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유위)

캉유웨이(康有爲): 이상추구와 현실선택의 차이

중은우시 2008. 10. 9. 22:59

 

 

 

글: 마라(摩羅)

 

이는 하나의 기이한 현상이다: 어떤 때는 한 위대한 역사인물이, 그가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그가 손끝으로 행하는 것이 왕왕 많이 다르다. 그의 이상추구와 현실선택의 차이는 자주 사람을 놀라게 한다.

 

캉유웨이가 1894년 <<대동서>>를 쓸 때, 그는 아직 36세의 청년이며,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시골의 서싱이었다. <<대동서>>는 역대 이래로 인류의 여러가지 고난과 사회의 갖가지 죄악을 열거한 후, 사유재산이 없고, 계급이 없으며, 사람들이 서로 친하고, 사람들이 서로 평등한 대동낙원의 위대한 이상의 건설을 제안하였다. 캉유웨이는 확실히 민중의 아픔을 아는 현철이고, 종교가의 심정을 지니고 있으며, 인류를 위하여 고난을 배제하고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최종적인 사회보장을 하고자 하는데 열중했다. 이 점은 마르크스나 다른 유토피아사상가들과 일맥상통한다.

 

<<대동서>>는 미래사회의 전망과 구상에 대하여 상상력이 풍부했다. 만일 캉유우이가 문학의 수단으로 이 주제를 표현했다면, 아마도 유럽의 <<유토피아>>, <<선시티>>등등의 유토피아 저작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광범위한 독자를 확보하고, 큰 영향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책에는 고귀한 발명과 기원이 아주 많다. 예를 들면, 부녀해방, 노예해방, 국경취소, 계급취소, 정부의회화, 정치영수취소등등.

 

그러나, 캉유웨이는 다 쓴 후에 이러한 사상을 전파하거나 보급하는데 노력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그는 이 저작을 비밀로 하여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단지 두 명의 아끼는 제자(그 중의 한 명이 양계초이다)에게만 보여주었다. 그 후에 이를 상자 속에 넣고 다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정력은 이때부터 현실정치와 사회의 연구에 쏟았고, 점차 군주입헌, 변법자강의 사상을 형성한다. 그후 몇년간, 그는 시세의 역량과 광서황제의 지지를 바탕으로 신속히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여, 일막의 헌정을 제창하고 민권을 호양하며, 중국을 개조하는 위대한 변법운동을 펼친다. 그 때 광서황제는 그에게 친히 구국방략을 물음으로써, 그를 변법자강의 총설계사로 봐주었다.

 

캉유웨이에 있어서, 입헌변법은 그가 역사실천에 쏟은 내용이고, 대동이상은 그의 사상배경이며, 그의 동력원이었다. 마음 속의 이상은 당연히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 그것은 왕왕 시대를 앞서가거나 아주 철저하거나 아주 성결한 것이다. 그러나 무대앞에서의 노력은 현실적일수록 좋다. 이는 왕왕 타협, 초조, 위축, 거래, 굴복이 충만하고, 어떤 때에는 심지어 자신이 영광스럽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캉유웨이가 이상을 기술한 <<대동서>>에는 황제의 위치가 없을 뿐아니라, 심지어 민주정치중의 정치지도자도 없다. 이는 철저하게 하늘과 땅을 뒤집어버린 것으로 만주족 황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현대민주정치를 신봉하는 정치가들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캉유웨이가 현실에서 펼친 변법방안중에 그 목표는 단지 민주성격의 내각과 의회를 건립하는 것이고, 내각의 위에는 여전히 황제와 황실의 지위를 보류하였다. 이는 혁명가에게 있어서는 '자체모순'이며 실로 너무나 형편없고, 우매하며, 반동적이다.

 

캉유웨이의 이상과 현실서낵의 차이는 너무 크다. 다만, 이를 인격분열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양자간에는 긴밀한 관련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동서>>는 공자, 플라톤등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온 사회이상을 계통적으로 묘사한 것이고, 캉유웨이, 양계초, 담사동등 위대한 인물들이 정치개혁에 종사할 때의 사상배경이다. 바로 세계대동의 위대한 이상은 그들의 역사실천에 무궁한 정신역량으로 작용하였다.

 

캉유웨이의 선택은 공자와 아주 유사하다. 공자의 이상은 '대동(大同)'이다. 다만 그는 일생동안 '소강(小康)'을 실현하느라고 뛰어다녔다. 그가 추진한 '예제"는 바로 소강사회의 제도적 보장이었다. 마음 속의 이상은 계속하여 공자에 의하여 아주 멀리 밀려나 있었고, 우리는 자주 그가 한때는 그러한 이상을 가졌다는 것도 잊어버린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공자의 이미지는 주로 '대동'과 연결시키지 않는다. 그저, '극기복례'와 연결시킬 뿐이다. 마찬가지로, 캉유웨이의 '대동'이상은 기본적으로 아는 사람이 없다. 그의 이미지는 주로 '변법운동'과 연결되어 있다. 캉유웨이의 <<대동서>>는 그가 서거(1927)한 여러해 이후에 비로소 1935년 중화서국에서 출판한다. 이때 중국사회의 각종 사조는 오화팔문, 오채빈분이었다. 더욱 급진적인 사상일수록 더욱 따르는 자가 많았다. 기세가 대단한 혁명의 홍수가 이미 몇 차례 고점을 연출하여,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주류가 되었다. 개량사상과 군주입헌의 정치목표는 일찌감치 조소를 받고 타기(唾棄)되었으며,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캉유웨이는 더더욱 부유(腐儒), 보황파(保皇派), 보공파(保孔派), 반동파의 죄명을 수십년간 덮어쓰고 있었다. 이 때 출판된 그의 사상저작을 누가 관심이나 가졌겠는가?

 

최근 20년간, 학술계는 캉유웨이와 그의 무술변법운동에 대하여 평가를 갈수록 낮추는 것같다. 필자가 서점에서 캉유웨이의 주요저작인 <<신학위경고>>, <<공자개제고>>, <<대동서>>, <<일본변정고>>는 한 권도 찾아볼 수 없엇다. 일대거인이 이렇게 오늘날 잊혀진 것이다.

 

그러나, 캉유웨이가 주장한 허군공화(虛君共和), 민권강화, 헌정치국사상은 그 시대의 가장 고귀한 양방이었다. 그는 중국의 정치개조를 위하여 죽음을 무릎쓰고 돌진했으니, 감히 헌정의 선구라 할만하다. 그가 이후의 사상이 어떻게 시대의 조류에 맞지 않게 되었건, 그의 개인적인 덕망이 심각하게 결함이 있었던(현재 자주 사람들은 그의 개인도덕을 질책한다), 모두 그가 일대의 성도라는 이미지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

 

캉유웨이와 비교하여 한 세대 아래인 인인지사들은 '5.4' 신문화운동을 전개할 때, 역량을 사상문화의 개조에 집중했다. 아마도 이는 무거운 주제를 피하고 가벼운 주제를 택한 것이리라. 이는 마치 원래 배경이 되어야할 것을 함부로 전면에 내세운 것과 같다. 원래 무대위에 착실하게 나타나 있어야 할 것을 무대의 배경뒤로 밀어놓은 것과 같다. "5.4" 세대는 문화의 역량을 제도역량의 위에 두었다. 마치 무대와 배경을 뒤집은 것처럼. 우리들 몇 대의 독서인들은 바로 "5.4"의 우유를 마시며 자란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런 위치전도에 대하여, 아마도 장기간 깨닫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현재 중국에서 필요한 것은 캉유위를 찾아, 역량을 집중하여 제도변혁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