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지금까지 신동(神童) 감라는 전설이라고 여겼다. 신화전설이면 그냥 무시해도 된다. 생각해보라, 무슨 12살짜리가 재상이 되느냐. TV드라마 <대택문>에서 그 할머니가 아이를 교육시킬 때, "인력거를 끌래 아니면 은행을 열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겁을 주거나 격려하게 위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하루빨리 두각을 나타내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
감라는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모두 <사기.감라열전>이라고 얘기하며 감라가 실존인물인 것처럼 얘기한다. 기실 이런 주장은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최소한 어디서 들은 얘기이고, 부분만 알고 있는 것이다. 이 감라의 조부인 감무(甘茂)는 당당하게 대진제국의 좌승상을 지냈는데, 그조차도 저리질(樗里疾)과 하나의 열전에 들어가 있다. 어찌 그 어린아이가 단독으로 열전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그저 조부의 열전 뒤에 부록으로 붙어 있을 뿐이다. 개략 6,7백자이고, 그의 몇 가지 일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감라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감라라는 사람은 감무의 손자이다. 감무가 죽은 후 감라는 나이 12살로, 진나라재상 문신후 여불위를 모셨다." 즉, 감라는 확실히 명문출신이다. 그러나 감라의 대에 이르러서는 그저 일반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서에 그의 부친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그저 무명지배였던 것같다. 명나라때 그의 고향인 영상현에 "이현사(二賢祠)"를 만들었는데, 감무, 감라 조손을 기념하고 있을 뿐, 중간에 감라의 부친은 없다.
감라가 나중에 여불위에게 의탁하여 그의 문객(門客)이 되었다. 당시에는 문객이 유행했다. 소위 계명구도(鷄鳴狗盜)의 인물들까지 모두 문객이 되었다. 여불위는 진나라의 승상으로 자연히 문객이 아주 많았다. 하물며 그는 <여씨춘추>를 조직편찬하였으므로 사람이 많이 필요했다. 감라는 명인의 후손인데, 그가 온다면 여불위는 당연히 환영했을 것이다. 그리고 감라에게 있어서도 첫째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둘째는 기회가 생기면 자신의 재능을 펼쳐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감라는 겨우 12살이었다. 당시 연나라에서는 태자단(太子丹)을 진나라에 인질로 보냈고, 진나라는 장당(張唐)을 연나라로 보내어 재상이 되게 해서 공동으로 조(趙)나라의 하간(河間)을 치려고 했다. 그런데, 장당이 연나라로 가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여불위가 직접 장당을 찾아간다. 그래도 여전히 설득하지 못한다. 감라가 그 말을 들은 후, 자기가 나서서 장당을 설득해 보겠다고 한다. 범수(范睢)가 백기(白起)를 죽인 이야기를 가지고 장당을 겁주어서 장당이 가겠다고 동의하게 만든다. 그 후에 다시 스스로 나서서 조(趙)나라고 가서 장당을 도와서 통보한다. 조왕에게 진나라와 연나라가 인질을 교환한 것은 조나라를 치기 위함이니, 조나라가 다섯개 성을 내주어 진나라로 하여금 태자단을 돌려보내게 하고, 다시 조나라와 연합하여 연나라를 치도록 하는 것이 낫겠다고 한다. 조왕은 동의하고, 연나라의 30개 성을 공격한다. 진나라는 연나라의 11개 성과 조나라의 5개성을 얻는다. 그리하여 감라는 상경(上卿)에 봉해지고 조부 감무가 이전에 진나라재상때 하사받았던 전답과 저택을 얻게 된다.
이야기를 듣고 나면 정신이 없을 것이다. 기실 원래 전국시대에는 네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네가 있다. 아주 복잡하다. 어쨌든 이 감라는 진나라의 "연연공조(聯燕攻趙)"전략을 "연조약연(聯趙弱燕)"으로 바꿨고, 진나라는 이 투쟁에서 승리자가 되고, 연나라가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외교활동이 끝난 후, 감라는 진나라에 큰 공을 세워서 상경에 봉해진다. 이것이 바로 후인들이 "감라가 12살에 재상이 되었다"고 말하는 연유이다. 기실, 이 사건의 진위는 차치하고, 이 상경이라는 것은 대우상으로 승상과 유사한 것일 뿐이고, 승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사기>에서 얘기하는 것은 기실 바로 이런 이야기이다. 1개의 과정 4개의 단계이다. 즉, 장당을 설득하여 연나라고 가게 한다, 진왕을 배알한다, 조나라에 사신으로 간다, 상경이 된다. 이 이야기의 근거는 모조리 사마천 한 사람의 기록뿐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사기>는 개인적인 감정이 농후하게 들어가 있다는 것을. 많은 이야기에는 개인적인 선호가 들어가 있다. 후세의 소설에 가까울 정도이다. 그래서 그렇게 생생할 수 있는 것이다. 감라에 대한 서술에 대하여 필자는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나이는 분명히 잘못되었다. 이 12살 짜리가 문객이 된다는 것은 내가 믿을 수 있다. 어쨌든 신동이니까. 현재도 이런 정도의 나이로 과기대학 소년반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여불위의 지력으로 보면, 그에 대하여 최소한 인식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만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면서 군국대사를 그런 어린아이에게 맡길 수야 없지 않은가. 이 점에서 필자는 심각한 의문이 있다. 하물며 당시는 교통이 불편하여 진나라에서 조나라로 가고, 다시 연나라로 가고, 다시 돌아오고, 다시 상을 받는 것이 모두 이 1년안에 완성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분명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사건에 대하여 크게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다만 12살 혹은 13살도 크게 관계는 없다. 필자는 그저 사마천의 기술이 간ㄱㄹ하여 후인들에게 큰 상상의 공간을 남겨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2살의 감라와 세상에서 계산이 가장 빠른 여불위가 같은 조정의 신하로 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마천도 단지 이 사건만 기록했을 뿐, 다른 것에 대하여는 함구하고 있다. 심지어 감라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말이 없다. 이것은 또 왜일까?
감라가 어떻게 죽었을까? 이에 대하여 무질승선(無疾昇仙)의 황당한 주장 외에, 널리 알려진 것은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갔다는 것이다. 개략 감라가 상경이 된 후, 왕은 그를 내궁으로 부른다. 그리고 궁에서 낭낭(娘娘)을 모시고 꽃이나 감상하고 바둑이나 두게 하면서 궁을 나가지 못하게 한다. 궁안에서 그는 진왕의 잔혹한 면을 보게 되고, 폭군을 더 이상 보호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그는 궁안에 갇혀 있어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하루를 일련가이 지내다가 결국은 삶을 포기할 생각을 한다. 그래서 순국하기로 한다. 하루는 감라가 낭낭(娘娘)과 바둑을 두는데, 돌연 진왕이 궁으로 돌아왔다. 감루는 한가지 계책이 떠오른다. 진왕이 궁문을 들어설 때, 바로 낭낭의 발을 잡는다. 그것을 마침 진왕이 보게 된다. 진왕은 화가나서 불같이 화를 내고, 바로 검을 들어 감라를 찔러 버린다. 검이 한번 휘둘러지자, 일대신동 감라는 핏물 속에서 죽어간다.
이런 주장은 정말 가소롭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말하는 진왕이 진소왕(秦昭王)인지 진시황인지 모르겠다. 만일 전자라면, 이 낭낭은 분명히 후인들이 음탕제일녀라고 부르는 조희(趙姬)일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이 조희는 무녀 출신이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그녀를 조비연, 양귀비와 더불어 무용계의 삼대천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바둑을 두었다는 기록은 없다. 아마도 무용을 좋아하는 조희로서는 바둑까지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바둑을 줗아해서 누군가 같이 두어주어야 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믿을 수가 없다.
만일 낭낭이 진시황의 황후라면, 그건 더욱 황당하다. 이 진시황에게 무슨 황후가 있었는지 무슨 낭낭이 있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천고일제인 그는 일생동안 어떻게 장생불로할지만 고민했다. 여자는 그저 배설의 대상일 뿐이었다. 역사상 그가 황후, 낭낭, 비빈을 두었다는 여하한 기록도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천하에서 그의 모친 조희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가 총행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얘기하는 진왕이 진시황은 아닐 것이다.
이럻게 보면, 감라는 분명 정신이 이상하거나 모자란 사람이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만일 정상적으로 사고한다면, 목숨을 버리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게다가 낭낭의 발을 만질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음탕하거나 경박한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 군자와 선비는 고결한 품격을 추구하는 행위준칙이 있었다. 거기에 위배되는 일을 감라같은 명문의 후손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총명하기 그지없는 인물이 어찌 이렇게 스스로에게 오명을 남기는 선택을 할 것인가. 그래서 나는 믿지 않는다.
가장 큰 가능성은 아마도 감라가 상경에 봉해지면서, 그의 주인인 여불위의 불만을 샀을 것이다. 예전에는 무시하던 하인이자 어린아이가 이제는 같은 조정의 신하로 된 것이다. 이것은 치욕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가 난감해할 일이다. 그래서 여불위가 무슨 수완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잠시 나타났던 감라는 이후 인간세상에서 사라진다.
길게 얘기했지만,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감라에 대하여 필자는 그런 사람과 그런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는 과장된 점이 있을 것이다. 사마천은 여기저기서 들은 말에다가 상상력을 가미한 것일 뿐이다. 후세는 그의 기록을 와전하면서 감라를 어린아이들에게 격려하는 교재로 삼게 되었다. 더더구나 두목(杜牧)은 시까지 써서 남겨서 감라가 더욱 유명하게 만든다.
감라석작진승상(甘羅昔作秦丞相)
자정증위한연란(子政曾位漢輦郞)
천재중봉왕시독(千載重逢王侍讀)
당시환도유문장(當時還道有文章)
이렇게 되자 감라는 유명해지지 않을래야 유명해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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