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창해일속(滄海一粟)
이런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일찌기 의무교육단계의 역사교과서에 나온다.
그를 언급할 때면 그가 '공거상서(公車上書)',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주재했다고 여긴다.
모든 사람은 그를 큰스승으로 여긴다. 국학대사(國學大師)
그 자신도 자기를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바로 양계초(梁啓超), 담사동(譚嗣同), 임욱(林旭), 유해속(劉海粟)등 풍운인물의 스승이다.
바로 강유위(康有爲)!
강유위는 확실히 저작이 자기 키만큼 되는 대사이다. 그는 <대동서> <신학위경고> <공자개제고> <무술주절>등의 놀라운 저작을 남긴다.
그가 저작에서 제시한 견해는 신선하고 옛것을 타파하여,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모두 겸비하는 학자로 놀랍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강유위는 지식이 있고 명망이 있는 중년인일 뿐아니라, 재산을 모으는데도 뛰어났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부동산투자를 한다. 안목이 뛰어나서, 한번도 실수한 적이 없다.
그는 또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100여년전에 그는 노르웨이의 나지섬 심지어 북극까지 탐방한다.
맞다. 그는 북극에 간 최초의 중국인이다. 이전에 그는 홍콩,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카나다, 그리스, 이집트, 브라질, 멕시코, 싱가포르, 인도등 42개국가와 지역에 갔었다(그 자신은 "31개국을 거쳐 60만리를 갔다"고 했다)
이렇게 대단한 열정돠 돈이 있는 인생을 살았는데,
강유위에게는 문인의 눈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동자시(童子試)에 합격하지 못했다.
즉 동자시도 합격하지 못했으므로 수재(秀才)도 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생각해보라 관료사회에 나가려는데 수재조차 따지 못했다면,
네가 말을 해도 누가 들어주겠는가?
이런 화면을 떠올려 보자.
한 무리의 북대, 청화의 학생들이 중학교를 졸업하지도 못한 사람을 데려와서 같이 이상을 논할 수 있을까?
관리들은 조복을 입고 정대를 달고, 입만 열면, 당신은 어느 해의 한림입니까를 묻는데,
한 마디만 물으면 대답한 말이 없는 장면은 얼마나 난감할 것인가.
여기에 문제가 있다.
중국의 교과서에 실린 공거상서를 좌우한 사람,
혼자서 민족위기를 구하고 민족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유명한 무술정변을 일으키기 위하여 여론분위기를 형성한 <신학위경고>, <공자개제고>를 쓴 사람
청말 역사문화시기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 사람,
지금가지도 여전히 바이두백과에서 9개의 그를 소개하는 내용이 있는 사람,
그런데 그가 대청왕조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첫단계의 시험조차 통과하지 못했다니.
그런데도 그는 이름을 떨친다.
그는 도대체 무슨 능력이 있었을까
그는 당연히 그의 비밀무기가 있었다: 좋은 제자.
강유위의 일생에서 가장 잘하고 가장 대단한 한가지는 바로
학생을 가르친 것이다.
여기에는 힘을 아끼지 않았다. 일체를 돌보지 않았다. 극력 학생을 거둔다.
그리고 그의 안목은 정말 뛰어났다.
좋은 학생을 만나면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 학생은 학식으로도 그를 뒷받침해주고, 공명에서도 그를 뒷받침해준다.
알고 있는가, 강유위는 일생동안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지만,
그의 학생은 모두가 하나같이 대단했다.
양계초, 강유위의 광동고향사람. 12살에 수재가 되고, 17살에 거인이 된다.
광서제는 일찌기 양계초를 만나보고 그의 글을 높이 평가한다. 그리하여 그에게 경사대학당의 역사국 일을 하도록 맡긴다.
임욱, 17살에 거인이 된다. 재능이 발군이었고, 4품의 직함으로 군기장경상행주가 된다.
양예, 그는 직접 어렸을 때 우공입조(優貢入朝)한다. 현령 시험에 합격하고 나중에 4품의 직함으로 군기장경상행주가 된다.
유광제, 광서9년 계미과 전시 2갑88명으로 진사가 된다. 4품 직함으로 군기장경상행주가 된다.
담사동, 과거에 합격하지 않았다. 31세에 <인학>을 써서, 유신파의 첫번째 철학저작이 된다. 또한 중국근대사상사의 중요한 저작이 된다. 담사도은 광서제의 인정을 받아 4품 직함으로 군기장경상행주가 된다.
그들은 모두 강유위의 제자들이다.
원인, 도대체 무슨 원인일까?
그저 시대가 영웅을 만들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강유위은 스스로 확실히 운명이 준 기회를 잘 잡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의 학설과 관점 즉 <대동서> <신학위경고> <공자개제고> 이런 이론이 당시의 젊은 청년들로 하여금 그의 문하에 들어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피한 점은
이들 책이 나중에 강유위가 조용히 지내는 국학대사 요평(廖平)의 저작을 표절했다는 것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요평은 이렇게 말했다: <신학위경고>는 자신의 <벽유편>을 표절했고, <공자개제고>는 자신의 <지성편>을 표절했다.
그리고 친히 강유위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권리를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당연히 강유위는 절대 부인한다.
그러나, 강유위는 확실히 별일없이 요평을 찾아가곤 했다.
나중에 강유위의 제자 양계초도 이렇게 말한다: "강선생이 공양을 공부하고, 금문을 공부한 것은 연원이 정연(요평)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좋다.
어떤 때는 출판계에서도 이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표절한 사람이 오히려 유명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이름을 빨리 날려야 한다는 진리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표절이라는 것은 확증이 없다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강유위에게는 또 하나의 흑역사가 있다. 그것은 어떻게 해도 지울 수가 없다.
그것은 바로 거짓말을 한 것이다.
백일유신에서 강유위는 입만 열면 서방을 얘기하고 말만 하면 개혁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유신이 실패하기 전에, 그는 해외를 가본 적이 없다.
아마도 길에서 산 <해국도지>같은 것을 봤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실제로 접촉해 본 적은 없으면서, 구호만 요란했다.
유신변법이 일단 실패할 것같자, 가장 먼저 도망친 것은 바로 그이다.
도망자가 된 후에, 그의 일생은 거짓말을 가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길을 걷게 된다.
"나에게는 의대조(衣帶詔)가 있다."
해외로 도망치면서 많은 금은주보를 가져가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없다.
그 강유위는 유신실패후, 해외로 가면서 뭘 가지고 살았을까?
산인(山人)은 나름대로 묘계(妙計)가 있는 법이다.
강유위는 그가 광서제에게 받은 의대조가 있다고 했다. 자기에게 해외에서 역량을 모아서 자신을 구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의대조'가 있으므로, 해외의 화인들은 바닷물처럼 그에게 돈을 모아서 건네주었다.
당연히 돈을 준 것은 광서제를 구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확실히 강유위는 그 돈을 광서제를 구하는데 쓰지 않았다.
그렇지 않음녀 그가 무슨 돈으로 세계여행을 하고, 곳곳에 부동산을 구입했겠는가?
이 일에서 가장 역겨운 것은 강유위가 돈을 사기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고 다닌 것이 아니다.
광서제는 확실히 의대조를 남겼다. 그러나 강유위에게 준 것이 아니다.
그의 제자인 양예에게 주었다.
이 밀조의 내용은 이러하다:
"최근 들어, 황태후의 뜻을 살펴보니, 법을 다 바꾸고자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 황당하고 멍청한 대신들을 축출하고, 통달영용한 사람으로 하여금 정무를 이끌게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렇게 하면 인심을 잃을까 우려한다....그대는 임욱, 유광제, 담사동 및 여러 동지들과 속히 상의하여, 주청을 올려달라. 군기대신을 통해서 올려라. 그러면 짐이 깊이 생각한 후에 다시 처리하겠다. 짐은 실로 아주 초조하기 그지없다. 특별히 말하노라."
강유위는 자기의 학생들로부터 이 의대조의 내용을 들었다.
백일유신이 실패한 후, 그의 학생들은 채시구에서 목이 잘린다.
강유위는 이제 모두 죽어서 확인할 길이 없겠다고 여겨서인지 해외에서 대거 선전한다.
광서제가 자신에게 의대조를 주었고, 그는 돈이 필요하다고....
결국 모든 것은 돈을 위한 것이었다.
1909년 선통제가 즉위한 후,
양예의 아들인 양경창(楊慶昶)이 이 밀조의 원본을 광서제의 동생인 섭정왕 재풍에게 전달한다.
강유위가 밀조를 위조한 진상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밀조까지 위조할 수 있다.
그러면 무슨 일이든 못하겠는가.
강유위의 <무술주절>에서 자신이 광서제에게 올린 모든 주절을 실었다.
고증을 거친 결과, 백여통중에서 그가 올린 것은 1통반에 불과했다.
강유위는 <대동서>에서 남녀평등, 인인평등을 주장한다.
시간이 검증해준다. 강유위는 일생동안 돈이 많았을 뿐아니라, 마누라도 많았다. 그리고 모두 17살때 그에게 시집왔다.
곳곳에 노비가 있었다. 이것이 강유위의 대표적인 장면이다.
안개가 걷히면 본질이 보인다.
강유위는 도댕체 왜 유위(有爲)인가?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장태염(章太炎)은 존경할만한 선생이다.
그는 강유위를 얘기할 때 이렇게 말했다:
국지장망필유(國之將亡必有)
노이불사시위(老而不死是爲)
나라가 만하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데서 '유(有)'
늙어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데서 '위(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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