


바로 이렇게 진, 초의 사관들이 모두 고의로 창평군의 사적을 감추었기 때문에, 이 역사기록은 헛점이 많은 기록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거꾸로 창평군이 초나라에서 마지막 3년동안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의 사적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이 역사는 분명히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어서 필자는 사료에 근거하여(주로 <사기>와 <편년기>의 기록), 분석과 추리를 동원하여 진초결전의 역사 및 창평군의 역할을 알아볼까 한다.


멸초(滅楚)전쟁의 경위를 기록한 것은 <백기왕전열전>이 가장 상세하다. 아래의 내용이다:


"이신 및 몽염(몽무)가 20만을 이끌고 남으로 초를 정벌하러 갔다. 왕전은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피예로 사직하고 고향 빈양으로 가서 노년을 보낸다. 이신은 평여를 공격하고, 몽염(무)는 침(寢)을 공격하여, 초군을 대파한다. 이신은 다시 언영(鄢郢)을 공격하여 격파한다. 다시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몽염(무)과 성보(城父)에서 회합한다. 초나라사람들이 따라와서 삼일밤낮을 쉬지 않고, 이신군을 대파하고 양벽(兩壁)에 들어가며, 7명의 도위를 죽인다. 진군이 도망친다.....왕전은 이신을 대신하여 초를 공격했다. 초나라는 왕전의 군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나라의 병력을 모아서 진나라에 항거한다. 왕전이 도착하자, 견벽청야하고 수비하며,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초나라병사가 여러번 나와서 도전했으나 나서지 않았다......초나라는 여러번 도전했으나 진나라에서 출병하지 않자, 병력을 이끌고 동으로 간다. 왕전은 병력을 데리고 추격하여 공격하게 하니 초군을 대파한다. 기남(蘄南)에 이르러 그 장군 항연을 죽이니, 초병은 패주했다. 진은 승기를 잡아 초나라의 성읍을 공략한다. 한해가 지나서 초왕 부추를 포로로 잡고, 마침내 초나라땅을 평정하여 군현으로 삼았다."


먼저 설명할 것은 항연의 죽음이다. <본기>에서는 그가 자살했다고 했다. 그것도 창평군을 왕으로 옹립한 이후이다. 왜냐하면 창평군이 패전하여 피살되었기 때문에 항연이 비로소 자살한 것이다. 다만, <왕전열전>에서는 항연이 기남지전에서 진나라군대에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 주장에 대하여 <초세가> 및 <몽염열전>도 일치한다. 오로지 <본기>만 다르다. <초세가>에 따르면 "진나라장수 왕전이 우리 군을 기에서 격파하고, 장군 항연을 죽였다"고 적고 있고, <몽염열전>에서는 "몽무가 진의 비장군으로 왕전과 함께 초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항연을 죽였다."라고 적었다. 그래서 <본기>의 말을 채택할 수 없고, 항연은 적군의 손에 죽었다고 보는 것이다.


<본기>, <세가> 및 <열전>의 기록을 종합하면, 필자는 멸초지전이 개시된 초기에, 진군의 진군은 비교적 순조로웠다고 본다. 대체적인 과정은 분명히 아래와 같을 것이다:


기원전225년, 이신이 주장이 되고, 몽무가 부장이 되어, 20만 진군을 이글고 정식으로 초나라를 멸망시키는 전투를 개시한다. 진나라군대의 진군방향으로 추단하면, 이신의 전략의도는 분명히 대군을 둘로 나누어, 주력부대는 그가 친히 통솔하여 여수(汝水), 홍하(洪河)를 따라 남하하여, 상채(上蔡)를 거쳐 초의 평여(지금의 하남성 평여 북쪽, 고홍하하도의 북안)를 공격하는 것이다. 계획에 따라, 이신은 원래 평여를 점령한 후, 다시 남하하여 신채(新蔡, 하남성 신채)로 가고, 다시 여수를 따라 남하하여, 회하북안에 도착하여 좌측익에서 초나라의 수도 수춘을 공격하는 것이다. 또 다른 부대는 몽무가 통솔하여, 진나라의 침(지금의 하남성 심구 동남쪽, 임천 일대)로 진격하고, 승리를 거둔 후 태화(太和)로 남하하여 주력부대와 회합한 후 정면으로 수춘을 치는 것이다.


당시 초군의 진초지전때의 전장은 하남성 동남부와 안휘성 서북부인데, 이 지역은 광활한 평원이고, 험준한 지형이 없다. 진군의 기동작전능력이 초군보다 뛰어나다. 그래서 초군은 적의 날카로움을 피해서 변경일대에 중병을 배치하지 않고, 군대를 수도 수춘(안휘성 수현)의 북쪽에 배치한다.


전쟁토지, 초국이 사실상 스스로 영수와 회하사이의 넓은 국톨르 포기하였으므로, 진군은 거칠 것없이 전진했다. 금방 예정한 계획대로 평여를 점령하고, 침을 점령한다. 1단계 전략계획을 완수한 것이다. 만일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양로의 진군은 이어서 합공하는 형태로 초나라의 수도 수춘을 공겨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일거에 초나라를 멸망시켰을 것이다. 만일 초나라대군이 회하이북에 집중되어 응전했다면 진군의 양루대군은 확실히 성공적으로 초군의 주력을 섬멸시키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백기왕전열전>으 ㅣ기록은 우리에게 당시에 불가사의한 일이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이신이 다시 언영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다시 병력을 서쪽으로 이끌고 가서 몽염(무)와 성보에서 회하한다"


이 말은 아주 짧지만, 두 가지 명백한 의문점이 있다.


첫째, <왕전열전>의 내용에 따르면, 이신이 초보즉인 승리를 거둔 후, 돌연 수춘공격의 기존목표를 포기하고, 오히려 머리를 돌려 '언영'을 공격했다. '언(鄢)'이 어디인가? 지금의 호북성 의성이다. '영'은 지금의 호북 형주 기남성이다. 이신은 분명히 하남에서 싸우고 있었는데, 아직 초나라의 수도 수춘에 도착하기도 전에 돌연 머리를 돌려 호북으로 가야했을까? 원인은 무엇일까?


둘째, <왕전열전>의 이신은 언영지구에서 적을 격파한 후, 다시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몽염(무)와 성보에서 회합했다"고 적었다. 알아야 할 것은 언영의 위치는 지금의 호북성 의성과 형주의 사이이다. 그리고 성보의 위치는 지금의 안휘성 박현(亳縣) 이남이다. 분명히 언영지역에서 보자면 동북방향이다. <왕전열전>은 왜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갔다고 적었을까?


아래에서 우리는 첫번째 의문점부터 보기로 하자.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신이 다시 언영을 공격하여 격파했다"는 것에서 '언영'은 '진영'의 오기라고 본다. 예를 들어, 청나라 학자 양옥승(梁玉繩)은 <사기지해> 권29에서 "신우공언영"조에서 "대사기에서 말하기를, 언영은 백기가 취했고, 남군을 설치했다. 이때는 이미 촉에 속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전의 오기이다." 이후 학계도 대체로 이 견해를 지지한다.


학자들은 <왕전열전>의 이곳이 오기라고 여긴 것은, 그들이 모두 창평군이 당초 유배된 곳을 영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필자의 견해는 역사학선배들과 다르다.


앞에서 우리는 분석한 바 있듯이 소위 "창평군이 영에 유배갔다"는 것은 창평군이 영진으로 유배간 것이 아니라, 초나라의 옛수도인 "영"으로 유배간 것이라고 봐야 한다. 즉, 오늘날의 호북성 형주 기남성이다.


앞에 말한 것처럼, 영진지구는 한왕안 및 창평군이 유배되었을 때 진나라에 속하지 않았다. 당시 초나라는 이미 수춘으로 천도했지만, 천도는 함종실패후 화를 피하기 위함이었고, <사기>에서도 영진이 진나라에 함락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하물며, 한왕안이건 창평군이건 모두 신분이 민감한 특수인물인데, 진왕정이 그들을 유배보내도 좋고, 죽여도 좋지만, 모두 진나라에서 통제가능한 지역에서 해야할 것이다. 이신이 초나라를 정벌할 때 영진이남의 침현, 평여등이 모두 초나라 수중에 있었다. 이를 보면 당시 영진지구도 최소한 진초간에 접경인 불안정한 지역이었다. 민감한 인물을 이런 곳에 유배보낸다는 것은 손쉽게 초나라에 이용될 수 있다(특히 창평군은 초국공자이다). 그러니 절대로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때는 초에 속한지 오래 되었다.는 남군 영현이야말로 한왕안과 창평군이 유배지로 적당하다. 영현은 기산(紀山)의 남쪽에 있어서 기영(紀郢)이라고도 부른다. 필자는 나아가 이렇게 추측해본다. <편년기>이 소위 "한왕거0산"의 "0산"은 바로 기산(紀山)일 것이다. 영정은 한왕안과 창평군을 기산에 연금했다. 그것은 바로 영지의 옛 초국사람들 특히 귀족들과의 접촉을 막기 위함이다. 만일 필자의 추측대로 진왕정은 암중으로 한왕안(기수)과 창평군(미수)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산속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에 용이하다. 창평군을 따라온 사사(死士, 결사대)는 아마도 이 기산의 가운데 숨어 있었을 것이다. 창평군의 호위안전을 담당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백기왕전열전>의 소위 "이신이 다시 언영을 공격하여 격파했다"는 것은 사마천의 오기가 아니라, 한 가지 사실을 명확히 가리키는 것이다. 창평군이 확실히 당시 진나라 남군에 속하는 기영에 유배왔다. 그리고 현지의 초나라구귀족이 그를 왕으로 옹립한다. 그리고 거병하여 반라을 일으켰다. 그리고 <사기집해>에서 인용한 서광(徐廣)의 말처럼, 창평군은 "회남(淮南, 영진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강남(江南, 기영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지명상의 증거 이외에, 필자는 사료를 결합하여 정리에 맞추어 창평군의 반란에 대하여 분석을 해보았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창평군에게 있어서, 반란의 최적시기는 바로 이신이 군대를 이끌고 초군경내로 들어왔을 때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당시 진나라의 정예부대의 대부분이 이신의 손에 쥐어 있었고, 다른 일부분은 왕전의 아들 왕분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당시 왕분은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포위공격중이었다); 이렇게 보면, 관중본거지를 수비하는 군대를 제외하고, 진나라의 다른 지역은 모두 정예부대가 주둔할 수 없다. 그리고 언영지구는 진소왕시대에 이미 진나라에 귀속되어 남군을 설립했고 당시에 전장도 아니었다. 그래서 수비역량이 강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이때 모든 진군의 정예는 회수이북에 집결해 있었고, 강남에 위치한 영지는 반란을 일으키기에 적절한 곳이다.


사료에서 제공하는 나중에 발생한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 창평군이 거벼안 후, 비록 이신부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리고 격패당했지만, 그 본인은 무사했다. 나아가 추단해보면 지휘부는 멀쩡했다고 볼 수 있다. 이신은 회하유역의 전투가 우려되어 오랫동안 강남에 머무를 수 없었다. 창평군을 격퇴한 후 즉시 되돌려서 몽무와 회합한다. 나중에 다시 철저히 패배하게 된다(이신의 패배경위는 뒤에 상세히 논술하기로 한다). 창평군의 이 혁명의 불꽃은 그래도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만일 <진시황본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왕전이 영진이남을 평정하고 초왕 부추를 포로로 잡은 후, 창평군이 비로소 초왕에 옹립되었다면, 이때 진군은 이미 초나라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한 때이다. 당시에는 진왕정이 영진에서 친히 독군하고 있었고, 왕전의 육십만대군이 있었다. 영정의 성격이나 왕전의 실력을 볼 때, 남군의 반란을 평정하는 것은 아주 손쉬운 일이다. 이치대로라면 왕전이 즉시 남하하여 반란을 평정함으로써 변수를 없앴을 것이다. 다만 사서의 기록은 정반대이다. 왕전은 반란을 평정하러 가지 않고, 영정도 그에게 반란을 평정하라고 독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 해에 다시 초나라를 공격해서, "초군을 격파하고, 창평군이 죽었다."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물며 <본기>에서 말한 것은 일가지언이고, 거기에는 불합리한 것이 아주 많다.


예를 들어, 앞에서 언급한 <사기지해>에서 지적한 것인데, 항연은 초군대장으로 전방에서 분전하고, 초왕 부추는 군주로서 뒤에 남아 있으면서 친히 전선에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멀리 대후방의 수춘에 있었다. 왕전이 평여 전선에서 어떻게 초왕 부추를 포롤 잡았는가? 이것이 그 하나이다.


다시, 당시 진왕은 이미 영진에 와 있었다. 진군도 자연히 이곳이 집결해 있었다. 창평군과 초국귀족 및 항연은 바도가 아니다. 어찌 영진에서 반란을 일으킨단 말인가? 영진이 창평군의 반란거점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전에도 상세히 논술한 바 있다. <본기>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이것이 둘이다.


그외에 항연이 창평군이 죽은 후에 자살했다는 것이다. 역시 <세가>, <열전> 및 <연표>와 충돌된다. 이것도 이미 앞에 기술했다. 이것이 셋이다.


<왕전열전>은 원래 항연이 기남지전에서 죽고 초병이 패주했다고 적었다. 이어서 진군은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초나라의 각 성읍을 점령한다. 초나라에 숨쉴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


이를 보면, <진시황본기>의 묘사는 이상하다. 헛점이 너무 많다. 그래서 믿기가 어려운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신이 돌연 계속 수춘을 공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머리를 돌려 "언영"으로 향한 의문에 대한 필자의 해석은 이신이 이때 황급히 언영으로 간 것은 바로 차평군이 이때 초왕에 옹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남(회남이 아니라 강남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사기집해>의 서광은 '회'를 일설에서는 '강'이라 한다고 적어놓았다)지역에서 반진거병이 일어난 것이다.


창평군이 거병한 후의 형세에 대하여 <왕전열전>은 그더 두리뭉실하게 "이신이 다시 언정을 공격하여, 격파했다"는 내용만 있다. 구체적인 과정은 전혀 알 수가 없다.


다만, 종합적으로 보면, 창평군이 거병한 후, 처음에는 신속히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창평군이 거병한 기영은 당시에 이미 진나라의 남군 치소의 소재지이기 때문이고, 남군의 남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무니다. 그리고 언성(의성)은 남군 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신이 다시 언영을 공격했다'는 말을 보면, 전체 남군이 남과 북은 아마도 이미 창평군이 이끄는 반진 반란군이 점령하고 통제했을 것이다. 아마도 구귀족과 초나라유민의 지지하에, 반진형세가 상당히 컸던 것같다.


다만, 창평군의 사람들은 어쨌든 이신 수하의 백전노장이 진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신이 병력을 이끌고 달려올 때, 창평군은 패배한 것이다. 다만, 보기에 반란군의 지도부는 적절한 시기에 물러난 것같다. 그리고 <열전>에서는 단지 "파지(破之)"라는 말로 이신의 전과만 기록했고, "대파지(大破之)" 같은 류의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필자는 이렇게 추정한다. 이신이 급히 회하전장을 버려두고 언영으로 왔고, 당시의 상황은 분명히 긴급하고 낭패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신의 군대는 장거리를 달려와서 전력이 어느 정도 약화되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창평군의 반란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손실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파지'이후에 이신은 더 이상 전과를 확대하지 않고(당연히 이는 이신의 마음 속에 두고 있는 것은 항연이 이끄는 초군의 주력부대일 것이기 때문이다), 머리를 돌려 몽무의 부대와 회합한 것이다. 창평군은 비록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실력은 남아 있었고, 현지 초나라사람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신속히 실력을 회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신의 군대에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앞에서 말한 두번째 의문점이 나온다. 언영이건 진영이건 그 위치는 이신과 몽무가 회합한 장소인 성보의 서쪽에 있다. 그렇다면 이신은 '영'에서 성보로 가서 몽무와 회합한 것이 분명 동쪽으로 간 것인데, 왜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갔다'고 했을까? 이 점에 관한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왕전열전>의 이곳의 문자순서는 아마도 오기가 있었던 것같다.


이 문구를 다시 보자: "이신은 다시 언,정을 공격했고, 격파했다. 그래서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몽염(무)와 성보에서 회합한다. 초나라군대가 뒤따르며 삼일밤낮을 쉬지 않았고, 이신군을 대파한다. 양벽에 들어가고 일곱 도위를 죽인다. 진군이 패주한다."


이신이 이번에 군대를 움직인 결과를 보면, 진군의 이동으로 항연의 부대가 그를 뒤따른다. 진군은 이전의 단계에서 파죽지세였는데, 이제는 뒤루 물러나는 형세가 되었고, 군대를 주둔시켜 지켜야 했다. 이를 보면 창평군의 부대와의 전투에서 이신의 손실은 적지 않았음을 알 숭 ㅣㅆ다. 그외에 사태가 돌연했으므로, 이신은 아마도 함양으로부터의 새로운 지시를 기다렸을 수 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먼저 "인병이서(引兵而西)" 문제는 차치하고, 논리적으로 보면 전체 과정은 분명히 이럴 것이다: "이신군대가 창평군을 격파한다. -- 이신이 부대를 이끌고 몽무와 회합한다 --- 진군이 긴급히 퇴각한다(그렇지 않으면 항연군대가 긴급히 추격했을리가 없다) --- 항연부대가 친군을 추격하다가 전투기회를 잡는다 --- 진군은 멈추고 방어한다 --- 초군이 진군을 대파한다.


이런 논리로 분석하면 필자는 이 말의 원문의 문자배열순서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정확한 순서는 당연히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이은 다시 언,정을 공격했고, 격파했다. 그리고, 몽염(무)와 성보에서 회합하여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간다.  초나라군대가 뒤따르며 삼일밤낮을 쉬지 않았고, 이신군을 대파한다. 양벽에 들어가고 일곱 도위를 죽인다. 진군이 패주한다."


이 순서대로라면 필자의 생각에 더욱 논리에 부합한다. 항연이 삼일밤낮을 추격한 것은 분명히 진군이 신속히 퇴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원래의 문장 순서대로라면 이신은 이미 몽무와 성보에서 회합하였어야 하고, 자연히 성보에 주둔하며 방어하면 된다. 이렇게 하여 제1단계의 초나라에 대한 승리의 성과물을 유지하면 된다. 절대로 진군이 이미 회합하여 성을 고수하고 있는데, 항연이 삼일밤낮을 추격해올 리는 없다. 한편으로 이미 적이 성보에 멈추어 주둔하고 있는데, 초군이 왜 급히 추격한단 말인가. 하물며 이렇게 피로한 초군이라면 분명히 성보를 지키고 있던 진군에 오히려 격패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초군이 죽어라 진군을 추격해야하는 장면이 나올 수 있는 원인은 오직 하나이다. 즉 회합한 진군이 자신들의 처지가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패전한 창평군의 부대가 아직 실력을 유지하고 있고, 아마도 신속히 회복한 후 북상하여 이신군을 공격했을 수 있다. 이신군은 당시에 양로의 창평군과 항연군의 협공을 받았을 수 있다), 초군에 섬멸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머리를 돌려 서쪽으로 철수한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항연부대에 있어서, 당초 수춘에 있을 때, 그들은 돌연 진군의 주력이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다만 당시 항연은 창평군이 거병한 사실을 바로 알지는 못했을 수 있다. 그때 항연과 창평군은 거리가 멀고, 창평군은 원래 유배지에서 감시당하던 대상이다. 초군의 총사령관인 항연이 어찌 창평군을 왕으로 옹립할 기회를 갖는단 말인가? 필자의 생각으로 항연이 창평군을 왕으로 옹립한 사람일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창평군을 옹립한 사람은 분명히 언영지구에 남아 있던 초나라의 구귀족일 것이다. <본기>에서 말한 항연이 창평군을 옹립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다만 그는 여전히 군대를 이끌고 진군의 뒤를 추격했다. 진군이 당시 돌연 철수한 원인을 알아낸 후에 백전노장인 항연은 자연히 그의 앞에 천재일우의 기회가 놓여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항연의 부대는 동에서 서로, 창평군의 부대는 남에서 북으로, 양로로 초군의 앞뒤에서 합공했고, 진군은 대패한다. "입양벽, 살칠도위"는 이 전투에서 초나라가 거둔 휘황한 전과이다. 당연히, 이런 승리는 일종의 우연이고, 진군이 퇴주한 후 창평군과 초왕 부추간의 갈등은 반드시 격화되어 물과 불같은 관계로 될 것이다. 다만, 최소한 당시에는 양로이 초군이 협력하여 이신군을 대파한다. 진군은 몇대 군왕이래로 최대의 참패를 맞이하게 된다.


진군이 패전한 후, 진초양국의 이어진 동작에 대하여 현존하는 사료에는 명확한 설명이 없다. <백기.왕전열전>은 단지 진군이 패전후 영정이 대노하고, 대노한 후 다시 왕전에게 사죄한 후 마지막으로 왕전의 의견에 동의하여 그에게 60만대군을 이끌고 다시 초나라를 정벌하게 했다는 것이다.


사서의 기록은 아주 간단하다. 다만 60만대군은 당시의 진나라에 있어서 온 나라의 병사를 다 모은 것이다. 기본적으로 남녀노소가 모두 나선 것이다. 장년남자는 전선에서 적을 죽이는데 나서고, 장년부녀는 보조작전을 하고, 노인과 큰 아이들은 부대에 물자를 조달하는 일을 했다. 이런 전국총동원은 일시에 이루어질 수 없다. 사실상 이신의 패전후 왕전의 출병까지 중간에 1년의 기간이 있다.


이 1년동안 진나라의 상하는 전쟁준비로 바빴다. 초나라에 패전한 것을 설욕하고자 했다. 그러면 초나라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초세가>와 <육국연표>에는 아무런 답이 없다. 사실상 이신벌초(李信伐楚)에 대해서도 <초세가>에는 한 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당시의 기록에서는 오히려 "진멸위(秦滅魏)"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본국의 전쟁은 기록하지 않았다. 이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창평군이 초왕에 옹립되었다. 이것은 남군의 초국 구귀족이 한 것이다. 초왕 부추는 당시에 분명 몰랐을 것이다.(알았다면 그가 동의할 리가 없다). 예법대로라면, 창평군은 왕을 참칭한 것이다.


다만 당시의 초나라 상황으로 보자면, 부추는 창평군의 일을 관여할 수 없었던 것같다. 하물며 부추 자신이 왕위를 찬탈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이신군이 패주한 후, 초나라는 아마도 동, 서 두 개의 정권이 분립한 상황이 나타났을 것이다. 초왕 부추는 수춘에 있으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로 잔존한 초국사서를 참고하여 기록한 <초세가>는 이 기간에 대하여 본국의 대사에 대하여 한 마디도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창평군은 달랐다. 진군이 패전한 후, 창평군은 아마도 신속히 남군을 포함한 초국의 토지를 수복하고, 초국의 명의상의 영토를 일시에 경양왕21년(기원전278년) 수준으로 회복했을 것이다.


이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영정이 칭제한 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초국이 청양(靑陽) 서쪽을 바쳤는데, 약속을 어기고 우리 남부를 공격했다."


이 말을 한 배경은 이렇다. 영정은 당시에 이미 육국을 소탕했고, 자신의 통일전쟁에 대한 합리적인 해명을 하기 위하여 그는 육국이 멸망한 것은 그들 자신의 문제때문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한나라는 원래 이미 번속국으로 투항해놓고 진나라를 다시 배신했다고 했고, 조나라와 위나라가 멸망한 것은 합종으로 진나라를 공격했기 때문이라고 했고, 연나라가 멸망한 것은 형가가 자신을 암살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초나라의 머리에 붙인 죄명이 바로, "초국이 청양서쪽을 바쳤는데 ,약속을 어기고 우리 남부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영정이 말한 이 일은 도대체 언제 발생한 것일까? 진나라 사관은 진나라의 체면이 상하는 이 일을 기록해놓지 않았다. 그래서 기록이 없다. <초세가>에도 한마디 말이 없다.


다만 이전에 서술한 이신벌초전투의 전과정을 분석하면, 아마도 이런 과정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초, 이신벌초는 파죽지세였다. 초왕 부추는 화를 피하기 위하여, 사신을 보내어 강화를 요청한다. 강화의 중요한 내용은 분명히 청양(호남 장사)의 서쪽 토지를 바치는 것일 것이다.


다만 당시 이신은 순조롭게 싸우고 있었고, 곧 초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으므로, 진왕정은 초나라의 이런 화의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누가 알았으랴. 나중에 창평군의 반란으로 상황이 급전직하되고, 이신이 오히려 패배해버릴 줄은. 진군은 그리하여 북으로 영진, 남으로 언정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서 철수해야 했다.


다만 주의할 것이 있다. 이들 새로 수복한 땅에서 그들이 복종한 것은 멀리 수춘에 웅크리고 있는 초왕 부추가 아니라, 기세를 타고 일어난 항연과 함께 초나라를 해방시켜준 창평군일 것이다.


앞에서 얘기한 바 있다. 필자는 이신군이 퇴각한 후, 창평군의 세력이 신속히 진군이 철수한 후의 공백을 메웠을 것이라고. 그러므로, 당시의 초나라는 이미 둘로 나뉘어 있ㅇㅆ다. 동쪽의 반은 초왕 부추를 왕으로 하고, 서쪽의 반은 창평군을 왕으로 했다.


창평군은 자연히 청양이서를 할양한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땅이 바로 청양이서이기 때문이다. 할양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영토를 개척했다. 그래서 영정이 말한 "나의 남부를 쳤다"는 사건이 나오는 것이다.


당초 창평군은 남군의 치소인 기영에서 거병했다. 다만 이신에게 격패당한 후, 그는 아마도 부대를 이끌고 북상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비로소 항연과 진군을 협공하는 국면을 형성할 수 있었다. 다만 이신군이 진나라로 퇴각한 후, 남양, 남군등에는 세력이 비었고, 창평군은 오로지 한 가지 선택만 가능했다. 빈 땅을 차지하는 것이다.


주의할 것이 있다. 그는 진나라에게서 빼앗은 것이 아니다. 진나라의 주력이 금방 떠났고, 새군대는 아직 모아지지 ㅇ낳았다. 창평군은 초왕 부추로부터 새 영토를 빼앗은 것이다.


창평군은 자신이 이미 왕을 칭했으니 더 이상 부추를 초왕으로 인정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부추도 당연히 창평군이라는 참왕을 인정할 수가 없다. 다만 그들 둘은 최소한 당시에 즉시 싸우지 않았다. 그 중의 관건은 바로 항연에게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항연이 창평군을 옹립했다고 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다만 이것을 가지고 항연이 창평군을 반대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실 역사적으로 보면, 초나라는 원래 원심력이 비교적 큰 나라이다. 초나라 국내에서 국왕 이외에 대성호족인 굴씨, 경씨, 소씨, 항씨등등은 모두 상대적으로 독립된 권력과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초국은 본질적으로 대종족으로 구성된 연합왕국이다. 국왕의 권력은 진나라와 비교할 수가 없다. 이것은 아마 초나라의 영토가 가장 넓지만, 실력은 강하지 않은 원인일 것이다. 만일 국가의 전투력을 따진다면, 초국은 아마도 땅과 백성이 모두 부족한 조나라보다 못할 것이다.


항연은 초나라의 대장이다. 다만 그는 동시에 항씨종족의 가장이다. 그가 충성하는 것은 항씨와 초나리이다. 부추 일 개인이 아니다. 부추라는 왕위를 찬탈한 자에 대하여 항연이 반드시 충성심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


하물며 실제상황을 보더라도, 창평군의 의거는 어찌 되었건 큰 공을 세운 일이다. 그리고 창평군이 서쪽전선을 지켜주면, 동쪽 수춘의 본거지에 웅크리고 있는 부추에게는 방어막이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다. 초국은 당시 나라가 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역량을 하나 더 보탠다면 최소한 항연의 압력을 분담해줄 수는 있었다.


그래서, 항연은 종합적으로 고려한 후, 초왕 부추에게 창평군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권했을 것이다. 앞에서 막아주는 방패막이가 있으면 좋다고. 아마도 그는 이런 이유로 부추를 설득했을 것이다.


다만, 부추는 마음 속으로 불쾌했다. 그래서 그가 주재하는 초나라 관방사서기록에는 창평군이라는 인물을 아예 언급조차 못하게 했다. 그리고 창평군치하의 '서부초국'의 행위는 모조리 '동부초국'의 역사에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기실 언영지구(진나라의 남군)를 쟁탈하는 것같은 대사를 만일 부추정권이 했다면, 그는 분명 사서에 기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언양은 초나라의 옛수도일 뿐아니라, 초나라의 종묘사직이 있는 곳이다. 백기에 의하여 능침이 불태워졌다. 고대는 예의와 효도를 중시했는데, 전국시대도 그러했다. 고도를 쟁탈하고 능침을 빼앗아 오는 것은 성공하든 말든 모두 사서에 기록될 일이다. 그런데, <초세가>에는 아예 언급이 없다. 이를 보면 부추정권이 한 일이 절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